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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220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중에서 "벤야민이 말했듯이, 혼란을 보여주는 것은 혼란스럽게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 하나의 서사틀 안에서 「파사젠베르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단편들은 해석자를 의미의 심연으로 밀어넣으며, 바로크 알레고리 작가의 우울에 필적하는 인식론적 절망으로 위협한다(나는 지난 7년 동안 그러한 절망에 빠지고 싶은―아니면, 벤야민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 아래 기호학적 자유낙하를 즐기고 싶은―달콤한 유혹을 느낄 때가 많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그런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자의성에서 구해내.. 2016. 1. 13.
생각하기/분류하기 조르주 페렉, 『생각하기/분류하기』(2015, 문학동네) 모색중인 것에 대한 노트 글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 내가 모색해왔던 것이 무엇인지 구체화해 본다면, 머리를 스치는 첫번째 생각은 내가 쓴 책 중에 비슷한 책은 하나도 없고, 먼저 쓴 책에서 구상했던 표현, 체계, 기법을 다른 책에 절대 다시 써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계획적으로 부린 변덕 탓에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작가가 남긴 '발자국'을 열심히 찾아보고자 한 몇몇 비평가들은 여러 번 길을 잃었고, 분명 내 독자들 몇몇도 당황스러워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일종의 컴퓨터라느니, 원고 만드는 기계라느니 하는 명성을 얻었다. 나라면 차라리 여러 밭을 가는 농부에다 날 비유하겠다. 그중 하나에는 사탕무를, 또다른 밭에는 자주개자리를, 세번.. 2016. 1. 10.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 라캉과 함께한 헤겔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2013, 인간사랑) 슬라보예 지젝의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는 지젝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낸 것이라 한다. 그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과 『지젝이 만난 레닌』,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등을 읽으며 지젝의 논의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1부 '라캉과 함께한 헤겔'은 수월하게 읽히지 않았다. 1부는 단적으로 말해 '라캉으로 읽는 변증법, 변증법으로 읽는 라캉'이라고 하겠다(언젠가 주워 들은 말대로, 헤겔을 읽기 위해 굳이 라캉을 참조해야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지젝이 설명하는 변증법을 거칠게 해석하자면 이렇다. 헤겔의 저 유명한 표현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해질녘에야 날개를 편다."는 말대로, 우리는 사태를 늘 사후적으로, 소급적.. 2016. 1. 3.
인생사용법 『인생사용법』(2012, 문학동네) 2015년 12월 중순에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다 읽었다. 원래는 하루에 한 챕터씩 모두 99챕터를 매일 거르지 않고 읽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못 읽는 날도, 읽기를 미루는 날도 있다 보니 몰아서 읽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럴수록 조바심이 나서 서둘러 읽으려 했다. 페렉은 『인생사용법』을 침대에 엎드려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염두에 두며 썼다고 했다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가 사물의 세계를 편집증적으로 파고들 때 이를 제대로 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사물의 세계는 곧 상품의 세계이기도 하다. 페렉은 마르크스에 이어 상품의 세계로 내려간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사물에서 삶을,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다시 인물과 사물을.. 2016.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