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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중에서

by parallax view 2016. 1. 13.

"벤야민이 말했듯이, 혼란을 보여주는 것은 혼란스럽게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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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서사틀 안에서 「파사젠베르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단편들은 해석자를 의미의 심연으로 밀어넣으며, 바로크 알레고리 작가의 우울에 필적하는 인식론적 절망으로 위협한다(나는 지난 7년 동안 그러한 절망에 빠지고 싶은―아니면, 벤야민을 자기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 아래 기호학적 자유낙하를 즐기고 싶은―달콤한 유혹을 느낄 때가 많았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그런 작가가 아니다. 그리고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자의성에서 구해내는 것은 모든 성좌에 결정적인 방향성을 제공하는 벤야민의 정치적 관심이다. 이 엄청난 글모음을 해석해보려는 나의 노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 벤야민의 이름을 감싸는 성자의 아우라에 뭔가를 덧붙일 수 있다는 이 책의 내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벤야민의 정치적 관심이 여전히 우리의 관심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파사젠베르크」의 자료를 배열한 순서는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해석의 초점만은 자의적인 것이 아니다. 「파사젠베르크」는 필연적 서사구조가 부재하기 때문에 단편들이 자유롭게 묶일 수 있지만, 이 말은 절대로 개념 구조가 부재하다거나, 저작의 의미 자체가 전적으로 독자의 변덕에 달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혼란을 보여주는 것은 혼란스럽게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요사이 자기의 인식론적 자의성―이러한 자의성은 해방적·민주적인 것이라고 주장되지만, 원칙이 없을 때는 오히려 그야말로 독재적인 것이다―을 지지하기 위해 벤야민을 인용하는 많은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벤야민은 이러한 의미의 변덕을 근대라는 특정한 역사적 시대의 지표로 보았다. 즉 맹목적으로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인식해야 할 어떤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미학과 문학이론은 결코 철학을 대체할 수 없다. 오히려 미학과 문학이론은 철학적 해석에 전통적 연구주제를 양도해야 할 것이다. 


- 수잔 벅 모스,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2004) 제2부 서론, 79~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