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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인생사용법

by parallax view 2016. 1. 3.

『인생사용법』(2012, 문학동네


  2015년 12월 중순에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다 읽었다. 원래는 하루에 한 챕터씩 모두 99챕터를 매일 거르지 않고 읽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못 읽는 날도, 읽기를 미루는 날도 있다 보니 몰아서 읽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럴수록 조바심이 나서 서둘러 읽으려 했다. 페렉은 『인생사용법』을 침대에 엎드려 읽을 수 있는 소설을 염두에 두며 썼다고 했다 한다. 하지만 이 책은 그리 만만치 않다. 그가 사물의 세계를 편집증적으로 파고들 때 이를 제대로 쫓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사물의 세계는 곧 상품의 세계이기도 하다. 페렉은 마르크스에 이어 상품의 세계로 내려간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사물에서 삶을,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다시 인물과 사물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이야기로 빠져나가는 이 후기구조주의적 소설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체스의 행마법, 그중에서도 나이트의 이동을 소설에 적용해 소설 속 공간의 배치와 서술 순서에 일관성과 변칙성을 함께 부여하는 그 기술에 놀라게 된다. 페렉은 지독한 인용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책의 말미에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애거사 크리스티,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그문트 프로이트, 제임스 조이스, 프란츠 카프카, 토마스 만,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허먼 멜빌,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마르셀 프루스트, 프랑수아 라블레, 스탕달, 쥘 베른(…그 밖에도 많은 작가들이 있다)의 글을 차용하고 변형했다고 덧붙였다. 여기에 이탈로 칼비노, 해리 매튜스, 레몽 크노, 자크 루보,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 울리포(잠재문학작업실) 그룹의 책도 가미했다. 인용과 모방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창조를 갱신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에 경의를 보내고 싶을 정도다. 


  칠백 쪽이 넘는 분량이 독자를 압도하지만, 조금 과장하자면 『인생사용법』이야말로 '지적 모험'이라는 말에 잘 어울리는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2015년 상반기의 책으로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가 있었다면, 비록 출간된 지 3년이 지난 책이지만 지난해 하반기의 책으로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도 적게나마 책을 읽으며 보냈다. 새해에는 더욱 좋은 책을 좀 더 많이 읽으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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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될 것이다. 바로 시몽크뤼벨리에 거리 11번지의 4층과 5층 사이에서. 한 40대 여인이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데, 그녀는 스카이 천으로 된 긴 레인코트를 입었고, 장난꾸러기 작은 요정을 연상시키는 붉은색과 회색 체크무늬의 원뿔형 모자를 쓰고 있다. 오른쪽 어깨에는 갈색의 커다란 잡동사니 배낭을 메고 있는데, 속된 표현으로 '세면도구 주머니'라 불리는 부류의 가방이다. 가방과 가방끈을 잇는 크롬으로 도금된 금속 고리 중 하나에는 작고 흰 삼베 손수건이 묶여 있다. 그리고 가방 겉면에는 스텐실로 인쇄된 듯한 세 가지 그림이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다. 하나는 커다란 추시계이고, 또 하나는 반으로 갈라진 둥근 빵이며, 나머지 하나는 손잡이가 없는 종 모양의 구리 그릇이다. (…) 


  그녀는 왼손에 든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도면은 단순한 종이 한 장으로 아직 남아 있는 자국들이 그것이 사등분으로 접혀 있었음을 알려주며, 복잡한 글자들이 적힌 어떤 두꺼운 책자 위에 클립으로 고정되어 있다. 이 책자에는 그녀가 방문할 아파트와 관련한 세부적인 공동 규칙이 적혀 있다. 사실, 종이 위에는 하나가 아닌 세 개의 도면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상단의 첫번째 도면은 이 건물이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는 시몽크뤼벨리에 거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거리는 17구의 플렌 몽소 지역 안에서 메데리크 거리, 자댕 거리, 드 샤젤 거리, 레옹조스트 거리가 이루는 사변형의 공간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다. 왼쪽 상단에 있는 두번째 도면은 건물의 단면도로, 세대 전체의 배치를 도식화해 나타내고 있으며 몇몇 세대주의 이름을 명시하고 있다. 건물 수위인 노셰르 부인, 3층 오른쪽 아파트에 사는 보몽 부인, 4층 왼쪽 아파트에 사는 바틀부스, 5층 왼쪽 아파트에 사는 텔레비전 방송국 프로듀서 레미 로르샤슈, 7층 왼쪽 아파트에 사는 의사 댕트빌, 그리고 지금은 비어 있는 7층 오른쪽 아파트에 죽기 전까지 살았던 장인 가스파르 윙클레. 종이 하단에 있는 세번째 도면은 바로 윙클레가 살았던 아파트의 도면이다. 이 아파트는 거리 쪽으로 나 있는 세 개의 방과 안뜰을 향해 나 있는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창문 없는 창고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


  가스파르 윙클레가 거의 40년간 살면서 작업했던 세 개의 작은 방에는 별로 남아 있는 게 없다. 몇몇 가구와 작은 작업대, 도림질용 전동톱, 작은 줄들은 이미 치워지고 없다. 침대와 마주한 침실 벽 창문 옆에 걸려 있던,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정사각형의 그림도 이젠 없다. 그 그림은 어떤 방 안에 있는 세 남자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서 있는 두 남자는 창백하고 뚱뚱하며 긴 프록코트를 입고 마치 나사로 죄어놓은 것처럼 실크해트를 꾹 눌러 쓰고 있다. 그리고 역시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세번째 남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문가에 앉아 손가락에 꼭 맞는 새 장갑을 끼는 일에 열중하고 있다.

  여자는 계단을 올라간다. 머지않아 이 낡은 아파트는 두 배로 큰 거실과 더 넓은 방을 갖춘, 안락하고 전망 좋으며 조용하고 근사한 집이 될 것이다. 가스파르 윙클레는 지금 죽고 없지만, 그가 그토록 참을성 있게, 그토록 면밀하게 꾸며온 오랜 복수는 아직 완전히 실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24~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