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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생각하기/분류하기

by parallax view 2016. 1. 10.

조르주 페렉, 『생각하기/분류하기』(2015, 문학동네



모색중인 것에 대한 노트


글을 쓰기 시작한 후부터 내가 모색해왔던 것이 무엇인지 구체화해 본다면, 머리를 스치는 첫번째 생각은 내가 쓴 책 중에 비슷한 책은 하나도 없고, 먼저 쓴 책에서 구상했던 표현, 체계, 기법을 다른 책에 절대 다시 써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렇게 계획적으로 부린 변덕 탓에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작가가 남긴 '발자국'을 열심히 찾아보고자 한 몇몇 비평가들은 여러 번 길을 잃었고, 분명 내 독자들 몇몇도 당황스러워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일종의 컴퓨터라느니, 원고 만드는 기계라느니 하는 명성을 얻었다. 나라면 차라리 여러 밭을 가는 농부에다 날 비유하겠다. 그중 하나에는 사탕무를, 또다른 밭에는 자주개자리를, 세번째 밭에는 옥수수 등을 심는 농부 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쓴 책들은 서로 다른 밭 네 필, 네 가지 질문 방식과 연관되는데, 결국에는 어쩌면 같은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매번 각기 다른 문학작업 양식에 걸맞는 개별적인 관심에 따라 제기된 것들이다. 

  이 질문들 중 첫번째는 '사회학적' 방식, 즉 일상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규정해볼 수 있다. 『사물들』『공간의 종류들』『파리의 어느 장소에 대한 완벽한 묘사 시도』 등의 책과, 장 뒤 비뇨와 폴 비릴리오가 중심이 되어 1972년에 창간한 잡지 『코즈 코뮌』 위원회와 수행한 작업이 그 출발점이다. 두번째는 자서전 영역에 속하는데, 『W 혹은 유년기의 추억』『어두운 상점』『나는 기억한다』『내가 잠들었던 공간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번째는 유희적인 방식으로, 제약을 설정하고, 화려한 구문 유희들을 부려보고, 단계적 어조나 음률의 유희들을 사용하기 좋아하는 내 취향과도 부합하고, 내가 울리포에 있을 때 아이디어를 얻고 쓰는 법을 배워 풀어낸 모든 작업과도 맞아떨어진다. 즉 팔랭드롬, 리포그람, 팡그람, 아나그람, 이조그람, 이합체, 십자말풀이 등의 유희가 그것이다. 마지막 네번째는 소설적인 것, 이야기와 사건의 우여곡절에 대한 취향, 침대에 배를 깔고 엎드려 후딱 읽어치우는 책을 써보고자 하는 소망과 관련한 것으로, 『인생사용법』이 그 대표적 예다. 

  이런 구분은 다소 자의적인 것이며 훨씬 더 세부적으로 나눠볼 수도 있다. 나는 대부분의 책에다 당연히 어느 정도 (예를 들어 어느 장章을 쓰면서 그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에 대한 암시를 은근슬쩍 하나 끼워넣으면서) 자전적 표식을 해두는 걸 굳이 피하진 않는다. 무엇이든 울리포적 구성과 제한이 나를 속박하지 않고 상징적인 것일 뿐이라면, 어떻게든 이런저런 울리포적 제약을 두거나 울리포적인 구성을 따라 작업한다. 

  사실상 내 작업에 있어―나를 둘러싼 세상, 나 자신의 고유한 이야기,언어, 허구라고 하는―네 지평을 정의하는 이 네 극極을 뛰어넘어, 작가로서 나의 야심은 결코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거나 내가 남긴 흔적을 뒤따른다든가 하는 감정 없이, 내 시대의 모든 문학을 섭렵하고 오늘날 문인이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써보고자 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두꺼운 책이든 짧은 책이든, 소설이든 시든, 드라마든, 오페라 대본이든, 탐정소설이든, 모험소설이든, 과학소설이든, 대중 연재물이든, 아동서든…… 

  내 작업을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말로 설명해야 했을 때 나는 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비록 내가 쓰는 글이 오랫동안 구상한 프로그램과 상당 기간 준비한 프로젝트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내가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는 오히려 일을 해나가면서 발견되고 또 그러는 가운데 드러난다고 나는 생각한다. 책이 한 권씩 나올 때마다 (항상 '앞으로 나올 책'에, 글을 쓰고자 욕망할수록 절망적으로 이끌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미완의 책에 매달렸기에) 때로는 위안을 감정을, 때로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 책들은 하나의 길을 닦아나가며, 공간에 표식을 세우고, 모색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왜'인지는 말할 수 없어도 '어떻게'인지는 말할 수 있는 연구 단계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그리고 있다. 나는 막연하나마 내가 쓴 책들이 문학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총체적 이미지에 그 의미들을 새기고, 또 그 안에서 의미를 띤다고 느끼지만, 이 이미지를 결코 정확히 포착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이미지는 내게 글쓰기 너머의 것이며, '나는 왜 글을 쓰나'라는 물음에 대한 것으로, 이는 내가 오직 글을 쓰면서만, 기어코 완성되고야 마는 하나의 퍼즐처럼 계속해서 써나가면서, 이 이미지가 가시화되어갈 바로 그 순간을 끊임없이 유예시키면서만, 답할 수 있을 뿐이다(11~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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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정리하는 기술과 방법에 대한 간략 노트 


2.5. 다른 모든 책의 열쇠가 될 책을 찾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사서들처럼, 우리는 완성된 것에 대한 환상과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마주했을 때 생기는 현기증 사이를 부단히 오간다. 완성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단번에 지식에 이를 수 있게 해줄 유일한 질서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파악할 수 없는 것을 고려해, 질서와 무질서가 우연성을 가리키는 두 개의 같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 두 가지는 책과 체계의 마멸을 은폐하는 데 쓰이는 미끼요, 눈속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장서가 이 둘 사이에서 때때로 잊지 않기 위해 표시해둔 곳으로서, 고양이의 쉼터로서, 잡동사니 창고로 쓰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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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의 장소들 


  계략은 교묘히 피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계략은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이는 함정 같은 질문이고, 글texte이 되기 전, 어쩔 수 없이 글을 쓰게 되는 순간을 매번 늦추려고 던지는 구실prétexte과 같은 질문이다. 내가 적어두었던 모든 단어는 지표가 아닌 우회였고, 공상의 나래를 펼 소재였다. 4년 동안 정신분석을 받는 긴 의자에 누워 천장의 쇠시리와 갈라진 틈을 쳐다보면서 공상에 잠겼듯이, 열다섯 달 동안 나는 구불구불한 단어들을 가지고 공상에 잠겼다. 

  단어들이 언제고 떠오르겠지 생각하는 것은 지금처럼 그때도 위안이 되었다. 언젠가는 말을 시작하겠지, 글을 시작하겠지. 흔히들 말을 한다는 것은 발견하고, 찾고, 이해하고, 마침내 이해하게 되고, 진실의 빛으로 환해지는 것이라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천만에, 그런 일이 일어나야 그런 일이 일어났음을 알 뿐이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이 그때다. 말한다는 것은 오직 말한다는 것, 그저 말을 한다는 것일 뿐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오직 글을 쓴다는 것, 흰 종이에 문자를 그리는 것일 뿐이다.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나는 알았던가? 그토록 오랫동안 말하지 못했으면서도 늘 말해야만 했던 이 자명함, 오직 이 기다림, 손도 못 대볼 이 혼돈의 말에 깃든 이 긴장만을 찾았던 게 아닐까? 

  그 일은 어느 날 일어났고 나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좋겠다. 내가 막 그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러자마자 그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때를 말해줄 시제란 없다. 그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복합과거로 쓸 수 있고, 대과거로 쓸 수 있고, 현재로 쓸 수 있고,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쓸 수도 있다. 그렇다는 점은 이미 알고 있었고, 지금도 안다. 다만 무언가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도 시작중이다. 입은 말을 하라고 있는 것이고 펜은 글을 쓰라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 움직였고, 무엇인가 움직여 그려지면서, 종이에 잉크의 구불구불한 선이, 충만하고 섬세한 무엇인가가 나타난다. 

  먼저 나는 말과 글이 동등함은 자명하다고 보며, 마찬가지로 백지란 정신분석가의 집무실 천장에 있던 망설임, 환영幻影, 삭제 표시줄로서의 또다른 공간이라고 본다. 내가 잘 알고 있다시피 이것이 빤한 일은 아니지만 나에게는 앞으로 이런 식일 것이다. 정신분석을 받을 때 문제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 일이 일어나서, 최근 4년 동안 치료에 치료를 거듭하면서 가공됐던 것이다(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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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분류하기' 


J)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 순간에조차 내가 생각할 때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를 들어 '생각하기/분류하기'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생각하기/뒈지기'나 '분별 있는 주둥이' 혹은 '제자리에 놓일 때'가 떠오른다.* 이것을 '생각하다'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무한소나 클레오파트라의 코, 그뤼에르 치즈에 난 구멍이나 모리스 르블랑 및 조 슈스터에 나타난 니체의 영향을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건 괴발개발 끼적인 것, 메모, 상투어구의 논리를 훨씬 넘어선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어떻게 나는 이 작업(「생각하기/분류하기」)에 대해 '생각하면서'(성찰하면서?) 오목놀이, 스티븐 리콕, 쥘 베른, 이누이트, 1900년의 박람회, 런던의 길 이름들, 특별행정총감, 세이 쇼나곤, 『인생의 일요일』, 안테미우스, 비트루비우스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할 때도 있고 아주 모호할 때도 있다. 암중모색, 직감, 의혹, 우연, 우연한 만남이거나 고의적인 만남이거나 우연을 가장한 고의적인 만남에 대해 말해야 하리라. 

  말들 속의 우여곡절. 나는 생각하지 않지만 할말을 찾는다. 수많은 말들의 더미에서 이 동요를, 주저를, 차후에 '무엇인가를 뜻하게 될' 마음의 동요를 뚜렷이 드러내줄 말 하나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는 또 무엇보다 몽타주, 왜곡, 과장, 우회, 거울에 관련된 것이며, 

  공식에 대한 일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문단이 증명할 것이다. 


* '분류하기'라는 뜻의 프랑스어 classer와 '뒈지다'라는 뜻의 clamser가 비슷한 철자로 구성된 동사이기 때문에 쉽게 연상되며, '분별 있는 주둥이clapet sensé'에도 classer와 발음이 같은 cla[pet sen]sé가 포함되어 있다. '제자리에 놓일 때Quand c'est placé'에도 [p]lacé에 [c]lasser와 같은 발음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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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기/분류하기' 


K) 아포리즘 



마르셀 베나부(『아포리즘에는 다른 아포리즘을 숨길 수 있다』, 울리포 총서, 13호, 1980)는 아포리즘을 만들 수 있는 기계를 하나 구상했다. 이 기계는 문법과 어휘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문법에서는 대부분의 아포리즘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일정 수의 공식을 전부 모은다. 예를 들면, 

  A는 B에서 C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다. 

  다른 수단으로서 A는 B의 연속이다. 

  약간의 A는 B와 멀고, 많은 A는 B와 가깝다. 

  작은 A가 큰 B를 만든다. 

  B가 아니었다면 A는 A일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은 A에 있지 B에 있지 않다. 

  A는 B가 약이 되는 병이다. 

  기타 등등 

  어휘에서는 한 쌍(혹은 세 개, 네 개일 수도 있다)이 되는 단어를 전부 모은다. 이는 유의어(사랑/우정, 말/언어)일 수도 있고, 반의어(삶/죽음, 형식/내용, 기억/망각)일 수도 있으며, 음성학적으로 가까운 단어(신앙/법, 사랑/유머*)일 수도, 흔히 같이 쓰이곤 하는 단어(죄/벌, 낫/망치, 학문/삶) 등일 수도 있다. 

  어휘를 문법에 투입하면 무한에 가까운 아포리즘이 임의로 생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아포리즘은 어느 것이나 의미를 띠게 된다. 이제 이것을 폴 브라포르가 고안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집어넣으면 순식간에 좋이 열두어 개의 아포리즘이 쏟아진다. 

  기억은 망각이 약이 되는 병이다. 

  망각이 아니었다면 기억은 기억일 수 없을 것이다. 

  기억을 통해 나오는 것은 망각을 통해 사라진다. 

  작은 망각이 큰 기억을 만든다. 

  기억은 우리에게 고통을 더하고 망각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더한다. 

  기억은 망각에서 벗어나지만 무엇이 우리를 기억에서 벗어나게 할까? 

  행복은 망각에 있지 기억에 있지 않다. 

  약간의 망각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많은 망각은 기억에 가까워진다. 

  망각은 인간을 결합시키고 기억은 인간을 헤어지게 한다. 

  기억은 망각보다 더욱 자주 우리를 속인다. 

  기타 등등 

  '생각'은 어디에 있는가? 공식에 있는가, 어휘에 있는가, 둘을 결합시키는 작용에 있는가(145~146쪽)? 


* '신앙'이라는 뜻을 가진 foi와 '법'이라는 뜻을 가진 loi는 자음 하나의 차이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amour와 '유머'라는 뜻을 가진 humour 역시 두번째 음절 ~mour를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