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OnEitherSide423

노르웨이의 숲 하루키의 소설을 읽거나 그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언젠가, 하루키 소설 같은 건 소설도 아니라고 말했던 누군가가 떠오르곤 한다. 그는 제법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글 깨나 쓰는 엘리트였다. 아마도 그는 하루키 소설이 지금도 베스트셀러에 오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뉘앙스로 말했던 것 같다(늘 그렇듯 기억은 왜곡되지만). 하지만 하루키가 당신보다는 훨씬 나은 작가일 것입니다, 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비겁하게도 직업적인 이유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노르웨이의 숲』 이후로 너나 할 것 없이 하루키를 베꼈던 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루키가 세계적인 명사 자리에 올라 노벨문학상을 받으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 2017. 10. 5.
사회주의와 전쟁 레닌의 『사회주의와 전쟁』(레닌 전집 60 / 아고라, 2017)을 읽었다. 『제국주의』를 처음 읽었을 땐 왜 이렇게 카우츠키를 못 잡아먹어 안달할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레닌에게는 1차 대전 그 자체보다 (제국주의 전쟁은 당시에도 오래전부터 예견되었으니까) '조국 방위'를 위해 국제주의와 프롤레타리아를 팔아먹은 사회주의자들의 행태가 더 충격적이었기에, 겉으로는 혁명을 외치지만 사실상 전쟁에 동조하는 기회주의자들이야말로 격렬하게 성토해야 할 맞상대였다. 레닌은 그들과 전쟁을 벌였으며, 자신이 담론의 전쟁터에 서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언뜻 보면 거칠고 섬세하지 않은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하라!"와 "혁명을 위해 자국의 패배를 촉구하라!"는 슬로건은.. 2017. 9. 27.
뼈는 정신이다 그저께는 "거대한 이론을 창안하지 못해 안달하기보다 차라리, 코앞에 놓인 꽃의 냄새를 맡고 흘러가는 것들 그 자체의 무상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하는 태도가 훨씬 낫다"고 썼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이론은 세계의 단순한 반영이나 '프레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의 조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론은 구체적인 사물과 현상을 통과함으로써만, 그런 왜곡과 오독을 거침으로써만 생산되며, 그 자체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이야기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하세가와 히로시가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에서 설명하는 바를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정신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거대한 이론에 집착하기보다 일상의 사물에 눈을 돌려야 하는 이유는, 누군가 이론을 말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사물.. 2017. 7. 9.
<작은 우주들> 단상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작은 우주들』(김운찬 옮김, 문학동네, 2017)이 잘 읽히지 않는 이유를 알아낸 것 같다. 그의 글이 노인의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는 이탈리아와 슬로베니아의 경계(트리에스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의 경계(안테르셀바)를 헤매면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군상을 그들의 복잡다단한 역사와 단조로우면서도 변화무쌍한 자연경관과 함께 조명한다. 이때 마그리스는 늙은이들을 거듭 소환한다. 온화한 늙은이, 소란스런 늙은이, 심술궂은 늙은이까지 가리지 않는다. 도나우 강의 도도한 흐름과 함께하는 『다뉴브』와 비슷한 스타일로 쓰였지만, 『작은 우주들』에는 그 제목 그대로 '작은 우주들microcosmi'에 대한 무한한 집착이 보인다. 죽어가는 것을 향한 끊임없는 탐구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나.. 2017. 7.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