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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54

암살 뒤늦게 영화 을 봤다. 장 피에르 멜빌의 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의 레지스탕스란 범죄 조직과 유사한 구조일 수밖에 없었고 지배 질서의 관점에서는 범죄 조직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 범죄 영화라는 스타일을 통해 당대를 살피는 작업도 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민족주의 정서에 호소하는 부분을 덜어낸다면 아마 스타일밖엔 보이지 않았을 텐데, 그 때문에 감독은 이 영화에서 '민족'의 다중성, '조선인'의 다중성을 한몸에 보여주는 캐릭터인 염석진을 통해 무게중심을 잡으려 했던 게 아닐까 싶다. 반민특위 이후의 역사를 아는 우리는 일본의 항복을 담은 기록 영화를 보며 기뻐하는 독립투사들을 볼 때, 레지스탕스들을 괴롭혔던 배신과 내전이 또 다시 반복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들은, 사실 해방 전에도 내전.. 2016. 1. 12.
바닷마을 다이어리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를 보았다. 그의 전작 은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그리고 어른들과의 관계 밖의 관계, 즉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자기와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를 조명한다(아이들은 또한 그렇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주인공 소년의 소원은 헤어진 엄마 아빠가 화해하는, 가족의 회복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세계 평화라는 공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소년은 '청년'이 된다). 그리고 는 어른이 어떻게 아이와 관계를 맺어가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는 두 작품 사이의 어딘가에서 엉거주춤한다. 그의 작품들이 항상 예리하거나 날카로운 것은 아닐 테지만, 확실히 는 와 비교하면 실망스러운 결과물이다. 일상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는, 연대 속에 숨은 비.. 2015. 12. 26.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를 보면서, 언젠가 들뢰즈로 홍상수 영화를 분석하려던 발표를 보았던 게 떠올랐다. 영화연구자라면 홍상수 영화를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영화의 시간-이미지 따위의 들뢰즈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법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홍상수 영화는 덜 불편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주인공인 영화감독은 언제나 그랬든 자주 찌질거리고 낯선 곳에서 만난 여자와 썸을 타며 끝내 만남에 실패한다. 그런데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 실패가 오히려 성공이다. 영화는 두 개의 이야기로 분기한다. 1부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는 남자가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에게 아부하며 어떻게든 '해볼라고' 시도하는 과정이 결국 실패하는 영화다. 2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1부의 내용을 반복한다. 그러나 .. 2015. 10. 5.
엑스칼리버 어젯밤에는 존 부어먼의 를 보았다. 아서 왕 전설 자체가 수많은 전설의 헐거운 짜깁기인 만큼, 얼핏 맥락없어 보이는 서사도 이 영화 자체가 '전설'이라고 생각한다면 납득하게 된다. 여담으로, 조금 검색해 보니 아서 왕을 연기한 나이젤 테리는 틸다 스윈튼과 마찬가지로 데렉 저먼 영화에 꾸준히 출연한 배우이며 저먼의 절친이었던 것 같다. 헬렌 미렌(모르가나 분)과 리암 니슨(가웨인 분)의 젊은 시절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영화의 시대 고증은 지금 기준으로는 철저하지 않을 수 있다(아서 왕 전설의 실제 배경으로 추정되는 시대는 서기 5~6세기이고, 토마스 말로리의 은 15세기 저작이다. 어차피 로망스 문학을 원전으로 한 이상 '철저한 고증'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는 무척 연극적으로 보이기도.. 2015.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