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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캐롤, 김현

by parallax view 2016. 3. 5.

1. 김학철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2016, 문학동네)는 현대 정치철학자의 이목을 끄는 사도 바울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최대한 평이하고 대중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읽으면서 바울의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은 아무래도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의 그늘 아래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스쳐 지나간다(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독』이 제시될 것이다). 김학철은 기독교의 밑바닥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있으며, 세속적 기준에서 가장 힘이 없고 어리석고 나약한 자들이야말로 가장 힘이 세고 지혜롭고 강인하다는 게 기독교 변증법의 핵심이라는 걸 강조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은 한국의 주류 교회와 아주 상반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중요한 건 무신론이나 반기독교적 정서만으로는 '종교라는 아편'을 간단히 기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젝이 그토록 '예수의 괴물성'과 '기독교적 무신론'을 설파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은 사랑에 빠진 레즈비언들에 대한 영화다. 이런 유의 영화에 으레 붙는 '보편적인 사랑' 운운하는 공치사는 아주 불필요한 것이다. 사랑은 복수의 사람들 간에 이뤄지는, 지극히 내밀한 것인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마케팅의 언어는 그런 식으로 이성애의 도덕률을 회피하기 위해 고안된다. 영화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선을 침착하게 차곡차곡 쌓아간다. 혹자는 캐롤과 테레즈를 두고 중년의 이성애자 남자와 어린 여자아이 간의 관계로 금세 치환하거나, 그저 캐롤이 돈이 많기 때문에 그런 연애가 가능한 게 아니냐고 하기도 했다. <캐롤>은 그런 식으로 뭉뚱그려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영화다. <벨벳 골드마인>이나 <아임낫데어>에서 보여줬던 발칙함이 가라앉은 대신, 감독은 캐릭터에 깊숙이 몰입하는 동시에 1950년대의 풍요와 불안감을 차분하게 그려내는 데 집중한 듯하다. 영화는 언뜻 그 시대의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향수에 젖어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단지 의상이나 미장센을 재현하는 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3.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김현 일기 1986-1989』 개정판(2015, 문학과지성사)은 김현이 죽기 몇 해 전의 기록이다. 일기이긴 하지만 해제를 단 이인성의 말대로, 이 책은 결코 내밀한 기록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출판을 예상해 상당 부분을 삭제하고 가필했기에 여기서 김현의 속내를 다 알겠다는 건 만용일 뿐이다. 읽으면서 더욱더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 같은 책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른바 '선배들'의 흐름에 너무 무지하다. 이 책에서 김현은 늘상 뭔가를 읽고 있으며 날카롭게 비평하고 타인을 쉽게 칭찬하지 않는다. 그러는 한편, 늘 자신의 육체가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한 마디로 말해, 그는 자기가 죽어간다는 걸 안다. 그의 육체는 그를 부끄럽게 한다. 부슬비 내리는 날, 혼자 관악산에 올랐다가 "설사를 만나" "괄약근을 잔뜩 오므리고 뒤뚱뒤뚱" 걸으며 겨우 주차장 앞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니 한 가지 깨달음이 그를 찾아온다. "산다는 것이 뭔지라는 형이상학적인 질문이 항문에서부터 솟아난다! 사상은 육체의 공간 속에 숨어 있다, 아니 웅크리고 있다. 그놈이 기지개를 켜면 머리가 놀란다. 아, 육체는 이렇게도 할 말이 많았구나." (316쪽, 1989년 7월 16일) 그의 마지막 일기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새벽에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 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366~367쪽, 1989년 12월 12일)


정희진은 이 책을 소개하면서 '사람 대신 만질 수 있는 몸'이란 말을 했다. 책이 사람 대신 만질 수 있는 몸이라면, 『행복한 책읽기』는 병들고 아픈, 죽어가는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몸이다. 그래서 '행복한 책읽기'라는 제목은 역설적이다. 책을 읽는 김현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죽지 않기 위해 읽는다기보다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읽는다. 그는 행복에 그리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책은 그런 순간에만 읽히는지도 모른다. 책은 행과 불행에 좌우되지 않을 때에만 읽히고, 그럴 때에만 행복 비스무레한 것이 아주 희미하게 찾아오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조금은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