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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

by parallax view 2016. 2. 15.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2012, 문학동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역사: 끝에서 두번째 세계』는 그의 지독한 반(反)헤겔주의를 정확하게 드러내는 저작이다. 내가 크라카우어의 『역사』를 읽고자 했던 것은 발터 벤야민 그리고 테오도어 아도르노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어떤 징검다리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징검다리는 순순히 두 입장을 절충하거나 연결해 주지 않는다. 크라카우어는 앞서 말한 대로 반헤겔주의자로서 역사의 총체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역사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속성을 가진 철학도, 이야기라는 서사적 형식을 통해 인간의 삶을 재현하는 예술도, 역사를 자연처럼 다루는 과학도 아니라고 말한다(하지만 서사적 형식과 과학적 탐구라는 영역에 한해서는 역사에서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승인한다). 


  크라카우어에 따르면 역사는 철학이라는 '가장 높은 영역' 혹은 '가장 마지막 영역'에서 한 발짝 물러난 영역, '끝에서 두 번째 세계(the last thing before the last)'다. 그는 이 '끝에서 두 번째 세계'를 '대기실'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역사는 철학의 추상적 작업을 통해서도 다 포괄할 수 없는 기억과 기록의 잔여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하려는 철학적 야심은 역사라는 영역에서는 발을 붙일 수가 없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크라카우어는 철학이 역사에 섣불리 발을 붙이려는 제스처를 취하자마자 크게 호통을 치면서 녀석을 발로 걷어차 버리려 한다. 그가 보기에 역사가 진보하거나 진화한다는 믿음은 인류의 최종적 구원을 상정하는 종말론적 역사철학의 반복이고 신학의 세속적 버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크라카우어는 『역사』를 통해 '역사철학 비판'이라 할 만한 것을 시도한다. 여기서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 테제(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하지만 크라카우어는 벤야민이 긍정한 신학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그 또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기독교적 해석이 역사를 전유하는 것을 방임하지 않는다. 크라카우어가 긍정하는 역사는 결론을 내리길 망설이는 역사, 현실의 그물망에 붙잡혀 타락하기 전의 역사,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많은 기억과 기록의 파편을 일일이 주워담는 역사다. 


  거칠게 말해서 나는 위대한 이데올로기 운동들의 태동기nascent state, 이데올로기가 제도화되기에 앞서 여러 이념들이 우위를 다투던 그 시대에 흥미를 느낀다. 또 나는 승리한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행보를 따랐는가보다는, 그 이데올로기가 출현했을 당시 논쟁사안이 무엇이었는가에 더 흥미를 느낀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논쟁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 있으며, 이때 내가 강조하는 것은 역사가 검토해보지 않았던 그 가능성들이다. (…) 

  어쨌든 나는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최종 정착하기 직전의 시대, 종교개혁 직전의 시대, 공산주의 운동 직전의 시대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다. 그 시대들이 내게 그런 매력을 발하는 이유는 그 시대들이 프루스트의 마음을 움직였던 나무들의 메시지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미묘한 메시지를 전해주리라는 예감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면 그 시대들의 메시지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시대들의 메시지는 서로 상충하는 대의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 대의들 사이에 숨어 있는 틈새라는 점이다. (22~24쪽) 


  크라카우어가 깊이 관심을 두는 이 '태동기'는 이념이 아직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을 때의 찰나를 말한다. 그는 이념들 간의 투쟁이 하나의 이념의 승리로 끝나고 승리한 이념이 제도화된 이후의 세계를 깊이 혐오한다. 어떤 면에서는 순혈주의적으로 보일 정도의 이런 혐오감이, 종교는 세속화를 통해 그 목적을 완수한다는 식의 헤겔주의적·변증법적 논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크라카우어의 반헤겔주의는 오늘날의 후기구조주의에서 드러나는 총체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 사소한 것의 자율성을 향한 근본주의적인 옹호와 곧잘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 크라카우어가 그토록 반신학적인 입장을 취함에도, 그가 강조하는 이 태동기에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열망, 즉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점에서 크라카우어를 손쉽게 '조숙한 후기구조주의자'라는 식으로 포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다만 그가 강조하는 유토피아는 크라카우어가 죽은 해인 1966년에 미셸 푸코가 라디오 채널에서 언급한 '헤테로토피아'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크라카우어는 카프카가 『돈키호테』의 산초 판사를 자유인이라 정의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 정의에는 유토피아적인 데가 있다고 쓴다. "이 정의는 틈새의 유토피아―우리가 알고 있는 영역들 사이에 존재하는 미지의 땅―를 가리킨다(235쪽)"]. 


  역사를 바라보는 크라카우어의 관점에는 반역사철학만 깔려 있지 않다. 크라카우어는 직선적·선형적 역사관에 반발하면서 '덩어리진 시간'을, 각기 다른 장르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역사(경제사, 정치사, 예술사…)가 통합적 역사인 통사와 완전히 결합할 수 없음을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통사/거시사의 연대기적 시간과 미시사의 덩어리진 시간이 양립 가능하다는 것 또한 힘주어 말한다(그는 벤야민의 '경험적 역사' vs. '메시아의 시간'을 세속적으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크라카우어가 역사를 이해하는 방식은 사진과 영화를 이해하는 방식을 반복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현실과 카메라-현실은 현실을 극도로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역사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려는 '리얼리즘 경향'과, 현실을 나름의 서사에 따라 해석하고 번역하려는 '조형 경향' 사이를 왕래한다. 리얼리즘 경향과 조형 경향 사이의 긴장이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생산하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학과 카메라 매체 간에 존재하는 근본적 유비는, 역사가와 사진가 모두 선입견에 기대 기록의 의무를 방기하는 것과 조형될 원료를 완전히 소비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역사학과 카메라 매체 사이에는 특유의 소재에 있어서도 근본적 유비가 존재한다. 사진과 영화가 "미학의 기본원칙"을 인정한다고 할 때, 카메라가 잡는 피사체는 대개 과학의 대상인 추상적 자연이 아니며, 그런 피사체가 놓여 있는 세계는 질서정연한 코스모스를 암시하는 세계가 아니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은 '코스모스Cosmos'가 아니라 땅과 나무와 하늘과 거리와 철도……"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카메라-현실'―사진작가나 영화감독의 렌즈가 열리는 그런 현실―은 생활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유의 현실의 구성요소는 무생물들, 얼굴들, 군중들, 관계를 맺기도 하고 고통당하기도 하고 소망을 간직하기도 하는 사람들이며, 이러한 현실의 큰 테마는 삶, 우리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바로 그 삶이다. (73쪽) 


  벤야민에게 사진과 영화(특히 몽타주)가 구체적 역사를 정지시키고 꿈의 세계를 폭파하는 폭탄, 정지 상태의 변증법을 체화하는 변증법적 이미지라면, 크라카우어에게 사진과 영화는 구체적 역사 그 자체다. 크라카우어와 벤야민 모두 역사의 파편에 관심을 기울이고 유토피아적인 '좁은 문'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는 생각보다 훨씬 크다(아도르노와 크라카우어 사이의 거리는 그보다 훨씬 멀 거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이토록 지독한 반역사철학자 크라카우어를 역사유물론을 신학이라는 난쟁이를 통해 갱신하고자 한 벤야민이나 '부정변증법'을 시도하는 아도르노과 같은 노선에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물론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통상적인 '역사철학자'로 묶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재원들과 친교를 나눴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로 묶이는 것은 몹시 싫어했던 이 '국외자'의 저작에서 역사유물론을 성급하게 끄집어내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그가 남긴 이 파편 같은 저작(『역사』는 크라카우어가 남긴 유고를 편집한 것이며, 그가 죽고 3년 뒤에 출간되었다)이 '잃어버린 대의들의 전통을 수립하고' '이제껏 이름이 없었던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자 한'(236쪽) 세속적 시도라는 점을 상기하는 걸로 충분할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키르케고르의 말을 호기롭게 인용한다. "그 세상이 뭐가 됐든 나는 순수함을 지킬 테다, 이 세상을 위해 나의 순수함을 바꾸지는 않을 테다." (236쪽)


  에필로그를 대신하여 

  (저자의 메모에서) 


  이 세상의 도그마들 사이에 숨어 있는 '진짜the genuine'에 주목함으로써 잃어버린 대의들의 전통을 수립하기. 이제껏 이름이 없었던 것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 


……그러나 독창적 인간이 나타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라고 하지 않고, 그 세상이 뭐가 됐든 나는 순수함을 지킬 테다, 이 세상을 위해 나의 순수함을 바꾸지는 않을 테다, 라고 한다. 그의 말이 들린 순간, 전 존재에 변화가 생긴다. 마치 동화에서 마법에 걸렸던 성문이 백 년 만에 열리고 만물이 소생하듯, 전 존재가 눈을 뜬다. 한편으로, 천사들이 바삐 움직이며 바야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호기심을 안고 둘러본다. 다른 한편으로, 오랫동안 빈둥빈둥 손가락을 물어뜯던 검은 악령들이 벌떡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며 "이건 우리 거야"라고 한다…….


(관련어: 진짜)

카프카가 인용한 키르케고르의 말

(Brod, Franz Kafka, 1963, 180쪽 이하)

(236쪽)


P.S. 크라카우어가 부르는 '역사' 혹은 '역사학'을 '인류학'이나 '민속학/민속지학'으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경험연구, 그중에서도 참여관찰과 심층면접 등 질적 방법론(qualitative methode)을 연구 방법론으로 배운 내게 그가 말하는 역사, 파편화된 시간들의 덩어리는 꽤 익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