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여론』(마르셀 모스, 이상률 옮김 / 한길사, 2002)은 에밀 뒤르켐의 조카이자 프랑스 사회학·인류학의 거두인 마르셀 모스의 노작이다. 그가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말할 것도 없고, 부르디외,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푸코 등에게 미친 영향은 무척 크다고 한다. 그런데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저술한 저작은 거의 없는 듯하다. 문화인류학자 류정아 씨가 쓴 해제를 보면 모스는 단독으로 연구하기보다 다른 학자들과 공저하길 선호했던 것 같다. 공동 작업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준 셈인데, 이는 현대 문화연구자와 인류학자들에게도 모범이 된 게 아닐까 싶다(대표적으로 연세대 문화연구 그룹과 조한혜정 등).
추2. 특허법과 관련한 모스와 장하준 사이의 대조점을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증여론』을 읽은 것은 『거대한 전환』과 『리오리엔트』를 경유하면서 시장 경제와 비시장 경제 사이의 교점을 탐색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leopord, <거대한 전환>, <리오리엔트>). 이미 2009년의 경제 인류학 콜로키움에서 폴라니와 모스를 연이어 읽은 맥락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필통넷, <경제 인류학>). 나는 『증여론』을 읽으면서 프랑스에서는 굳이 폴라니를 볼 필요를 못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라니가 1944년에 『거대한 전환』을 출간했고(같은 연도에 하이에크가 『노예의 길』을 냈다), 모스가 1925년에 『증여론』을 썼으니까 거의 20년 전에 폴라니가 할 말을 다 한 셈이다(폴라니는 자신의 경제인류학적 관점을 말리노프스키와 투른발트, 마거릿 미드 등에서 찾고 있다). 특히 말리노프스키, 보아스 등의 연구가 품은 의미를 보다 섬세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말하는 '전일론적 관점'과 '다양성 속의 통일성' 개념을 보다 완전하게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루이 뒤몽은 『거대한 전환』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증여론』이 『거대한 전환』과 연결될 가능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른바 원시 혹은 미개 사회의 '살림살이'는-본문 번역에서는 이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살림살이oekonomi로서의 경제economy 개념은 통시적·공시적으로 중요하다-선물을 매개로 한 공동체 생활이다. 사람들이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누군가 강요해서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선물 교환은 자발적이고 우호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개인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자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따로따로 흩어진 '섬'이 아니라 마을(가족, 부족, 종족 등)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안에 존재하는 경제는 의무의 경제이다. 주어야 할 의무와 받아야 할 의무, 그리고 받은 만큼(아니, 그보다 더 많이) 다시 주어야 할 의무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부과된다. 이 의무를 함부로 깰 수 없는 이유는 그로 인해 공동체의 힘이 커지거나 줄어들기 때문이다. 즉, 선물 교환은 축제이자 전쟁이며, 우정과 환대의 공간이자 권력 투쟁의 장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공동체 및 구성원들의 영혼이 걸려 있다. 모스는 이 선물 교환의 축제를 포틀래치potlach로 부르자고, 또 이런 경제를 '전체적인 급부 체계'systeme de prestation totale로 부르자고 제안한다.
게다가 아메리카의 학자들이 밴쿠버에서 알래스카에 걸쳐 사는 백인과 인디언의 일상 언어의 일부가 된 치누크(chinook)어(치누크족은 미국 북서부 컬럼비아 강 유역에 사는 아메리카 인디언-옮긴이)의 명칭을 이용해서 부르는 바와 같이, 우리는 그것을 포틀래치(potlach)라고 부르자고 제의한 바 있다. '포틀래치'란 원래 '식사를 제공하다'(nourrir) 또는 '소비하다'(consommer)를 뜻한다. (p.54)
씨족 자체가 그 구성원 모두를 위해서, 그들이 소유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또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을 위해서 추장을 매개로 하여 계약을 맺는다는 의미로, 그곳에는 전체적인 급부가 있다. 그러나 이 급부는 추장의 이름으로 매우 두드러진 투기적(鬪技的)인 성격을 띤다. 이 급부는 본질적으로 고리대적(高利貸的)이고 낭비적이며, 무엇보다도 귀족들이 나중에 자신들의 씨족이 누릴 위계서열을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p.56)
이와 같은 내용은 멜라네시아의 트로브리안드 제도를 연구한 말리노프스키(『증여론』에서도 쿨라 교역을 주로 인용한다)와,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 등지에서 사는 콰키우틀족, 틀링깃 족 등을 연구한 프란츠 보아스의 기록 등을 토대로 보다 구체화된다(투른발트도 각주에서 인용되지만, 솔로몬 제도 연구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단순한 우애의 표시가 아니다. 더러는 미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사치스러우며 과시적인 소비가 축제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선물 교환은 언제나 축제와 함께 벌어진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 축제의 절정은 부(富)의 상징인 동판을 깨버리거나 바다에 던져버리는 것이다(더러는 노예를 죽이기도 하며, 재산을 불태우는 등 파괴의 방식은 다양하다).
때로는 주거나 답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답례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나타내기 위해서 단순히 물건을 파괴하는 일이 있다. 생선기름이나 고래기름의 통을 완전히 태워버리기도 하고 집과 수천 장의 담요를 태워버리기도 한다. 또 상대방을 압도하여 '끽소리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가장 비싼 동판을 파괴하기도 하고 물 속에 던져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하면 자기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뿐만 아니라 자기 가족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진다. 따라서 이러한 종류의 법과 경제 체계에서는 막대한 부가 끊임없이 소비되고 이전된다. 이러한 이전을-원한다면-교환·교역 또는 판매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교역은 예의와 후함으로 가득 차 있는 귀족적인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것이 다른 정신으로, 즉 직접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서 행해진다면 그것은 매우 뚜렷한 경멸의 대상이 된다. (pp.141-144)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경제인homo economicus은 존재하지 않는다. 효용(개인적 만족에 대한 양적 개념)에 기반해 최적의 소비를 합리적으로 선택하는 행태는 보편적인 것도, 원초적인 것도 아니다. 이어서 모스가 '제3장 고대의 법과 경제에서 증여 원칙들의 잔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12표법 이전의 고대 로마와, 게르만 부족 사회, 힌두 전설 등을 참고했을 때, 이른바 '문명 세계'조차도 개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경제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미약했다는 것이다. 이는 서문인 '증여, 특히 선물에 답례해야 하는 의무에 관하여'에서 인용한 에다(Edda,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서사시집)의 한 구절을 통해서도 드러난다(42절은 게임 이론상 팃포탯 전략tit-for-tat을 연상시킨다).
(41절) 무기와 옷을 주면
친구들은 서로 즐거워할 것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그것을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서로 선물에 답례하는 자들은
만일 그 물건들이 잘 쓰인다면
언제나 변함없는 친구가 된다
(42절) 누구나 친구에 대해서는
친구로 있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선물에 대해서는
선물로 답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웃음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답하고,
거짓말에 대해서는 속임수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p.45)
이 점에서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리오리엔트』에서 중세와 근대의 '세계 경제'마저도 이윤으로 움직이는 시공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것은 착오다. 화폐조차도 단순히 구매력의 수준에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어떤 권력을 상징하고 반영하느냐로 파악해야 한다. 희소한 것은 자원(화폐)이 아니라, 권력(권위)이다(leopord, <책세상문고 서평>).
여기서 현대인(좀 더 정확하게는 '근대인')이 모스의 전일론적 관점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드러난다. 즉, 선물 경제가 품고 있는 다양한 정치적·경제적·법적 의미와 한계가 종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물에 영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한갖 미신으로 여겨지는 근대 산업 사회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혹스런 개념이다(인간과 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으로서 영(靈), 제의(際儀), 신앙 등은 모스에 대한 프레이저의 지적 영향력과 함께,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을 독해함으로써 더욱 심도깊게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모스의 연구가 주는 의미를 잘 헤아려 보면 선물 경제가 우리 생활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통찰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선물을 주고 받으며, 여기에는 호의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온전히 자발적이고 순수한 일인가? 선물은 일종의 고마움의 표시이면서, 최대한 성의껏 돌려줘야 하는 것이 아니었던가(선물 교환의 부정적인 행태로는 정경유착과 각종 부정부패가 있는데, 이 또한 선물 경제 연구의 주된 대상일 것이다). 산업 사회에도 남아 있는 이런 관념과 풍습을 인습으로 폄하하거나, '자유 시장'(완전경쟁시장)을 경제 생활의 유일한 장으로 고정시키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제 '살림살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장 경제는 결코 완전히 시장 자율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는 폴라니의 지적은 옳다.
다시 법적·경제적·정치적·종교적 생활의 복합체로서 선물 경제의 의미를 짚어보자. 모스는 상호부조와 호혜의 경제가 부활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당대 프랑스의 조합주의적corporatist 경향이 시장 자율에 의한 인간성 파괴를 치유할 방법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기능적 민주주의자' 폴라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보편적 복지'가 화두인 '지금 여기'에서, 모스와 폴라니는 시장 경제와 비시장 경제가 서로 포개져 있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포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기서 시빌리떼(civilite, 시민윤리. 옮긴이 이상률은 이를 '예의'로 번역했지만, 나는 발리바르의 개념을 끌어와야 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우리, 유럽의 시민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가 일종의 새로운 '시민 종교'로 기능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있겠다.
『증여론』에서 드러나는 소비 행태는 베블렌의 '과시적 소비' 개념으로 이어질 것이다(옮긴이는 바타이유와 보드리야르의 소비 개념을 선취한 모스에 주목하지만, 나는 그런 관점이 종교학적·인류학적 관점은 배제시키는 시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시장 역시 하나의 제도로서, 또 살림살이와 관계망의 '패턴'으로서 존재한다는 걸 인식한다면 자기조정 시장의 파괴적인 행보를 조금이라도 완충하고 넘어설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왜 문화연구자로서 모스를 읽어야 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추1. 카이사르는 공화정 말기 로마의 유명한 빚쟁이였다. 특히 그의 최대 채무자인 크라수스는 채무를 가문의 정치적·정서적·경제적 유대를 형성하는 수단으로 능수능란하게 활용한 사람이었다. 『증여론』에 따르자면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의 '노예'(비유적인 표현이다)인데, 어떻게 정치 파트너로 '대등해질' 수 있었을까? 이를 '교활한 카이사르' 때문으로 넘겨짚는 건 그다지 좋은 태도가 아닌 것 같다. 『증여론』은 고대 로마(그리스 포함)의 경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단초를 제공한다. 이해타산적인 경제가 셈족·헬라인·로마인에게서 나타나지만, 이 또한 멜라네시아와 아메리카와 마찬가지로 종교·관습과 얽히고 설켜 있다. 그런 점에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추2. 특허법과 관련한 모스와 장하준 사이의 대조점을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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