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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9월이여, 오라

by parallax view 2011. 1. 30.
『9월이여, 오라』(아룬다티 로이, 박혜경 옮김 / 녹색평론사, 2004)는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의 가디언지(誌) 기고문과 강연회 연설문 등을 모은 에세이집이다. '아룬다티 로이 정치평론집'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 및 그를 둘러싼 현실 정치와 대안세계화 운동에 대한 작가의 입장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녀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갓 읽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살갗을 하나하나 정갈하게 발라 고통을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문장들. 소설 속 시공간은 인도 케랄라의 습한 공기를 한껏 머금었고, 아이들의 땀냄새로 비릿했다. 작가에게 '무엇'을 말하느냐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어떻게' 말하느냐이다. 그것을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스타일이란 딱히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없다면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자면, 그 가혹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바로 아룬다티 로이 자체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작가와 작품은 별개의 존재이며, 독자는 둘이 포개지는 지점을 '공통점'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의무가 있다).

비록 산문이고 정치평론이라는 특징이 있긴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픽션과 논픽션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 내가 작가-활동가로 불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이ㅡ긍정적으로 사용될 때에도ㅡ왜 나를 움찔하게 만드는 것일까? 내가 작가-활동가로 불리는 것은 《작은 것들의 신》을 쓴 후 내가 세편의 정치 에세이를 썼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핵실험에 관한 〈상상력의 종말〉, 대형댐과 '개발' 논쟁에 관한 〈더 큰 공공선〉, 그리고 물이나 전기 같은 필수 기간시설의 민영화와 기업화에 관한 〈힘의 정치〉가 그 글들인데, 이 글들이 다루고 있는 대상은 우연히도, 아요드의 사원 건설 다음으로 현재 인도정부가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p.27)

그런데, 나는 《작은 것들의 신》을 쓴 사람은 왜 작가로 불리고, 정치 에세이를 쓴 사람은 왜 활동가로 불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작은 것들의 신》은 소설이지만, 내가 쓴 어떤 에세이 못지않게 정치적입니다. 물론 내 에세이들은 논픽션입니다. 그러나, 대체 언제부터 작가들이 논픽션을 쓸 권리를 포기했는지요? (p.28)

『작은 것들의 신』은 로이의 자전적 소설로서, 그녀는 개인(가족)의 문제가 어떻게 사회의 문제와 포개지는지 예리하게 포착해냈다(소설과 에세이 모두 언급되는 케랄라 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봐도 좋겠다). 권력을 둘러싼 젠더 문제, 즉 가부장제는 이야기의 빛이자 그림자로 존재한다. 『작은 것들의 신』은 국가와 카스트와 가족 안에서 질식해가는, 동시에 운명에 저항하다 죽어간 모든 여자들, 아이들, 불가촉천민들, 무엇보다 '자연'을 위한 소설이다. 표현방식이 바뀌었을 뿐, 권력과 저항이라는 테마는 그녀 안에 꾸준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부커상Booker Prize 수상이라는 명성과 그로 인해 자신에게 들어오는 자본 앞에서 고통스러워했을 테다.

나는 내가 우연하게도 이미 가진자들 사이에 세계의 부를 순환시키고 있는 거대한 파이프에 구멍을 뚫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파이프에서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 돈이 쏟아져 나오면서 내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나는 《작은 것들의 신》 속의 모든 감정, 모든 작은 느낌이 모조리 은화(銀貨)로 교환되어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조심하지 않는다면, 어느날 나 자신이 은으로 된 심장을 가진 은색의 형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내 주변의 폐허화된 풍경은 그저 나 자신의 번쩍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이바지할 뿐일 것만 같았다. (p.6)

언제나 그렇듯, 작가로서 산다는 것은 굴레를 스스로 덮어쓰는 것이다. 그저, 운명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저주받은 운명이다. 작가라면 늘 아픈 눈을 뜬 채로 있어야 한다. 날마다 창문 유리에 얼굴을 바짝 대고 있어야 하고, 날마다 추악한 모습들의 목격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낡아빠진 뻔한 것들을 새롭게 이야기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사랑과 탐욕, 정치와 지배, 권력과 권력의 결여ㅡ이런 것들에 대해서 되풀이하여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p.5)

소설의 성공에 힘입어 1년간 세계를 여행한 그녀가 귀국하자마자 인도의 핵개발과 댐건설에 반대하는 글을 쓰면서 작가로서의 안정된 삶을 버린 것은 자연스럽다. 또,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미국의 전횡을 '제국의 신민이자 노예로서' 격하게 비판한다. 마지막 연설문인 '새로운 미국의 세기'의 경우에는 보다 직접적으로 '적'을 분쇄할 '전략'을 요구하고 또 제안한다는 점에서 이미 로이는 열성적인 운동가다. 당연히 로이는 인도의 중산층에게 격렬한 비난을 받았을 테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대중적으로 성공한 중산층 작가(누가 여기에 들어갈 수 있을까? 김영하? 혹은 한나라당을 지지하지 않는 이문열?)가 뉴타운 공사와 4대강 개발을 성토하는 정치평론을 연달아 쓰고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선다고 하자. 그(녀)는 조중동의 십자포화와 (아파트를 보유한) 중산층의 비판을 온몸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 중간계급은 '교양있는 우리편'인 줄 알았던 사람이 '적'의 편에 서는 것을 가만 놓아두지 않는 법이다. 나르마다 강 개발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에, 아룬다티 로이는 대법원 판결까지 받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해설'에서 가디언 칼럼니스트 마들렌 번팅은 아룬다티 로이가 고립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삶을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비결을 들려준다.

그녀에게 행복이란, 법정 공술서 작성 때문에 몇주 동안이나 밤늦게까지 지낸 후에 시장에 나가서 유리구슬을 고르거나, 또는 델리의 여름날 천장에 선풍기가 달린 마룻바닥에 친구들과 함께 종일토록 누워있는 것이라고 로이는 말했다. 심지어 댐 건설 현장에서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이 쳐들어오는 동안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도 행복이라고 했다. 이런 것들이 그녀의 인생의 작은 기쁨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녀로 하여금 유성처럼 세계적인 명성까지 올랐다가 이제 법정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격동의 과정을 뚫게 가게 한 힘의 원천이다. (pp.186-187)

이런 소박한 행복은 모든 투쟁의 현장에 스며들어있지 않을까. 두리반에서, 기륭에서, 반G20 시위에서, 4대강 개발 반대 집회에서, 그리고, 그리고.

기고문과 연설문은 반세계화 운동(현재는 대안세계화 운동)의 프로파간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한 인상도 준다(기고 및 연설 시기가 비슷한 시기인 탓인지 동일한 수사가 반복해서 쓰인다). 그렇다고 해서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고 생태계 파괴에 경종을 울리는 목소리의 힘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녹색평론에서 이 책을 낸 배경에는 이라크 전쟁과 새만금 개발이 있을 것 같다. 원문은 짧게는 7년전, 길게는 11년전 글을 모은 것이고, 한글판이 나온 것도 7년 전 일이건만, 『9월이여, 오라』는 여전히 호소력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개발'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고, (르귄의 소설을 따라하자면) '빼앗긴 자들'과 (구하, 스피박 등을 연상하자면) '몫없는 자들''서발턴'이 자신의 땅과 숲에서 내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여기서 말이다.


추. 칼럼니스트 마들렌 번팅이 RSA에서 한 강연을 발견했다(RSA, <Place, Identity and Community : A history of the plot>). 내러티브의 현재적 의미를 짚는 내용 같은데, 시간있을 때 좀 자세히 들어봐야겠다. 그런데 내 영어 실력이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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