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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리오리엔트

by parallax view 2011. 1. 4.
예전에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에 이런 덧글이 달렸다(leopord,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저는 자본주의=유럽 혹은 자본주의=근대 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즉, 현대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본주의라는 것은 허구라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 역사만 보더라도 이미 가격의 변동에 의해 물품의 공급과 수요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물론 주류는 강제노역이었지만) 이미 노동시장이 있었고 일용직 노동자들과 고용하는 자들을 중개해주는 존재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즉,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베블런의 표현으로 말하자면)가격체계[자본주의]는 이미 근대 이전부터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죠." 

seomaan 님은 이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것이 현재와 다른 점은 정치체제의 성격에 따라 사회의 분화정도에 따라 얼마나 지배계층에서 그것(가격체제)을 억눌러 자신들의 이득을 챙겼느냐, 계층의 범위, 상품의 범위가 확대되었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나는 '시장경제=자본주의'라는 도식은 오류이고, 시장은 지역의 제도적 특징과 맞물려 조직되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로 seomaan 님은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에 입각했고, 나는 폴라니, 그 중에서도 『거대한 전환』의 폴라니를 염두에 두었다(leopord, <거대한 전환>). 이 차이는 『리오리엔트』를 읽는 동안에도 쉽게 메워지지 않았다.

『리오리엔트』(안드레 군더 프랑크, 이희재 옮김 / 이산, 2003)는 논문 「저발전의 발전」의 저자인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노작이다. 그는 종속 이론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제3세계 후진국들은 서구의 경제발전 경험을 순차적으로 이행할 때 성장할 수 있다는 근대화 이론에 반해, 종속 이론은 제3세계의 후진성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주변부에서 선진국들에게 수탈당한 결과라는 내용이 담겨 있어 1960-70년대에 논란을 일으켰다. 제3세계 발전을 둘러싼 논쟁은 한국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으로 이어진다. 종속 이론은 식민지 반(反)자본주의론(및 그 전 단계인 식민지 반봉건론)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의 이론적 원형으로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종속 이론은 이론의 현실성 여부를 떠나, 좌파 진영의 제3세계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프랑크는 이 이론의 주요 논객으로 활약했을 듯한데, 그가 책 속에서 과거의 동료들을 하나하나 베어내는 걸 보면 한참 예리하던 시절에는 더했으면 더했지, 덜할 것 같지 않다. 종속 이론에서 도출된 단서를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대한 이해로 확장하려는 시도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1974)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주변부 관계를 통시적으로 파악해 보려는 기획으로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1967), 재닛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 - 13세기 세계체제』(1989) 등의 역작들이 나왔다. 걸출한 학자들의 세계체제 담론은 현재의 지구화를 재구성하는 데 여전히 참고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프랑크의 놀라운 점은 자신이 딛고 있던 이론적 틀을 가차없이 깨부수려고 한다는 데 있다. 그것도 69세라는 노령(『리오리엔트』는 1998년에 출간)에 그런 작업을 수행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이론을 고집하기 쉽고, 이론의 약점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수정하면 도리어 "관용적이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한데 말이다. 김우재는 언젠가 '좌빨'이 읽어야 할 추천 도서 중 하나로 이 책을 꼽았는데, 프랑크의 급진적인 태도에도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김우재, <좌빨 과학 블로거가 추천하는 세 권의 책>). 프랑크가 세계경제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강조하는 것은 그의 '문화혁명' 스타일과 거리가 멀겠지만, 같이 엮어 생각해 보면 또 재밌는 일이다. 노구에도 언제나 자기를 파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늘 혁명적이려는 한 학자에게 먼저 경의를 보낸다.

앞서 말했듯이 프랑크는 자신의 동료들-월러스틴, 브로델, 아부-루고드 등-뿐만 아니라 이들과 같은 입장에 서 있던 과거의 자신, 더 나아가 주요 이론의 선구자들인 맑스와 베버, 폴라니 등에게도 비판의 칼날을 겨눈다. 왜 그는 이전까지 세계체제론이라는 이론 틀 안에서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의 뒤통수를 후려갈겼을까? 프랑크는 그 이유로 유럽중심주의(예외주의)를 든다. 자본주의는 유럽에서 태동했고 현재의 생산·무역·금융체제는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발상은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입장이든 부정하는 입장이든 동일하고, 이는 유럽의 특수성과 우월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대신 그가 주장하는 바는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로서의 세계 경제사이다. 그리고 거시사의 중심(이란 게 있다면)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라는 것이 핵심이다.

"세계경제구조에서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렸던 지역은 아메리카·일본·아프리카·유럽이다. 아메리카와 일본은 자체 생산한 은을 수출하여 적자를 메울 수 있었다. 아프리카는 금과 노예를 수출했다. (…) 하지만 유럽은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메울 수 있는 마땅한 상품을 생산하지 못했다. (…) 세계경제의 양대 '중심' 지역을 꼽자면 중국과 인도였다. 양국이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압도적 우위에 있던 제조업의 생산력 덕분이다. 인도산 면직물은 세계시장을 지배했고 인도산 견직물, 특히 인도 최대의 산업지역인 벵골의 견직물도 수요가 빗발쳤다." (p.227-228)

그의 주장은 로버트 B. 마크스의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에서 요약된다(leopord,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하지만 인도양 무역의 평화로움을 강조하는 마크스와는 달리, 프랑크가 바라보는 전근대 아시아(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근대'라는 표현도 기만이겠지만)는 유럽이나 다른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윤을 위해 움직이는 시공간이다(프랑크는 중국사 연구자인 마크스 역시 자주 인용하는데, 『다시쓰는 근대세계사 이야기』 역자는 마크스Marks를 '마르크스'로 번역했다. '마르크스'는 출판사의 상술인 듯하다). 또, 프랑크는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아시아의 전세 역전을 역사적 우연으로 보는 마크스와 견해를 달리한다. 

프랑크는 1400~1800년의 세계경제/체제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1800년 이전까지 생산·무역·금융 및 기술적 진보의 중심은 아시아(중국, 인도, 페르시아, 오스만 튀르크 등)였지, 유럽이 아니었다. 유럽이 성장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은(銀) 뿐이었다. 아시아는, 특히 중국은 당시 '세계의 화폐'였던 은의 배수구로서 존재했다(여기서 서양의 은본위제silver standard가 중국 조공무역체제의 은본위제에 기반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러나 프랑크는 마찬가지로 중국을 은의 배수구로 보았던 다른 학자와 차별성을 보인다. 중국이 은을 무의미하게 비축하기만 했다는 테제를 공격하면서 은이 제국의 경제력을 유지시키는 혈액으로 기능했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렇다. 그가 생각하기에 은은 유럽이 아시아 경제라는 열차에 올라탈 수 있게 해준 차표에 다름 아니다.

블로트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는 나의 논지는 결국 서양은 아시아 경제라고 하는 열차의 3등칸에 달랑 표 한 장을 끊어 올라탔다가 얼마 뒤 객차를 통째로 빌리더니 19세기에 들어서는 아시아인을 열차에서 몰아내고 주인 행세를 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p.106)

그는 이어서 '동양의 쇠락'과 '서양의 발흥'을 콘드라티예프 B국면(침체기)이라는 거시경제적 변화에 대한 동서양의 미시경제적 반응의 결과로 본다. 즉, 동아시아는 높은 농업·공업생산력을 토대로 높은 인구/토지비율을 보유했기 때문에 저임금에 기반한 노동집약적 생산방식을 고수하다 '고차적인 균형의 함정'에 빠진 반면, 서양은 생산성이 낮고 인구/토지비율도 낮아 임금이 높기 때문에 노동절약적 생산방식을 개발해야 할 유인이 컸고 그 결과가 산업혁명과 이후의 팽창이라는 것이다(그는 동양의 쇠락이 서양의 발흥에 선행했다는 걸 강조한다). 그래서 프랑크는 머지않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예전의 저력을 되찾아 세계경제/체제의 중심으로 부활할 것을 예측한다.

그런데 세계 경제를 구조와 기능으로 분석하는 프랑크의 방법론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극단적인 경제결정론으로 귀결될 위험이다. 그는 맑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봉건제' 담론이 아시아에 대한 무지와 유럽예외주의적인 오만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하지만 세계 경제에 대한 구조기능주의적 접근은 아프로-유라시아(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를 포괄하는 지역 개념)의 경제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패턴으로서의 경제'라는 부분을 무시해버린다. 단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무역체제가 번성한 토대에는 단순히 중국의 우월한 생산력만 있지 않다. 중화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관에 대한 주변 세력의 지적·도덕적·정치적 합의가 존재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즉, 프랑크는 맑스의 아시아관을 역전시키려는 나머지, 상부구조에 대한 물적 토대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입장에 섰다는 것이다(덧붙여 은에 기반한 세계 금융체제의 존재에 대한 분석은 금본위제에 대한 폴라니의 분석과 일맥상통한다. 즉, 자기조정시장의 불안정성 문제가 반복되는 것이다. 한편, 물적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상호침투에 대해서는 그람시의 관점이 더 도움될 듯하다).

둘째, 유럽중심주의에서 빠져나와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를 밝히려는 이런 시도는 역설적으로 아프로-유라시아의 시장 패턴을 과대평가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물론 인구학적으로 아시아, 특히 인도와 중국의 비중은 막대하고 이 지역에서 발생한 생산·무역·금융체제의 영향력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1492년 이전 아메리카의 시장 패턴에 대한 분석이 함께 이뤄져야 비로소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프랑크는 폴라니가 고대 제국의 무역과 시장의 부재를 주장했다며 비판하지만, 그 지적이 옳다고 해도 폴라니가 기반했던 인류학적 전제 자체가 반증되지는 않는다(김우재는 『리오리엔트』를 '좌파의 역사경제인류학'이라고 소개하지만, 잘못 파악했다. 이 책은 경제사 책이지, 경제인류학 책은 아니다). 또, 『전지구적 변환』(1999)에서도 지적되듯이, 19세기 이전의 무역은 지금의 무역에 비해 지구화의 범위와 강도 등이 약하다. 즉, 지구화의 밀도는 선형적이라는 관점인데, 프랑크는 지구화의 밀도가 그때나 지금이나 균일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셋째, 프랑크 본인도 비판하는 바이지만, 그 역시 세계무역체제(역사)를 다루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역'과 '국가'를, 더 나아가 고대·중세의 국가와 국민국가를 혼동하고 있다. 마치 명·청대의 중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을 동일시하는 듯한 서술이 그렇다. 이는 경제사적 연속성과 경제 파동의 순환성을 거시사의 전제 조건으로 삼은 데 따른 결과인 듯하다. 하지만 한국사만 보더라도 분단과 전쟁 후의 남한 경제체제를 조선 후기의 선대제 생산방식과 은의 광범한 유통(조공무역체제에서 은의 중요성은 인조 시절의 관리들에게 은을 요구했다는 명의 관리에 대한 기록 등에서 추론가능하다)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기는 힘들지 않은가. 거시적으로 보면 모든 사건은 연속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거시적으로 보아야 할까? 

넷째, 또 다시 문제는 '생산양식'이다. 프랑크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출현을 (1492년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기점으로 하는) 기존의 500년에서 5000년 전의 청동기 시대까지 소급한 것은 흥미진진한 도전이지만, 학문적으로 얼마만큼 정밀한가 라는 문제를 낳는 듯싶다(이 부분은 그에 대한 책을 따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자본주의가 언제 도래했나를 정확하게 짚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프랑크식의 접근은 "자본주의는 없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지 않나. 다음 서술은 이런 의문을 더욱 증폭시킨다.

"다시 말해 모든 논자들이 집착하는 협소한 유럽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분석의 단위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점을 깨닫는 순간 '생산양식'에 관한 모든 논의는 하잘것없어 보이게 마련이며 그야말로 하나마나 한 소리가 되어 버린다. 중요한 것은 전체에 대한 전체론적 분석인데 논자들은 이것을 한사코 회피하려고 들기 때문에 '생산양식' 논쟁은 현실 앞에서 우리를 눈멀게 만든다." (p.510)

'다양성 속의 통일성'을 세계 이해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하는 문제의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프랑크는 유럽중심주의(예외주의)에 대한 비판에 골몰한 나머지, 유럽중심주의와 얽히기는 하지만 따로 떼어볼 수 있는 부분들까지 싸잡아 비판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역사상 단절을 보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프랑크 말대로 자본주의가 문제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대체 무엇인가? 그는 단지 '세계경제/체제'일뿐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런 말은 자본주의 안에서 발생하는 권력관계를 회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각 지역의 불균등한 생산성과 그에 동반하는 정치적·문화적 위계를 그대로 정당화할 위험 또한 존재한다. 중국의 발흥은 현대 민주주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나도 비서구 사회를 야만과 반(反)민주의 시공간으로 파악하는 관점에 비판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프랑크식의 주장은 자칫하면 특정 지역의 사상적 발전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거나("동아시아에서는 민주주의 없이도 민주적 가치 실현이 가능했다."), 또 다른 중심주의로 기능할 가능성("만약 중국이 세계를 지배한다면?" 같은 의문)이 너무 높다. 덧붙여, 역사란 언제나 상상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있는 그대로의 역사'(랑케)를 주장하는 그는 너무 고루해 보인다.

이 몇 가지 지적은 프랑크 본인도 예상하고 있는 바로서 책 서론에 길게 적어놓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적 토대를 방어하기보다 상대방의 굳건한 토대를 공격하는 데 더 능한 공격수인 듯하다. 그 점이 프랑크의 강점이자 한계다. 한편, 동아시아의 '우월했던 과거'와 근대 서양 문물의 세례 사이에서 '겉과 속이 다른 인종'으로 성장한 현대 한국인에게 있어 프랑크가 던진 문제제기는 분명 생각해 볼만하다. 지구정치경제(체제)라는 관점에서 '횡으로 통합된 거시사'에 대한 보다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경도되기 쉬운 동아시아에서는 특히.



추. 장황하게 쓰긴 했지만, 이 책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 대한 현대적인 주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국부론』 인용문 읽으면서 스미스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경제(체제)를 통찰한 부분이 새삼 떠올라 섬찟섬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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