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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지식

by parallax view 2010. 12. 23.
『개인적 지식』(마이클 폴라니, 표재명·김봉미 옮김 / 아카넷, 2001)은 물리화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마이클 폴라니의 저작이다. 이전에 <폴라니 패밀리>에서 폴라니 집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마이클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을 쓴 칼 폴라니의 동생이다(leopord, <거대한 전환>). 그러나 형의 후광에 가려져 있다거나 하지는 않다. 반대로 마이클이 형보다 더 알려져 있지 않나 싶다. 왜냐하면 『거대한 전환』이 나오기 전까지, 아니 그 후에도 칼 폴라니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반면, 마이클 폴라니는 과학철학에서 상당히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정치적 행보도 무척이나 다르다. 두 사람 모두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지만, 칼 폴라니가 사회주의적 입장을 꾸준히 견지하는 것과 반대로, 마이클은 하이에크, 폰 미제스 등과 함께 자유주의자 그룹에 속했다(칼 폴라니는 하이에크 등과 지적으로 대결했다).

『개인적 지식』을 집어든 이유는 순전히 칼 폴라니의 동생이 어떤 사상을 갖고 있나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의 근원을 저자의 활동, 생애나 인간 관계 등에서 추론하는 전기적(傳記的) 접근은 지적인 흥미를 불러올 수는 있지만, 그 자체만을 도구로 쓸 수 없는 노릇이다. 과학철학이라는 생소한 분야에 발을 담근 탓인지 읽는 동안 꽤 고생했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틈틈이 출퇴근시간을 이용해 읽었지만, 내 지적 게으름을 탓할 밖에. 깊이 있는 책이 으레 그렇듯, 요지는 간단하지만 결론에 이르기까지 숲속에서 접하는 나무들이 무척이나 빽빽하다. '창조적 오독'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서평 또한 그다지 창조적이지 않은 오독에 불과할 것이다.

마이클 폴라니는 묻는다. "과학자란 무엇인가?" 대학 강의록을 엮은 이 책은 과학자의 정체성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여전히 과학은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지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실험을 통해 검증 혹은 반증됨으로써 진리임이 명확해지는 것. 객관적인 그 무엇. 주관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 과학에 대한 이런 인식은 단순히 대중적인 것이 아니며, 과학자 사회에서도 공리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이런 객관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인 견해는 영·미의 논리실증주의에서 도드라진다. 마이클 폴라니는 과학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는 논리실증주의적 신념을 부정한다(재밌는 점은 논리실증주의의 모태가 오스트리아의 빈이라는 것이다. 넓게 보면 비엔나 학파와 연관된 마이클 폴라니가 자유주의자이면서도 논리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자라는 점에서, 비엔나 학파 안의 좌파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는 객관주의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확신 안에서만 우리의 궁극적 확신을 표명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 나는 나의 사고와 실천행위에 포함된 신념을 내가 타당하다고 믿는 만큼 그것을 밝게 하고, 그것을 나 자신의 것으로 확신하는 데에 철학적 반성의 기능이 있다고 믿는다. (…) 기본 신념에 대해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설명한 사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Confessions』이다. (…) 그는 당신이 거기에 이르는 전제 조건에서 그 과정을 해석함으로써 오류를 노정할 수 없고, 참이라고 믿는 전제 조건에서 그 과정을 해석함으로써 오류를 드러낼 수 있다고 인정하는 듯이 보인다. 그의 준칙인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 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itis>는 이러한 논리적 요구조건을 나타내준다. (p.408-409)

"믿지 않는다면 이해할 수도 없다." 과학자가 신학을 언급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마이클 폴라니는 신념을 비(非)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반(反)이성적인 것으로 격하시킨 근대 과학주의와 회의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과학은 신념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언명에 대한 논리학적 분석에서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p는 참이다>라는 문장이 나의 주장 또는 문장 p의 재주장을 나타낸다면, <p는 참이다>라는 사실문장이 사실문장일 수 있는 의미에서 참이나 거짓이라고 말할 수 없다. <p는 참이다>는 나 스스로 사실 문장 p의 내용에 공명함을 말하며, 이런 동일화는 내가 하고 있는 무엇이지 관찰하는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p는 참이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문장이 아니라 단순히 문장의 주장(그렇지 않은 경우 주장되지 않은), 즉 문장 p이다. (p.389-390)

사실이 과학자가 무언가를 사실로서 믿는 과정이자 결과일 뿐이라면 이는 주관성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주관적인 지식을 과연 '지식'이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연금술도 수비학(數秘學)도 모두 '지식'이고 '과학'이지 않은가? 이 의문에 답해 마이클 폴라니가 제시하는 바는 두 가지다. 암묵지tacit knowledge와 관여commitment가 그렇다.

춤을 예로 들어보자. 당신과 내가 탱고를 춘다고 가정하자(나는 탱고를 춰 본 적은 없지만, 다른 경험을 외삽함으로써 표현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또, 탱고는 성 역할이 분명한 게임이나 여기서는 이를 생략한다). 우리는 탱고를 배운 사람으로서 탱고의 규칙에 맞게 스텝을 밟고 동작을 취한다. 또, 우리는 이런 동작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작에 대한 설명이 동작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동작을 취하는 것은 우리, 개별적으로는 당신과 나 각자의 신경과 근육의 몫이기 때문이다. 탱고의 규칙은 행위의 준칙이다. 하지만 이 준칙을 실현하는 것은 우리의 몸이다. 역설적인 것은 우리의 몸에 새겨진 기술을 일일히 설명하려 들수록 기술의 정수(즉, 탱고를 추는 우리 두 사람의 멋들어진 몸짓과 섬세한 기교)는 멀어진다는 점이다. 마이클 폴라니는 이를 '상술 불가능한 것', '비(比)분절적인 것'이라고 지칭한다. 이런 상술 불가능한 지식을 암묵지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학자에게 있어, (비록 마이클 폴라니는 '노동자'를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또 노동자에게 있어 암묵지는 활동의 전제이다. 만약 이 암묵지가 단순히 자폐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굳이 마이클 폴라니가 '개인'과 '지식'이라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두 개념을 엮을 이유가 없다. 여기서 인간과 세계를 연결하는 개념이 관여다. 역자는 commitment를 '관여'로 번역했는데, 나는 commitment가 '내지르기'에 더 가까운 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inuit, <전략의 탄생>). 과학자가 외부 현상과 맺는 관계를 우리말 한자어의 '관여'나 '개입' 등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마이클 폴라니는 commitment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과학자가 세계와 얽히는 과정을 통해 '개인적인' 지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내적 주관성과 외적 객관성을 잇는 다리로서 말이다. 

다시 과학자의 '믿음'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과학자가 지식을 추구하는 한 개인으로 존재한다면, 그가 보유한 지식은 어떻게 생장하고 보증받을 수 있을까? 여기서 마이클 폴라니는 보수적이고 점진주의적인 접근을 선호한다. 즉, 과학자들이 따를 수 있는 지적 전통과 권위가 존재하고, 이들 위에서 과학은 축적되며 전수된다는 것이다(아카데미아와 랩은 현대의 길드 아닌가!). 이를 보장하는 것이 '자유 사회'다. 마이클 폴라니는 자유 사회를 파괴하는 세력으로 파시즘과 맑스-레닌주의를 동시에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점진주의적 사고방식이 과학사에서 반드시 유효했는지 의문이 든다. 여기서 또 쿤의 '패러다임 시프트' 얘기하느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마이클 폴라니의 개념 안에서는 패러다임 시프트조차 포용할 여지가 있는데, 왜냐하면 나 또한 모든 앎은 '거인의 어깨' 위에서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마이클 폴라니는 단절과 도약의 순간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단초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17-18세기 동안 영국의 공적 생활은 정치적 기예와 정치적 독트린을 발전시켰다. 공적 자유의 시행을 포함한 그 기예는 당연히 상술할 수 없고, 정치적 자유의 독트린은 기예에 숙련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는 기예의 준칙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라는 독트린은 18세기에 영국에서 프랑스로, 마침내는 전세계로 퍼졌다. 반면 실천되는 공적 자유의 그 상술 불가능한 기예는 오직 전통에 의해서만 교통될 수 있으므로 그 독트린과 함께 전파되지 못했다. 프랑스 혁명이 이 독트린에 따라 일어났을 때, 그 독트린은 실제로 그 적용지식이 없으면 무의미했다. 그리고 버크Edmund Burke는 자유로운 사회라는 전통주의자의 개념에 따라 그것에 반대했던 것이다. (p.94)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 그러나 탱자가 귤이 아니라고 해서 '나쁜 것'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영국의 정치적 '전통'이 정치적 '자유'에 얼마나 가까웠을까? 반대로 이를 인정한다면, 프랑스 혁명의 정치적 기예와 독트린 또한 상술 불가능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을까? 

또 다시 돌아가자. 믿음을 보증하는 것은 과학자 자신의 신념과 이를 지지해주는 사회다. 마이클 폴라니는 과학자가 신념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그의 소명에서 찾는다.

우리가 작용하는 개념적 구조틀이 국부적 문화로부터 빌려온 것이며, 우리의 동기가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는 힘과 혼합되어 있다고 한다면, 보편적 의도를 가진 책임 있는 판단에 도달한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을까? 비판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실은 우리의 모든 확신을 특정 위치와 관심의 단순한 산물로 격감시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중한 지적 관여의 정당화를 믿기 때문에, 나는 개인 존재의 우연성을 우리의 개인적 책임감의 실행에 대한 구체적 기회로서 받아들인다. 이런 수용이 내 소명의 의미이다.(굵은 표시는 본문) (p.490)

우리가 충분한 지적 능력을 되찾는 단계는 기독교의 타락과 구원Fall and Redemption에서 빌려온다. 타락한 인간은 역사적으로 주어진, 그리고 주관적인 인간 정신의 조건과 동일하다. 그 조건에서 우리는 영혼의 은총으로 구원될 수도 있다. 성취 불가능한 반성에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기술은 우리가 용인하는 의무의 수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인된 불확정성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것을 보유할 과제를 갖고 있다. 그런 불확정성은 그 과제를 희망 없게 만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상술 가능한 능력에 의거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을 만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p.493)

과학자에게 믿음이란 무엇일까. 마이클 폴라니는 과학이란 진리를 '믿는' 과정에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가 종교를 방어하는 챕터에서는 폴라니 집안의 칼뱅주의적 성향을 추측할 수 있다. 이는 '소명'이라는 개념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러나 다른 여러 파트-언어학, 심리학, 수학 등과 과학사 전반-와 마찬가지로 나의 앎이 부족해 단정짓지는 못하겠다. 다만, 마이클 폴라니가 과학자로서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관여와 소명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한나 아렌트와 접점이 보인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 행위의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대해서는 '용서'를, 행위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는 '약속'을 제시함으로써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보완하는가 설명한 바 있다(아렌트는 『개인적 지식』의 전체주의 비판 부분에서 잠깐 언급된다. 아렌트 책에 대한 서평 : leopord, 『인간의 조건』). 

이 리뷰는 마이클 폴라니의 핵심 개념만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자 한계이다. 정작 중요한 부분은 여기서 '상술 불가능한 것'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과학은 지식의 분절적인 부분, 특히 언어를 통해 전수되고 분석된다. 마이클 폴라니의 강점은 기표나 기의 등을 말하지 않고서도 과학(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모두)을 철학의 대상이자 과정으로 삼을 수 있다는 데 있다고 본다. 즉, 분절된 지식이 상술 불가능한 부분에 의존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주관주의적 망상도, 객관주의적 환상도 모두 피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개인적 지식』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첫째, 암묵지라는 블랙박스의 존재를 '믿는다'는 행위의 주관성을 '사회'와의 관계를 통해 얼마만큼 극복할 수 있을까? 둘째, 과학자 사회라는 '그룹'은 대중을 지도하는 지식인 집단으로서 존재한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이클 폴라니의 시도는 과학자 사회와 대중에 대한 '지적·도덕적 지도'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신뢰를 전적으로 그룹 자체에만 맡길 수 있는가?(이런 '민중주의적' 의문이 구현된 경우가 이른바 '과학사회학'이며, 역전된 경우는 바로 '황우석 사태' 아닐까?) 셋째, 물리학과 화학이 기술공학의 목적론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은 지식에 대한 인간의 탐구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마이클 폴라니의 주장이다. 반대로 현대의 인지신경과학과 진화심리학은 생리학과 신(新)다윈주의(이는 마이클 폴라니의 표현이다)를 통해 '상술 불가능한 것'을 파헤칠 수 있다는 믿음의 재생산인 것 같다. 『개인적 지식』은 이들 신생 분과의 도전에 얼마나 답할 수 있을까?(이는 앨런 튜링과 신다윈주의 비판에서 어느 정도 설명된 것 같다)

마이클 폴라니는 인간이 분절화된 영역인 언어를 보유함으로써 가장 고등한 생명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정신을 존재의 종착역으로 보는 목적론은 유기체의 형태발생학을 통해 강화된다. 개체발생학적인 생물학에서 초생물학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인간 정신의 창발성이 생명체에 내재해 있다는 신념을 전개한다. 여기서 그가 섣불리 '신의 섭리' 따위를 얘기했다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소명을 가진 과학자 집단이 지적 전통을 통해 분절화된 지식과 비분절화된 지식(암묵지)을 동시에 전수하는 과정을 믿는다는 이야기다. 그는 과학자의 지적 열정을 전적으로 신뢰한다. 앎에 대한 사랑. 그것이 바로 philosophy이며, 과학 또한 philosophy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이 점에서 왜 어떤 과학자가 과학과 철학을 구분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해 격하게 반발하는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은 본문에 인용된 케플러의 글이다. (저마다 케플러의 격정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할지라도) 새로운 발견에 대한 과학자의 열망이야말로 진정 '개인적'인 것이다.

내가 22년 전에 하늘의 궤도 중 다섯 개의 천체를 발견하자마자 예언했던 것, 내가 프톨레마이오스의 화성학을 보기 훨씬 전에 확고하게 믿었던 것. 천문학적 사색에 내 인생의 대부분을 바치게 하고 브라헤Tycho Brache와 함께 하는 목적이었고 16년 전 내가 찾으려 애썼던 나의 발견을 확신하기 이전에, 내가 이름 붙인 이 책 다섯 권의 제목으로 나의 동료에게 약속했던 것. …이것을 나는 드디어 밝혔고, 나의 모든 희망을 넘어 그것이 진리임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이제 18개월 전부터의 새벽이, 석 달 전부터의 낮의 완전한 밝음이, 그리고 바로 며칠 전의 참으로 감탄할 만한 관조의 그 순수한 태양 자체가 빛을 발했다ㅡ어떤 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나는 나의 신성한 격정을 즐길 것이다. (p.27)

마이클 폴라니가 과학철학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과학사회학자들의 섣부른 공격(나는 과학자들의 항변-과학에 대한 이해 없는 과학사회학자들의 문제-에 동의한다)에 대해 과학자 자신의 반박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는 점에 있지 않나 싶다. 나에겐 『개인적 지식』이 과학사와 과학철학에 대한 입문서인 셈이었다. 신고식은 호되게 치렀고, 감히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저 책에 숨은 결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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