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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문고 서평

by parallax view 2010. 5. 19.
홍기빈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홍기빈 / 책세상, 2001)는 현대 자본주의의 경제 이데올로기를 뒤집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기빈은 시장과 화폐가 역사의 발전 도상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했다는 통념이 어째서 허구인가를 보여 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5장과 <정치학> 제1장을 적절한 입담을 붙여 친절하게 풀어썼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군인soldier의 어원이 화폐를 뜻하는 라틴어 solidus에서 왔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시장과 화폐는 전쟁과 뗄 수 없는 것이었다(약 천 년 뒤 서유럽에서 채권이 최초로 발행된 이유는 전쟁자금 조달에 있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전쟁을 통해 팽창한 아테네는 특히 많은 군인이 필요했고, 그 수를 빈민 계급에게서 충당했다. 폴리스는 가정경제oikonomi를 꾸릴 수 없는 빈민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생계 수단으로 화폐를 지급한다. 그리고 그 화폐를 통해 생필품을 자율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에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아테네 민주주의는 제국주의적 팽창과 궤를 같이 했고, 시장과 함께 성장했다.

이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다. 이들은 가정경제를 꾸리는 폴리스 구성원들이 선물을 통해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맺어 공동체를 유지하던 과거로 돌아가길 요구한다. 시장이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던embedded 과거와 달리, 지나치게 팽창한 시장 경제가 폴리스 전체를 파괴할 위험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 위협이 단지 2천 년 전의 지나간 역사에 불과할까? 그런 점에서 맑스와 베블런,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이다. 책은 폴라니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의 연장선에서, 같은 저자의 경제인류학적 관점을 그대로 견지한다(leopord,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나중에 나온 청소년용 경제 교양서인 <소유는 춤춘다>의 예비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무엇보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서 뻗어 나온 줄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 사회주의 정치인 장 조레스의 연설과 기고문을 모은 <사회주의와 자유 외>(장 조레스, 노서경 옮김 / 책세상, 2008)는 사회주의와 현실 정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듯해 집어 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암살로 시작한다. 1914년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당한다. 같은 해 7월 31일, 또 다른 암살 사건이 있었다. 노동 계급의 힘으로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자부한 이상주의자는 극우 민족주의자의 총탄에 살해당한다. 조레스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조레스는 공화파 출신 사회주의자라는 독특한 입지에서 정치 경력을 시작한다. 맑스주의와 공화주의, 개혁주의와 혁명주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결합시키고자 하는 그의 시도는 흥미로운 한편, 지나치게 모호하지 않았나 싶다. 글 모음집에는 식민지 문제에 대한 조레스의 입장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애국주의 경향에 대한 의구심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프랑스 혁명 전통에 대한 강인한 믿음이 연설과 기고문 곳곳에서 약동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한복판에서 졸라Émile Zola와 함께 드레퓌스를 옹호한 경력 또한 특이하다. 프랑스 사회주의 역사는 몹시 복잡하고 중층적인데, 이에 대한 글쓴이의 주석이 많은 도움이 된다. 어째서 미국 혁명은 성공했는데도 그 정신이 쇠퇴하고, 프랑스 혁명은 실패했는데도 혁명 정신은 꾸준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조레스를 통해 어느 정도 개관할 수 있을 게다(leopord, <혁명론>. 이 서평은 프랑스 혁명 전통을 과소평가한 감이 있다.). 책에서 드러나는 조레스는 ‘기도하는 혁명가’이다(leopord, <김규항의 북세미나 :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무엇보다 그의 삶은 희망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바로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이다(leopord, <인간의 조건>). 대놓고 '사회주의 정치인'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한, 한국 진보정당은 계속 자유주의자와 보수에 끌려 다닐 것이다. 문제는 당내 의견조율이나 운동권의 경직성이 아니다. 5+4가 보여주듯, 이제는 선명해야한다.

<산책 외>
(헨리 데이비드 소로, 김완구 옮김 / 책세상, 2009)는 <월든>으로 잘 알려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에세이 모음집이다. 평소 길을 즐겨 걷는다. 그러나 소로처럼 느리게 한 걸음씩 주위를 관찰하면서 신중하게 걸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걷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고 몸이 반응하는 데 따라가는 정도였다. 소로가 묘사하는 풍경 속에서, 나는 그의 곁을 따라 걷는다. 조금 쌀쌀한 공기. 콩코드의 오솔길이 내 눈앞에 나 있고 그 너머로 해가 진다. 길의 끄트머리는 신화의 세계. 소로는 소요(逍遙, sauntering)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으로서 끈기 있게 자신의 시공간에 스며든다. 자연 속에서 그는 자유롭다. 세 개의 에세이 중 ‘산책’과 ‘야생 사과’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었다. ‘겨울 산책’은 스스로 너무 산만하게 본 듯해 아쉽다. 그의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를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말 못하겠다. 그럼에도 행간 곳곳에서 빛나는 서정이 어떻게 그의 시민 불복종과 연결되는지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모든 키 작은 야생 사과는 길들지 않은 모든 어린이들이 그렇듯이 우리에게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그것은 변장을 한 왕자일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인간에게 교훈이 되는가! 인간들도 마찬가지인데, 인간들이 가장 높은 기준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들이 거룩한 열매를 맺고자 암시하고 열망하더라도 그 열매는 운명에 의해 그렇게 어린잎을 뜯어 먹히게 되는 것이다. 가장 끈덕지고 강한 천재만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극복하여 마침내 유약한 어린 가지 하나를 위를 향해 올려 보낸다. 그러고는 그 가지가 맺은 완벽한 열매를 은혜도 모르는 이 세상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시인과 철학자, 정치가들은 야생 사과나무처럼 이런 식으로 시골 목초지에서 싹이 터서 독창적이지 못한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오래 지속되게 되는 것이다. (pp.123-124)

이러한 사과는 바람과 서리와 비를 견디면서 날씨나 계절의 특성을 흡수했기 때문에 그것에 고도로 단련된다. 그렇게 단련된 성질은 우리를 꿰찌르고 스며들어 자신들의 기운으로 충만케 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제철에, 말하자면 집 밖에서 먹어야 하는 것이다. (p.129)

야생 사과처럼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