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들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다. 이들은 가정경제를 꾸리는 폴리스 구성원들이 선물을 통해 상호 호혜적인 관계를 맺어 공동체를 유지하던 과거로 돌아가길 요구한다. 시장이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던embedded 과거와 달리, 지나치게 팽창한 시장 경제가 폴리스 전체를 파괴할 위험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이 위협이 단지 2천 년 전의 지나간 역사에 불과할까? 그런 점에서 맑스와 베블런, 폴라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들이다. 책은 폴라니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의 연장선에서, 같은 저자의 경제인류학적 관점을 그대로 견지한다(leopord,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나중에 나온 청소년용 경제 교양서인 <소유는 춤춘다>의 예비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무엇보다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에서 뻗어 나온 줄기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프랑스 혁명 전통에 대한 강인한 믿음이 연설과 기고문 곳곳에서 약동하고 있는 게 인상적이다. 드레퓌스 사건의 한복판에서 졸라Émile Zola와 함께 드레퓌스를 옹호한 경력 또한 특이하다. 프랑스 사회주의 역사는 몹시 복잡하고 중층적인데, 이에 대한 글쓴이의 주석이 많은 도움이 된다. 어째서 미국 혁명은 성공했는데도 그 정신이 쇠퇴하고, 프랑스 혁명은 실패했는데도 혁명 정신은 꾸준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조레스를 통해 어느 정도 개관할 수 있을 게다(leopord, <혁명론>. 이 서평은 프랑스 혁명 전통을 과소평가한 감이 있다.). 책에서 드러나는 조레스는 ‘기도하는 혁명가’이다(leopord, <김규항의 북세미나 :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무엇보다 그의 삶은 희망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에서 ‘지금 여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바로 행동하는 삶Vita Activa이다(leopord, <인간의 조건>). 대놓고 '사회주의 정치인'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한, 한국 진보정당은 계속 자유주의자와 보수에 끌려 다닐 것이다. 문제는 당내 의견조율이나 운동권의 경직성이 아니다. 5+4가 보여주듯, 이제는 선명해야한다.
그래서 모든 키 작은 야생 사과는 길들지 않은 모든 어린이들이 그렇듯이 우리에게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그것은 변장을 한 왕자일지도 모른다. 이 얼마나 인간에게 교훈이 되는가! 인간들도 마찬가지인데, 인간들이 가장 높은 기준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그들이 거룩한 열매를 맺고자 암시하고 열망하더라도 그 열매는 운명에 의해 그렇게 어린잎을 뜯어 먹히게 되는 것이다. 가장 끈덕지고 강한 천재만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극복하여 마침내 유약한 어린 가지 하나를 위를 향해 올려 보낸다. 그러고는 그 가지가 맺은 완벽한 열매를 은혜도 모르는 이 세상에 떨어뜨리는 것이다. 시인과 철학자, 정치가들은 야생 사과나무처럼 이런 식으로 시골 목초지에서 싹이 터서 독창적이지 못한 다른 많은 사람들보다 오래 지속되게 되는 것이다. (pp.123-124)
이러한 사과는 바람과 서리와 비를 견디면서 날씨나 계절의 특성을 흡수했기 때문에 그것에 고도로 단련된다. 그렇게 단련된 성질은 우리를 꿰찌르고 스며들어 자신들의 기운으로 충만케 한다. 따라서 그것들은 제철에, 말하자면 집 밖에서 먹어야 하는 것이다. (p.129)
야생 사과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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