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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폴라니 패밀리

by parallax view 2010. 11. 19.
40분쯤 더 기다리자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 노랫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흐릿하게 들리다가 점점 더 커졌다. 마치 누군가가 "펑위샹", "장쭤린", "장제스", "마오쩌둥"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목청껏 외쳐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무척 덩치가 큰 사람이 불쑥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양손에 작은 여행용 가방 같은 것을 들고 있었으며 아직도 그 이상한 소리를 외쳐대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소리를 멈추고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인사한 다음, 의자가 부서지지 않을까 싶게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장제스" 등을 외치고 있었다.

그가 가방 하나를 열자 엄청난 양의 책이며 서류, 잡지, 편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커다란 목소리로 어찌나 빠르게 말을 뱉어내는지 마치 화산에서 돌멩이들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신년특집호에는 네 가지 톱기사를 싣죠. 하나는 중국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장쭤린과 장제스, 그리고 다른 군 지도자들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다시 내뱉었다. "향후 5년여 동안 가장 중요한 사건은 중국의 내전입니다. 또 세계시장에서 농산물가격이 폭락한 것에 관한 기사를 실어보죠. 이는 앞으로 여러 해 동안 심각한 경제불황이 있을 것을 암시하죠. 세 번째 기사로는 러시아의 스탈린을 다뤄보는 게 어떨까요? 레닌주의는 쇠퇴했고 공산혁명도 그와 함께 퇴락했어요. 새로운 형태의 동양적 전제정치와 함께 농노가 다시 생겨나고 있고요. 마지막으로 영국의 경제학자인 케인스에 관한 겁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종전으로 인해 1919~1920년 경제에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지에 대해 쓴 사람이죠. 전통적인 경제학을 뒤바꿀 새롭고 흥미로운 이론들을 내놓고 있어요." 그가 다른 트렁크를 열자 또 책과 팸플릿, 서류 등이 쏟아져 나왔다.

(…) 다행히 편집자들이 언쟁하고 있을 때 나는 폴라니의 제안에 견줄 수 있는 더 얼토당토않은 주제가 무엇일까를 자문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국가사회당이 독일 정권을 장악하게 될 위험에 대해서 다뤄보는 것은 어떨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나치즘은 지난 독일 선거에서 완패해서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어." 편집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렵습니다."
그러자 폴라니가 말했다. "아주 중요한 문제야. 자네가 두려워하는 이유를 더블스페이스로 쳐서 세 페이지 정도로 정리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겠나?"
결국에는 폴라니가 제안한 주제들 대신 안전하고 상투적인 주제들이 선택됐으며, 폴라니의 추측(편집자들은 그렇게 불렀다)은 짧은 기사로 줄어들거나 뒷면으로 쫓겨났다. 그때쯤 나는 폴라니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흥미를 잃었다. (『피터 드러커 자서전』, p.281-283)

피터 드러커는 1927년 크리스마스에 <오스트리아 경제> 편집실을 방문한다. 당시 <오스트리아 경제>는 <이코노미스트>와 함께 유럽 유수의 경제지였고, 마침 드러커의 아버지는 그 신문의 후원자였다. 칼 폴라니(당시 부편집장이었다고 한다)와 피터 드러커는 대공황이 터지기 2년 전에 만나, 이후 절친한 친구가 된다. 드러커가 묘사하는 폴라니는 따뜻하고 쾌활하며 수다스런 이상주의자였다. 통찰은 번뜩이지만 상상력이 넘치는 탓에 억측도 보여주고, 정치 경력에 비해 순진한 구석이 있는 '서생'이랄까(한편, 폴라니에 대한 드러커 아버지의 평은 이렇다 : "아, 카를 폴라니. 그래, 한때 전도가 유망한 인물이었지만 결국 또 하나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지", p.297).

폴라니 집안 사람들은 모두 탁월한 것으로 유명했다. 드러커에 따르면, 루소와 제임스 밀 방식의 교육을 받은 폴라니 집안 아이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다. 장남인 오토는 성공한 공학자이자 사업가였고,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후원자가 되었다. 차남 아돌프는 철도기술자로서 브라질의 발전에 헌신했다. 딸인 무지(무지Mousie는 '쥐'를 뜻하는 애칭인 것 같다. 본명은 드러커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는 헝가리 민족음악운동의 스타이자 '농촌사회학'의 창시자로서,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였던 티토와 이스라엘 공동체 키부츠에 영향을 주었다. 막내 마이클은 물리화학자로 두각을 나타냈다(그는 과학철학자로서 『개인적 지식』을 썼으며, 그의 아들 존 폴라니는 1986년 노벨 화학상을 동료들과 공동 수상했다).

칼 폴라니는 이 집안의 넷째였다. 폴라니는 청년 시절에 '갈릴레이 서클'의 지도자였고(드러커는 이 얘기는 하지 않았다), '급진시민당'을 조직했다(드러커는 폴라니가 미카엘 카롤리 백작과 함께 '헝가리 자유당'을 창설했다고 하는데, 이 헝가리 자유당이 급진시민당과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다). 드러커가 바라본 폴라니 집안은 로마 공화정 시대의 그라쿠스 가문에 가까운 것 같다. 즉, '사회 개혁가' 집안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갈등할 소지가 많은 것 같다. 특히 드러커는 당시 '붉은 빈'의 주변인으로서, 또 짗궃은 '관찰자'(『피터 드러커 자서전』의 원제는 Adventures of a Bystander, 즉 '관찰자의 모험'이다)로서 사회주의에 무척이나 비판적이었다. 그런 만큼 두 사람 사이의 지적 긴장과 갈등이 자서전 곳곳에서 나타난다(『거대한 전환』의 옮긴이 홍기빈은 드러커의 자서전에서 기술된 부분 몇 가지가 부정확하다는 지적을 받는다고 전한다).

폴라니 가의 사람들은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별로 중요한 인물이 되지는 못했다. 중요하다기보다는 흥미로운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프랑스 혁명 100년 전인 홉스와 로크 이후, 아니면 프랑스 혁명 이후 지난 200년 동안 줄곧 서양인의 관심을 끌어왔던 절대적인 하나의 시민종교에 대한 탐구, 완전한 또는 좋은 사회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그들의 실패가 나타내기 때문이다. (p.309-3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라니와 드러커는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 같다. 폴라니도 『거대한 전환』에서 드러커 부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있다("드러커와 그의 부인은 저자의 여러 결론들에 대해 진심으로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거대한 전환』, p.86-87).

한편, 드러커는 폴라니가 고대 경제사로 파고드는 것을 일종의 지적 도피로 보았다. 그 지적은 옳지만, 도피의 이유를 "자신이 미워하고 경멸하는 리카르도와 벤담, 그리고 카를과 동시대의 대가인 오스트리아 학파의 루드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예크의 시장신조에 유리한 증거만 더 많이 찾게 됐다"(p.307)로 진술하는 부분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폴라니가 시장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떠올려볼 때(루이 뒤몽은 『거대한 전환』 프랑스어판 서문에서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과 폴라니 연구를 연결짓는다), 드러커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시선으로 폴라니를 해석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드러커 역시 시장 자유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은 듯한데, 이는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그 또한 오스트리아의 풍부한 지적 환경에서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덧. 『피터 드러커 자서전』 번역에서 오기가 눈에 거슬린다. 폴라니Polanyi를 Ploamyi라고 표기한다거나, 파시즘의 상징인 파시fasci를 속간束桿으로 번역하는 등. '속간'이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파시'라는 표현을 쓰는 게 당시 파시즘의 유행을 생동감있게 표현하는 데 더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덧2.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을 대출했다. 『다시 쓰는 근대 세계사 이야기』를 마치는 대로 바로 읽어야겠다.

덧3. 드러커와 폴라니의 첫 만남 장면은 '상식에 경도된 다수와 그렇지 않은 소수'를 대비시키고, '나와 뜻이 맞는 사람과의 만남'이라는 면에서 꽤 상투적인 씬이다. 아마 실제는 이만큼 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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