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제 홍명교의 글도 살짝 짚어보겠다(홍명교, <지식인들은 관념의 숲으로 넘어갔다>). 그는 손쉽게 과장하고 관념성이 지나치다. 논쟁에 얽힌 사람들을 너무 쉽게 '~주의자'로 포장해 광역도발 스킬을 시전한다는 점에서도 구원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럼에도 홍명교의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신자유주의에 대한 관점이다.
"사실 신자유주의란 자본간의 공정한 경쟁을 그 이상으로 삼는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드러난 양상들은 일종의 변종-신자유주의였던 것이며, 최근 자칭 ‘진보진영의 이데올로그’라는 자들이 보이는 이명박 앞에서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안이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노정태씨의 글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을 옹호하기 위한 해석은 아니지만, 그 사이 공백에 노정된 정치주의적 관념성이 더 문제다. 그렇게 관념주의적으로 망가지느니 차라리 이명박을 옹호하는 게 낫다."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자본은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한다는 맑스의 테제에서도 퇴보한 관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공정한 경쟁'을 이상으로 삼지 않는다. '더 많은 이익'이 신자유주의의 이상이다. 신자유주의는 이익(이윤)을 윤리적으로 합리화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아시아 모델이지, '변종 신자유주의'는 아닌 것이다. 단, 한 가지 점에서는 '변종'이라는 지적이 유효하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혼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취업 시장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지금 20대 대학생들은 삼성 등 재벌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 동시에, 입사 후에는 권위주의적인 조직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계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가.
2. 이 관점을 좀 더 확장하자면 홍명교는 '과대지구화론'의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지구화론자만이 과대지구화론에 서 있지 않다. 자본의 전지구화에 대항하는 입장에도 국민국가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대지구화론자는 경제적 지구화가 초국적인 생산·무역·금융 네트워크를 확립함으로써 경제의 '탈국가화(denationalization)'를 가져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국경 없는' 경제 내에서 일국 정부는 지구적 자본의 구동(驅動) 벨트에 불과한 처지, 또는 궁극적으로 점차 강성해지는 지방·지역·지구적 공치 메커니즘 사이에 끼인 단순한 매개제도로 전락하게 된다. (…) 그러나 같은 분석틀 내에서도 입장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한편에서 신자유주의자가 개인적 자율(성)의 승리와 국가권력에 대한 시장원칙의 승리를 환영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 급진주의자 또는 네오맑스주의자는 현대의 지구화가 억압적 지구자본주의의 승리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념적 확신에도 불구하고 과대지구화론은 다음과 같은 확신을 공유한다. 즉, 지구화는 일차적으로 경제적 현상이고, 오늘날 지구적 경제가 점차 통합되고 있으며 지구적 자본의 욕구로 각국 정부에 신자유주의적 경제원칙이 강요되고 있어 정치는 더이상 '가능한 것의 예술'(the art of the possible)이 아니라 '합리적인 경제관리'의 실행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전지구적 변환』, 서론, pp.17-18, 밑줄은 필자 강조)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는 『전지구적 변환』에서 지구화globalization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세 가지로 잡았다.
① 자본의 전지구화를 확대해석한 과대지구화론
② 이에 반해 국민국가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다고 보는 회의론
③ 마지막으로 국민국가와 자본 모두 지구화 현상에서 서로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적응하고 있다는 변환론
홍명교는 자본과 국민국가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고민이 없는 듯하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도, 넘어가지 않지도 않았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생산관계의 권력은 본래 ‘자본’에게 있었고, 정부는 항상 그것의 야경적 역할을 대리 수행해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것이 노골적으로 심해졌다는 걸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것은 국가마다, 정세마다 다른 양상을 보였고 그것에 대해 공론장에서 ‘발언할 입’을 지닌 사람들은 매번 면밀하게 그 인과들과 역관계를 살펴볼 의무가 있다." 그의 입장은 또 '교조적 맑스주의'의 테제(노정태가 비판하는 맑스주의가 주로 이쪽일테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홍명교의 글은 노정태/한윤형과 대비된다는 점에서만 변증법적인 의미를 갖는다. 노정태/한윤형의 회의론적 관점과 대비했을 때 말이다.
3. 잠깐 책 이야기를 하자.『전지구적 변환』은 정치학, 국제관계학, 경제학, 사회학 분야의 학제간 연구 결과로 나온 책이다(leopord, <100225>). 역자 조효제 베를린자유대학 교수의 말을 빌자면 "칼 폴라니의 명저 『거대한 전환』의 지성적 상속자"인 셈이다. 여기서 지구화라는 개념을 들고 온 이유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잡기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고, 어떤 사건에 주목해야 할까를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회의론자는 지구화를 신화라고 주장하고, 지구화를 완벽하게 통합된 지구적 시장과 등치시키면서 순전히 경제학적인 지구화 개념에만 의존한다. 회의론자는 현재의 경제통합 수준이 이러한 '이상형'에 미치지 못하며, 현재의 통합 정도는 19세기 말(고전적 금본위제 시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 '지구화' 정도가 과장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회의론자는 바로 이런 점에서 과대지구화론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을 뿐 아니라 일국 정부가 국제경제활동을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너무 단순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회의론자에 따르면 국제화의 힘은 그 자체가 통제 불능이라기보다는 경제자유화를 계속 추진할 수 있는 일국 정부의 규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책, 서론, p.20, 밑줄은 필자 강조)
이를 토대로 했을 때 노정태와 한윤형이 서 있는 지점이 보다 명확히 보인다. 둘 다 한국에서는 정부(국민국가)가 기업(자본)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화에 대한 회의론과 일치한다. 그런데 한윤형은 노정태보다 한 발 더 나간다.
대한민국은 성립 당시부터 국가권력이 자본권력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부르주아가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자본을 축적한게 아니라, 국가권력이 폭력으로 자본가의 형성을 도와준 사례는 아마 자본주의 후발국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일 게다. 더구나 한국은 독립 당시 일본 자본가들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했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의 능력치는 거의 0에 가까웠다. (…) 이승만은 군대와 경찰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거지 자본가나 대자본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이때는 누구를 자본가로 만들지도 국가가 결정했다. (…) 박정희는 사채 동결 등 자본주의의 기본인 사적 소유까지 부정해가면서 통치를 했다. 박정희는 수출 많이 하라고 자본가의 투자는 물론 규제했고, 심지어는 소비도 규제했다. (…) 이때도 국가는 '누구를 자본가로 만들지' 정도는 아니라도 '누구를 자본가에서 빼버릴지' 정도는 충분히 자의적으로 결정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윤형의 글에서는 8,9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그 중에서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향기가 난다는 점이다. 물론 '박정희식 계획경제'나 은행을 매개로 한 정부 주도의 기업 육성 프로그램 등이 한국 자본계급 형성에 미친 영향을 무시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윤형은 한국 자본주의 형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수를 제외하고 있다. 냉전과 분단이다. 이 두 국제정치적 조건이 한국 정치사·경제사에 미친 영향은 몹시 크다. 이 조건들이 사회구성체 논쟁(식민지 반자본주의론 vs. (신식민지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에 불을 지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관점에는 큰 결함이 있다. 국가권력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국가권력에 대한 다양한 외생변수(미국의 개입과 군대 주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산업 분업 등)는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4. 무엇보다 한윤형은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가 국제정치경제체제의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단적으로 지금의 한국을 신식민지(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전시작전권 환수 논란과 해외미군재배치계획을 둘러싼 한·미 간 갈등을 보자.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기에는 입장이 많이 변했다. 우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한국이 미국의 '전략 파트너'가 될 정도로 위상이 바뀐 것이다. 이런 변화의 요인에는 경제성장에 따른 국가 위상 증대만 있지 않다. 그건 우파의 논리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와 한국 자본이 신자유주의 지구화 국면에 적응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국은 80년대 말, 민주화 국면과 냉전 해체 국면을 거의 동시에 맞았다. 비록 북한과의 갈등이 남아 있어 신(新) 냉전 내지는 소(小) 냉전 상태에 있다고 진단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자본계급 역시 변화를 맞는다. 민주화 국면 속에서 군부독재 시절의 개입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한편 97년 이전까지 민주화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동반했다. 국민국가의 경제정책 자율성 또한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완전히 고정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밴드 형식으로 고정환율제를 유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까지는 노정태와 한윤형의 분석과 어느 정도 맞닿는다. 문제는 1997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는 데 있다. IMF 구제금융 말이다.
5. 우석훈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이 하나같이 지적했듯이, 한국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뀐 계기는 97년 IMF 구제금융이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정부와 기업들은 모두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최종적인 댓가는 모두 서민들의 어깨에 지워졌다. 여기서 박권일의 지적이 적절하다. 그는 한윤형 포스트의 코멘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건 당연하게도 과거 군사정권같은 국가권력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고, 역사적 비교 차원에서 사실명제입니다. 확실히 국가는 과거에 비해 일국시장에서의 강력한 경제적 통제수단들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특히 금융쪽에 대해서는 dj-참여정부 때 핵심수단들 대부분을 포기했구요. 그 결과가 대기업의 엄청난 이윤증가와 시민들의 손실로 나타났고 앞으로 쭉 나타날 겁니다. 얼핏 자조적으로 들리는 노무현의 저 '선언'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피해자가 아니라 권력을 시장으로 넘기는 주체이자 공모자였습니다. 특히 참여정부의 광기어린 금융허브 추진 등을 보면 국가는 거의 기업복합체처럼 보이기도 하죠."
금융의 핵심수단 포기 가운데 하나는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의 변경인 듯하다(그럼에도 외환보유고는 계속 유지하고 있다. 모순적인 선택이지만, 수출입 통화가 달러인 나라에서 외환보유고의 포기는 자살행위일 게다.). 노무현 정부의 금융허브 프로젝트 추진 역시 국민국가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적응하려는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박권일의 통찰은 다음 문장에서도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저 '선언'(필자 주 :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발언)이 곧장 시장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된다는 정언명제 내지 당위명제가 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노무현 또는 참여정부는 그 두 가지 층위를 아무 생각없이 섞어서 사고하고 집행했던 것 같습니다. IMF트라우마 이후 시장논리는 곧 금과옥조, 글로벌스탠더드였으니까요.
즉, 박권일은 노무현을 비롯한 이른바 개혁세력이 '대세'로서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정언명제'로서의 신자유주의를 혼동했다고 추론한다. 한국을 워싱턴 컨센서스의 아시아 모델이라고 보는 관점은, 한국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렸던 신흥공업국가(NICs :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 한국)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시도한 나라라는 데 기반한다. 그 과정에서 재벌 기업들은 살아남았을뿐만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각축장에 편입하는데 성공했다. 더 나아가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 카르텔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더욱 공고해지는 역설이 발생했다. 그리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 점에서 국민국가의 자율성에 대한 회의론적 관점은 더 이상 한국에 유효하지 않다. 노정태와 한윤형은 불안정한 논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6. 두 사람의 관점은 IMF 구제금융을 일국적인 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특히 불안정하다. 이 사건은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와 동아시아 금융위기 도미노, 러시아 모라토리움 선언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자체가 전지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함정이 발견된다. IMF 구제금융으로 인한 한국의 체질 변화를 국민·국제경제적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로 인한 영향력을 절반도 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설명하고 있을 게다. 서동진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경제 현상일뿐 아니라 문화 현상이며, 87년 이후의 민주화·자유화 국면에 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새로운 주체'가 탄생했다고 진단한다. 이 새로운 주체란 곧 자기계발하는 주체(신체)다.
한윤형 또한 이 책을 읽었지만(한윤형, <하지만 자기계발의 영역에서도 담론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보다 디테일한 부분을 짚은 건 헨드릭스 쪽이다(Hendrix, <서동진과 푸코,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 한윤형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하는 신체를 너무 파편화시켜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자기계발의 영역에서 담론투쟁을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논객의 정치적 실천'으로서는 시도할 만한 일일 게다. 적어도 "자기계발은 신자유주의적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은 '몸에 새겨지는 권력'의 문제이고, 그 계보는 1997년부터 시작한다. 한윤형은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건과 신자유주의, 자기계발하는 신체라는 개념을 일국적·경제적·문화적 관점에서 저마다 동떨어진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7. 정리하자. 이제까지 노정태와 홍명교, 한윤형과 박권일의 관점을 살펴보았다. 거기에 연구서까지 덧붙여 논의를 확장하고자 한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일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에 대한 서로의 관점이 무척 다르다는 점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구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개념에 대한 합의가 아니다. 한윤형의 말대로 담론투쟁이 필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즉,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사실에 가까운 설명이 필요하며, 가장 적합한 설명을 하기까지 논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없다."는 식의 전여옥식 수사는 버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는 죽었다."는 말 또한 레토릭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민국가와 자본 모두 지구화에 적응하고 있다. 고정적이고 정태적인 모형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동태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른바 '논객'이라 해서 통찰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한편,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담론투쟁이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건 노무현주의자와 MB인 듯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맞물리면서 자유주의 개념에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수구 카르텔의 권위주의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엇갈리면서 갈등하고 있다. 두 정부 사이의 갭을 해석하는 과정은 무척 복잡다단하다.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현상인 것이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지구화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가 곧 계급의 고착화와 완전한 분화로 이어질지 여부 또한 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일이다.
나는 우리들의 몸을 변화시킨 이 거대한 사건을 파헤치고자 할 때, 지구화라는 거시적 관점과 자기계발하는 신체라는 미시적 개념을 유기적으로 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 고리를 연결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다시,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란 자본간의 공정한 경쟁을 그 이상으로 삼는다. 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 드러난 양상들은 일종의 변종-신자유주의였던 것이며, 최근 자칭 ‘진보진영의 이데올로그’라는 자들이 보이는 이명박 앞에서의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안이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노정태씨의 글도 마찬가지다. 이명박을 옹호하기 위한 해석은 아니지만, 그 사이 공백에 노정된 정치주의적 관념성이 더 문제다. 그렇게 관념주의적으로 망가지느니 차라리 이명박을 옹호하는 게 낫다."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자본은 최대한의 이윤을 추구한다는 맑스의 테제에서도 퇴보한 관점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공정한 경쟁'을 이상으로 삼지 않는다. '더 많은 이익'이 신자유주의의 이상이다. 신자유주의는 이익(이윤)을 윤리적으로 합리화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워싱턴 컨센서스의 아시아 모델이지, '변종 신자유주의'는 아닌 것이다. 단, 한 가지 점에서는 '변종'이라는 지적이 유효하다. 한국에서는 권위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혼합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취업 시장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지금 20대 대학생들은 삼성 등 재벌 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에 돌입한 동시에, 입사 후에는 권위주의적인 조직 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계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은가.
2. 이 관점을 좀 더 확장하자면 홍명교는 '과대지구화론'의 입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의 저자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지구화론자만이 과대지구화론에 서 있지 않다. 자본의 전지구화에 대항하는 입장에도 국민국가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과대지구화론자는 경제적 지구화가 초국적인 생산·무역·금융 네트워크를 확립함으로써 경제의 '탈국가화(denationalization)'를 가져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국경 없는' 경제 내에서 일국 정부는 지구적 자본의 구동(驅動) 벨트에 불과한 처지, 또는 궁극적으로 점차 강성해지는 지방·지역·지구적 공치 메커니즘 사이에 끼인 단순한 매개제도로 전락하게 된다. (…) 그러나 같은 분석틀 내에서도 입장의 차이는 대단히 크다. 한편에서 신자유주의자가 개인적 자율(성)의 승리와 국가권력에 대한 시장원칙의 승리를 환영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 급진주의자 또는 네오맑스주의자는 현대의 지구화가 억압적 지구자본주의의 승리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이념적 확신에도 불구하고 과대지구화론은 다음과 같은 확신을 공유한다. 즉, 지구화는 일차적으로 경제적 현상이고, 오늘날 지구적 경제가 점차 통합되고 있으며 지구적 자본의 욕구로 각국 정부에 신자유주의적 경제원칙이 강요되고 있어 정치는 더이상 '가능한 것의 예술'(the art of the possible)이 아니라 '합리적인 경제관리'의 실행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전지구적 변환』, 서론, pp.17-18, 밑줄은 필자 강조)
정치학자 데이비드 헬드는 『전지구적 변환』에서 지구화globalization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세 가지로 잡았다.
① 자본의 전지구화를 확대해석한 과대지구화론
② 이에 반해 국민국가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다고 보는 회의론
③ 마지막으로 국민국가와 자본 모두 지구화 현상에서 서로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적응하고 있다는 변환론
홍명교는 자본과 국민국가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고민이 없는 듯하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도, 넘어가지 않지도 않았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생산관계의 권력은 본래 ‘자본’에게 있었고, 정부는 항상 그것의 야경적 역할을 대리 수행해왔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그것이 노골적으로 심해졌다는 걸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것은 국가마다, 정세마다 다른 양상을 보였고 그것에 대해 공론장에서 ‘발언할 입’을 지닌 사람들은 매번 면밀하게 그 인과들과 역관계를 살펴볼 의무가 있다." 그의 입장은 또 '교조적 맑스주의'의 테제(노정태가 비판하는 맑스주의가 주로 이쪽일테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홍명교의 글은 노정태/한윤형과 대비된다는 점에서만 변증법적인 의미를 갖는다. 노정태/한윤형의 회의론적 관점과 대비했을 때 말이다.
3. 잠깐 책 이야기를 하자.『전지구적 변환』은 정치학, 국제관계학, 경제학, 사회학 분야의 학제간 연구 결과로 나온 책이다(leopord, <100225>). 역자 조효제 베를린자유대학 교수의 말을 빌자면 "칼 폴라니의 명저 『거대한 전환』의 지성적 상속자"인 셈이다. 여기서 지구화라는 개념을 들고 온 이유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보다 명확하게 잡기 위해서다. 더 구체적으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고, 어떤 사건에 주목해야 할까를 되짚어보기 위해서다.
회의론자는 지구화를 신화라고 주장하고, 지구화를 완벽하게 통합된 지구적 시장과 등치시키면서 순전히 경제학적인 지구화 개념에만 의존한다. 회의론자는 현재의 경제통합 수준이 이러한 '이상형'에 미치지 못하며, 현재의 통합 정도는 19세기 말(고전적 금본위제 시대)에도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현대의 '지구화' 정도가 과장되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회의론자는 바로 이런 점에서 과대지구화론이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을 뿐 아니라 일국 정부가 국제경제활동을 규제할 수 있는 능력을 과소평가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으로 너무 단순한 수준이라고 평가한다. 회의론자에 따르면 국제화의 힘은 그 자체가 통제 불능이라기보다는 경제자유화를 계속 추진할 수 있는 일국 정부의 규제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책, 서론, p.20, 밑줄은 필자 강조)
이를 토대로 했을 때 노정태와 한윤형이 서 있는 지점이 보다 명확히 보인다. 둘 다 한국에서는 정부(국민국가)가 기업(자본)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화에 대한 회의론과 일치한다. 그런데 한윤형은 노정태보다 한 발 더 나간다.
대한민국은 성립 당시부터 국가권력이 자본권력보다 압도적으로 강했다. 부르주아가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자본을 축적한게 아니라, 국가권력이 폭력으로 자본가의 형성을 도와준 사례는 아마 자본주의 후발국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일 게다. 더구나 한국은 독립 당시 일본 자본가들의 재산을 강제로 압류했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의 능력치는 거의 0에 가까웠다. (…) 이승만은 군대와 경찰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된 거지 자본가나 대자본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이때는 누구를 자본가로 만들지도 국가가 결정했다. (…) 박정희는 사채 동결 등 자본주의의 기본인 사적 소유까지 부정해가면서 통치를 했다. 박정희는 수출 많이 하라고 자본가의 투자는 물론 규제했고, 심지어는 소비도 규제했다. (…) 이때도 국가는 '누구를 자본가로 만들지' 정도는 아니라도 '누구를 자본가에서 빼버릴지' 정도는 충분히 자의적으로 결정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한윤형의 글에서는 8,9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 그 중에서도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향기가 난다는 점이다. 물론 '박정희식 계획경제'나 은행을 매개로 한 정부 주도의 기업 육성 프로그램 등이 한국 자본계급 형성에 미친 영향을 무시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윤형은 한국 자본주의 형성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수를 제외하고 있다. 냉전과 분단이다. 이 두 국제정치적 조건이 한국 정치사·경제사에 미친 영향은 몹시 크다. 이 조건들이 사회구성체 논쟁(식민지 반자본주의론 vs. (신식민지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론 등)에 불을 지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의 관점에는 큰 결함이 있다. 국가권력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국가권력에 대한 다양한 외생변수(미국의 개입과 군대 주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산업 분업 등)는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4. 무엇보다 한윤형은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가 국제정치경제체제의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단적으로 지금의 한국을 신식민지(주의)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전시작전권 환수 논란과 해외미군재배치계획을 둘러싼 한·미 간 갈등을 보자.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기에는 입장이 많이 변했다. 우파의 언어로 말하자면 한국이 미국의 '전략 파트너'가 될 정도로 위상이 바뀐 것이다. 이런 변화의 요인에는 경제성장에 따른 국가 위상 증대만 있지 않다. 그건 우파의 논리에 불과하다. 한국 정부와 한국 자본이 신자유주의 지구화 국면에 적응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국은 80년대 말, 민주화 국면과 냉전 해체 국면을 거의 동시에 맞았다. 비록 북한과의 갈등이 남아 있어 신(新) 냉전 내지는 소(小) 냉전 상태에 있다고 진단할 수 있지만 말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자본계급 역시 변화를 맞는다. 민주화 국면 속에서 군부독재 시절의 개입으로부터 점차적으로 벗어난 것이다. 한편 97년 이전까지 민주화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동반했다. 국민국가의 경제정책 자율성 또한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었다. 비록 완전히 고정된 형태는 아니었지만 밴드 형식으로 고정환율제를 유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여기까지는 노정태와 한윤형의 분석과 어느 정도 맞닿는다. 문제는 1997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는 데 있다. IMF 구제금융 말이다.
5. 우석훈을 비롯한 경제학자들이 하나같이 지적했듯이, 한국의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뀐 계기는 97년 IMF 구제금융이다.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신, 정부와 기업들은 모두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물론 최종적인 댓가는 모두 서민들의 어깨에 지워졌다. 여기서 박권일의 지적이 적절하다. 그는 한윤형 포스트의 코멘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건 당연하게도 과거 군사정권같은 국가권력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고, 역사적 비교 차원에서 사실명제입니다. 확실히 국가는 과거에 비해 일국시장에서의 강력한 경제적 통제수단들을 많이 상실했습니다. 특히 금융쪽에 대해서는 dj-참여정부 때 핵심수단들 대부분을 포기했구요. 그 결과가 대기업의 엄청난 이윤증가와 시민들의 손실로 나타났고 앞으로 쭉 나타날 겁니다. 얼핏 자조적으로 들리는 노무현의 저 '선언'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피해자가 아니라 권력을 시장으로 넘기는 주체이자 공모자였습니다. 특히 참여정부의 광기어린 금융허브 추진 등을 보면 국가는 거의 기업복합체처럼 보이기도 하죠."
금융의 핵심수단 포기 가운데 하나는 고정환율제에서 변동환율제로의 변경인 듯하다(그럼에도 외환보유고는 계속 유지하고 있다. 모순적인 선택이지만, 수출입 통화가 달러인 나라에서 외환보유고의 포기는 자살행위일 게다.). 노무현 정부의 금융허브 프로젝트 추진 역시 국민국가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에 적응하려는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 박권일의 통찰은 다음 문장에서도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저 '선언'(필자 주 :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는 발언)이 곧장 시장에 국가가 개입할 수 없고 개입해서도 안된다는 정언명제 내지 당위명제가 되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노무현 또는 참여정부는 그 두 가지 층위를 아무 생각없이 섞어서 사고하고 집행했던 것 같습니다. IMF트라우마 이후 시장논리는 곧 금과옥조, 글로벌스탠더드였으니까요.
즉, 박권일은 노무현을 비롯한 이른바 개혁세력이 '대세'로서의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정언명제'로서의 신자유주의를 혼동했다고 추론한다. 한국을 워싱턴 컨센서스의 아시아 모델이라고 보는 관점은, 한국이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렸던 신흥공업국가(NICs : 홍콩, 타이완, 싱가포르, 한국)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개혁을 시도한 나라라는 데 기반한다. 그 과정에서 재벌 기업들은 살아남았을뿐만 아니라 초국적 자본의 각축장에 편입하는데 성공했다. 더 나아가 재벌을 중심으로 하는 수구 카르텔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으로 인해 더욱 공고해지는 역설이 발생했다. 그리고 양극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 점에서 국민국가의 자율성에 대한 회의론적 관점은 더 이상 한국에 유효하지 않다. 노정태와 한윤형은 불안정한 논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6. 두 사람의 관점은 IMF 구제금융을 일국적인 면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특히 불안정하다. 이 사건은 일본의 버블 경제 붕괴와 동아시아 금융위기 도미노, 러시아 모라토리움 선언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자체가 전지구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함정이 발견된다. IMF 구제금융으로 인한 한국의 체질 변화를 국민·국제경제적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신자유주의 지구화로 인한 영향력을 절반도 채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설명하고 있을 게다. 서동진은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경제 현상일뿐 아니라 문화 현상이며, 87년 이후의 민주화·자유화 국면에 97년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새로운 주체'가 탄생했다고 진단한다. 이 새로운 주체란 곧 자기계발하는 주체(신체)다.
한윤형 또한 이 책을 읽었지만(한윤형, <하지만 자기계발의 영역에서도 담론투쟁이 필요하지 않을까?>), 보다 디테일한 부분을 짚은 건 헨드릭스 쪽이다(Hendrix, <서동진과 푸코, 그리고 자기계발하는 주체>). 한윤형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기계발하는 신체를 너무 파편화시켜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자기계발의 영역에서 담론투쟁을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논객의 정치적 실천'으로서는 시도할 만한 일일 게다. 적어도 "자기계발은 신자유주의적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은 '몸에 새겨지는 권력'의 문제이고, 그 계보는 1997년부터 시작한다. 한윤형은 IMF 구제금융이라는 사건과 신자유주의, 자기계발하는 신체라는 개념을 일국적·경제적·문화적 관점에서 저마다 동떨어진 현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7. 정리하자. 이제까지 노정태와 홍명교, 한윤형과 박권일의 관점을 살펴보았다. 거기에 연구서까지 덧붙여 논의를 확장하고자 한 이유는 사실 단순하다. "신자유주의란 무엇일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즉, 신자유주의에 대한 서로의 관점이 무척 다르다는 점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구해야 할 것은 신자유주의 개념에 대한 합의가 아니다. 한윤형의 말대로 담론투쟁이 필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즉,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사실에 가까운 설명이 필요하며, 가장 적합한 설명을 하기까지 논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없다."는 식의 전여옥식 수사는 버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민국가는 죽었다."는 말 또한 레토릭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국민국가와 자본 모두 지구화에 적응하고 있다. 고정적이고 정태적인 모형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동태적인 실체인 것이다. 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이른바 '논객'이라 해서 통찰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한편,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담론투쟁이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건 노무현주의자와 MB인 듯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맞물리면서 자유주의 개념에 혼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수구 카르텔의 권위주의가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엇갈리면서 갈등하고 있다. 두 정부 사이의 갭을 해석하는 과정은 무척 복잡다단하다.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현상인 것이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 지구화로 인한 양극화의 심화가 곧 계급의 고착화와 완전한 분화로 이어질지 여부 또한 면밀하게 관찰해야 할 일이다.
나는 우리들의 몸을 변화시킨 이 거대한 사건을 파헤치고자 할 때, 지구화라는 거시적 관점과 자기계발하는 신체라는 미시적 개념을 유기적으로 이어야 한다고 본다. 그 고리를 연결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다시,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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