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최무영 / 책갈피, 2008)는 7월 초부터 읽기 시작해 이제야 마쳤다(leopord, <100702>). 여느 때처럼 늘 가방에 넣어다니면서 틈틈이 읽으려고 했다. 하지만 강의에서 제시하고 있는 물리학 개념을 따라가기로는 손 만한 게 없을 듯싶었다. 즉, 눈으로 훑기만 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강의를 듣는다는 생각으로 이면지에 개념이나 수식 따위를 끄적였다. 기분 탓이겠지만, 한결 읽는 것이 수월했다.
2. 책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비전공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울대 교양 수업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나같은 물리학 비전공자에겐 더없이 적절했다. 타겟 설정이 적절했다는 인상이 든다. 수학은 젬병이었지만 물리만은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 물리Ⅰ은 꼭 높은 점수를 받고 싶었다. 나름 공부에 몰두했고, 재밌었다. 고등학교 물리, 그것도 문과에서 배우는 물리가 어려워 봤자 얼마나 어려웠겠냐만. 하지만 아주 어렸을 땐 과학자가 꿈이었다. 막연히 '우주과학자'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 꿈대로 갔다면 지금쯤 천체물리를 공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뉴턴의 법칙 같은 고전역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현대 우주론 등을 읽고 있으니 추억이 새록새록 올라왔다.
3. 수식이 있어서 조금 버거울 수도 있지만, 대중이 따라가기에 무리는 없다. 흥미로운 부분은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및 통계역학, 혼돈 이론과 복잡계 이론을 소개하는 장이었다. 고전역학을 읽으면서 맑스가 '과학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근거가 어디에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최무영 교수도 지적하고 있듯이 과학은 기술로 구현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정신문화와 사고체계 그 자체다. 19세기 '과학의 시대'에 고전역학, 그 중에서도 동역학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상가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맑스 역시 시대정신Zeitgeist에 충실하게 결정론적이고 정량적인 동역학 세계를 사상의 토대로 삼았던 건 아닐까(물론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고전역학이라는 틀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테지만.)? 고전역학이 경제학, 특히 신고전파(한계효용학파) 경제학에 미친 영향을 되짚는 시도 역시 참고할만 하다(periskop, <물리학과 경제학의 분수령을 찾아서>. 부끄럽지만 여기에 영감(?)을 받아서 경제학과 정치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글을 써보고자 시도했다. 결과는 뭐...).
4. 통계역학은 복잡계 이론을 탐색하는 주요한 방법으로 존재한다. 그 동안의 물리학이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편지식 내지는 일반이론을 도출하고자 시도했다면, 통계역학은 거시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한편, 저자는 통계역학에 큰 영향을 미친 학자, 볼츠만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통계역학을 완성하고 원자라는 개념을 물리학적 관점에서 확립한 사람이 볼츠만이지요. 볼츠만이 통계역학을 통해 거시적 관점에서 시간되짚기 대칭성이 깨지는 현상을 설명했는데 그때는 아무도 믿지 않았어요. 볼츠만이 당시에 펼친 반론은 오늘날 봐도 놀랄 정도로 훌륭합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고 결국 볼츠만은 정신병에 걸려 자살했습니다. 우울증이었다고 하지요. (15강 거시적 관점과 통계역학, p.338)
이 볼츠만의 5대째 한국인 제자가 바로 최무영 교수 본인이라는 게 개그랄까(:P). 볼츠만 외에도 "자연에서 대칭성은 완전하지 않고 조금 깨져 있다."(7강 물리법칙의 대칭성, p.140)는 것을 발견한 학자 우(여성) 대신 약상호작용에서 홀짝성 대칭성이 있는지 불확실하다고 지적한 양과 리(둘 다 남성)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실, 또, 일반적으로 연속 대칭성이 존재하면 그에 해당하는 물리량이 보존된다는 '뇌퇴르의 정리'를 제시한 뇌퇴르 또한 여자라는 이유로 20세기 초 독일에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당대 최고의 수학자로서 힐베르트와 아인슈타인이 인정했다고 한다.) 등은 과학자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이 어떤 모습을 지니는지 보여준다.
저자는 강의 곳곳에서 과학과 과학자 사회, 현실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맑스주의, 그 중에서도 트로츠키주의 관련 책을 내는 책갈피에서 출간된 것도 우연은 아닐 게다. 책은 정파를 떠나서 과학과 과학자 사회가 이른바 '일반인의 사회'가 갖고 있는 상식이나 편견에서 얼마나 자유롭지 못한지 돌아보게 해준다.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호킹 등 '명사'에 가려져, 학문에 보다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잊혀지는 상황도 떠올리게 한다.
5. EPR 패러독스라던가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유명한 역설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과학사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살짝 훑어보는 맛이 있다. 교양서가 가진 장점이겠다. 한편으로는 좌파 혹은 진보가 과학을 이야기하지 않는 '지금 여기'의 풍토가 진짜 역설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혼돈 이론과 복잡계 이론은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더 나아가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힌트를 제공해줄 수 있지 않을까? 특히 "현상은 초기 조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혼돈 이론의 명제는 특정 국가의 성공 사례를 한국에 갖다 붙이기가 난망하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다. 또, 생명을 비롯한 자연 현상이 개체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떠오르는 현상으로 나타난다는 복잡계 이론의 통찰은 '복잡한'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유용할 것으로 전망된다(periskop, <경제시스템을 향한 복잡계적 접근>).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복잡계 네트워크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이 한 예다. 좌파 혹은 진보는 복잡계 연구 등에 어떻게 '침투'하고 있을까?
6. 질적 차이보다 양적 차이에 주목하는 것. 여전히 자연과학은 정량적인 학문이다(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영혼 없는 학문'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게다. 그럼에도 현상으로서의 양적 차이와 변화를 탐색함으로써 인간의 사고 지평이 확장되었다는 것 또한 수긍해야 할 게다. 한편, 책은 주로 이론물리학과 관계된 학자들을 언급하는 듯하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서 과학의 최전선인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을 조명하는 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김우재, <파리방의 분투: '첫 유전자 배열'의 전설을 이루다>).
7. 비록 마지막의 프리온 이야기에 온전히 동의하기는 힘들지만(따지고 보면 프리온보다 무서운 물질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는 과학을 교양으로 쉽게 접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된다. 과학에 대한 심도 깊은 책이야 많겠지만, 물리학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관점을 배우는 데 유용하다. 무엇보다 좌파 혹은 진보가 과학에 무관심한 듯한 지금의 풍토에서 말이다. 이제 아무도 다윈상(사람의 해골을 들고 있는 원숭이상)을 자기 책상 위에 놓고 싶지는 않은 것일까? 이토록 과학을 외치는 시대인데도 말이다.
* 과학과 관련된 내용이라 과학 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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