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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1) : 노정태, 한윤형의 관점에 대하여

by parallax view 2010. 8. 13.
1. (존칭생략) 한윤형은 얼마 전 노정태-홍명교 논쟁에 혀를 차며 일침을 가하려 했다(한윤형, <한국 자본가 계급의 탄생과 국가의 역할 - 노정태/홍명교 논쟁에 부쳐>). "가하려 했다."고 말한 것은 한윤형이 자기 의도를 온전히 달성하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둘 모두를 비판하는 듯하다. 하지만 한국의 정부-자본 간의 갈등에서 정부가 우위에 있다는 점에서는 노정태와 같은 입장에 선다. 재밌는 건 노정태, 홍명교, 한윤형 모두 비판의 전제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 전제란 노무현과 노빠다. 비판의 날은 특히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말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억지로 방어하는 노빠들에게 향한다. 그런 점에서 이 논쟁의 숨은 주인공은 다름 아닌 노무현과 노빠들인 셈이다.

2. 여기서 합의(!)를 통해 "노빠를 공격한다."로 결론지을 생각은 없다. 한윤형의 말대로 이번 논쟁은 "쟁점이 뚜렷하고, 그 쟁점이 현재의 맥락에서 중요한 지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로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관점이 너무나 다르는 것이다. 여기서 한윤형은 '젊은 논객들' 사이에 "관념적인 정치논쟁의 방식이 우려스럽다."며 비판하고 있다. 시도는 좋으나 뒷짐지고 엣헴하는 것 같아 보기 불편하다. 한윤형은 현재 맥락에서 쟁점의 중요성을 직감하긴 했으나, 이를 적절하게 풀어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노정태와 한윤형 모두 신자유주의 지구화와 국민국가 사이의 관계를 너무 좁은 틀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한해서는 홍명교가 보다 넓게 보고 있다. 논점이 산만하고 논거가 허술하며 손쉽게 싸잡아 비판해 설득력이 너무 떨어진 게 문제지만 말이다(홍명교, <지식인들은 관념의 숲으로 넘어갔다>). 홍명교야말로 관념의 숲에 빠져버렸다.

3. 한윤형의 관점을 비판하기 전에 노정태의 관점을 중심으로 논쟁을 살펴보자. 노정태는 이명박의 연이은 '반(反)대기업적' 발언에서 기업 권력을 견제하는 정부 권력을 조명한다(노정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굳이 대통령까지 찾을 필요도 없다. 대부분의 경우 기업은 정부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이 정부를 좌지우지하기 위해서는 그 정부가 부패해야 하고, 기업의 뇌물을 받는 부패한 공직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즉 정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을 경우, 기업은 정부를 못 이긴다. 애초에 행위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가 공동체 내에서 모든 행위자들이 행동하는 게임의 룰을 만들고 그 룰을 수호한다. 기업은 바로 그런 규칙 속에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일 뿐이다.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대통령은 민주공화정부의 '선출된 5년(혹은 연임 8년) 임기의 왕'이자 '의제 설정자'로서 기능한다. 그런 만큼 대통령의 권한이 강력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노정태는 처음부터 함정에 빠진다. 대기업에 대한 대통령의 압박을 기업 권력에 대한 정부 권력의 절대우위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과연 기업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부가 '부패'할 때에만 영향력을 행사할까? 미국을 비롯한 이른바 '민주 국가'에서 기업이 벌이는 로비 활동은 정치적 부패가 없다면 불가능할까? 만약 이 관점에 따른다면 재벌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이 과두정적 카르텔을 형성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공허한 수사는 말 그대로 수사에 불과하다. 각 기업들은 자신들의 핵심 시장을 좌우하는 정부의 정책에 맞추어 제품을 만들고 소비자를 공략한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은 아동용 장난감을 사도 중국산이 아닌 덴마크에서 만들어내는 레고를 선호한다. 덴마크 사람들이 중국인에 비해 특별히 윤리적이고 선할 것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덴마크 정부의 안전 기준에 맞춰 생산되는 레고는 몇몇 중국산 장난감과 달리 어린이가 입에 넣고 빨아도 유독 물질을 배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신뢰는 결국 기업이 아니라 정부에 대한 것이다. (역시 필자 강조)

노정태 역시 검은 숲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다.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표현은 단순히 수사rhetoric에 불과할까? 그는 이 인용문 전에 애플의 독점 시도가 미 연방정부의 독점행위 규제로 인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미국의 반(反)독점법을 비롯한 규제 정책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체제라는 이데올로기/시스템이 깔려 있다. 신자유주의는 그 시스템의 연장선상에 있다. 홍명교처럼 국민국가-자본 사이의 관계를 음모론적으로 과장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또, 기업 권력에 대한 위 예시는 오히려 국민국가(덴마크)야말로 '국가 브랜드'라는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의 마케팅에 편입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4. 이어서 홍명교의 반론에 대한 노정태의 재반론을 보자. 논지는 이전 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노정태는 재반론에서 E. E. 샤츠슈나이더의 『절반의 인민주권』을 들며, 한국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주장을 덧붙였다(노정태, <자본의 지배, 자본가의 지배>).

샤츠슈나이더는 경험적으로 그러한 (필자 주 : 맑스주의 국가관) 해석이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 민주주의는 정치권력을 경제권력으로부터 분리하려 했던 초기의 시도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시도의 결과 “서구 문명의 오랜 역사에서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의 일체성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지만, 현재는 두 권력이 분리되어 있고 그것은 서로 갈등한다. “경제권력의 소유자가 곧 정부의 소유자였던” 시대는 끝나고 대중들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갈등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노정태는 샤츠슈나이더의 관점을 빌어 "삼성과 이건희 일가에 의한 대한민국 지배"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한편, 한윤형은 노정태가 한국의 정치 지형을 무시한 채 '미국 신문 기사'에서 논의를 출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조선일보 독재론'이나 '삼성 독재론'(황광우, 김상봉 등)이 허구라고 비판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지점에 선다.

삼성이 IMF의 고비를 넘겨 현재의 삼성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이건희가 부산에 지어놓은 삼성자동차 공장을 ‘시장 원리’에 따라 폐쇄할 경우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흔들릴 것을 염려한 김영삼 정부가 그것을 억지로 방어해줬기 때문이다. 대규모 손실을 감당해야 하는 삼성은 구조조정을 빌미삼아 구조본, 혹은 ‘실’을 중심으로 한 회장 1인 독점 체재를 구축하였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김영삼의 그 결단이 없었더라도 이건희는 부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단이 없었더라면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국 사회의 실질적인 권력자’도 있을 수 없었다.

정치학자의 관점에 기반해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미국 신문 기사'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노정태가 샤츠슈나이더를 동원한 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맑스를 동원하든 지젝을 동원하든 마찬가지다(한윤형의 비아냥과 관계없이, 논쟁에서 지젝이 이론적으로 동원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관점을 끌어왔다면 진지하게 살펴보고서 비판할 일 아닌가. 다만 삼성이 97년 IMF 구제금융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을 김영삼 정부의 노력 혹은 정치적 계산에서 찾는 건 분명 지나쳤다. 변수 하나는 될 수 있어도 '가장 큰 이유'는 될 수 없다. 삼성이 대우 그룹처럼 해체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고 살아 남은 대기업 중에서 '또 하나의 삼성'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일 게다.

5. 노정태와 한윤형은 '자본의 지배'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추상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지배'는 없다고 단언한다. 재벌 총수의 인격은 자본가 지배의 상징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를 인정한다 해도 두 사람이 간과하는 것이 있다. '자본가의 지배'는 참주정적(독점적)이라기보다는 과두정적(과점적)이라는 점이다. 한윤형은 글 마지막에 최장집의 '이중대응 전략'을 국가의 역할로 끌어 왔다(이 코포라티즘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과 노동자 조직의 강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한윤형은 이를 인지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최장집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겨냥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들 과두정적 수구 카르텔이라는 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여기서 제정(帝政) 로마를 은유로 끌어보자. 삼성은 과두정적 카르텔의 프린켑스princeps다. 제정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말대로 "권위auctoritas는 넘치나 권력potestas은 희박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말이야말로 홍명교가 말하는 '레토릭'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권위와 권력 모두 넉넉히 확보했던 것이다. 샤츠슈나이더의 관점이 한국 사회에 관철되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삼성을 가장 큰 머리로 하는 히드라의 경제 권력은 정치 권력과 무관할까? 경제인의 사면이 역대 정권과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빠르고, 4대강 사업과 미디어법, 제2 롯데월드 건설과 금산분리법안 통과에도 불구하고 정치 권력은 경제 권력을 압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대답 역시 "아니오."일 게다.

6. 한편, 노정태가 언급하는 삼성과 현대 사이의 갈등은 수구 카르텔 안에서의 경쟁 관계에 포함시킬 수 있다. 프린켑스 자리를 두고 귀족 가문 간에 갈등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절묘한 방식으로 결합하고 있다."는 추론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맑스주의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서술이기 때문이다(무엇보다 맑스주의에 대한 개념 폭이 넓다는 걸 간과하고 있다.). 다시 노정태의 첫번째 글로 돌아가자. 그는 글을 맺으며 "권력은 언제나 국민에게 있고, 그 국민들의 대표자들에게 있다. 다만 그 대표자들이 무능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부패할 때, 기업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이 마치 자신들이 국가를 운영하기라도 하는 양 월권행위를 저지를 뿐이다."라고 거듭 주장한다. 반MB를 외치는 노빠들(및 자유주의자)에 대한 비판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너무 순진하다. 이명박의 반(反)대기업 발언을 통해 노빠들의 행태를 비판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능력있는 사람이 집권할 때 기업 권력은 무력화된다는 '능력주의'로 이어진다. 이 능력주의야말로 우석훈의 표현에 따르자면 '이명박 시대' 개막의 공신 중 하나 아닌가. 반(反)노무현주의가 이명박 시대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역설이다.


* <다시,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