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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소설 단평

by parallax view 2010. 6. 18.
단 한 번이라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적어도 나는 없었다. 신앙을 갖고 있지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배워왔지만. 적어도 구원이 내 몸에 뚜렷이 새겨져 있음을 알지 못하는 한, 나는 구원을 모를 것이다. 무라카미 류의 『교코』(무라카미 류, 양억관 옮김 / 민음사, 1997)에는 몸에 구원을 새긴 소녀가 살고 있다. 여덟 살. 한 미군에게 배운 춤이 그녀를 구원했다. 그리고 스물 하나. 구원을 가르쳐 준 사람을 찾아 뉴욕으로 떠났다. 소설은 영화 <교코>를 재구성한 것인 듯하다. 무라카미 류 소설은 처음이다. 그가 말한 대로 『교코』에는 섹스도 마약도 없다. 사건은 평이하며, 로드무비 혹은 성장영화의 전형을 따른다. 소설은 약한 서사를 보충하기 위해 ‘시선’을 동원한다. 교코를 만나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시선이 엇갈리며 사건을 직조한다. 그리고 춤이 있다. 읽는 동안 쿠반 룸바Cuban Rumba와 차차차Cha Cha Cha를 몸으로 익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슬픔이란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그것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견딜 만한 것이다.” 이자크 디네센의 말이다. 처음에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한 말인 줄 알았고,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도 인용되었다는 게 새삼 떠올랐다. 이자크 디네센의 소설집 『바베트의 만찬』(이자크 디네센, 추미옥 옮김 / 문학동네, 2003)의 원제는 ‘운명의 일화’Anecdotes of Destiny이다(anecdote에는 기담(奇談)이라는 뜻도 있으니, 운명기담(運命奇談) 혹은 ‘기이한 운명의 이야기’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 이자크 디네센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이자 주인공(본명은 카렌 블릭센. 이자크 디네센은 필명이다.)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사전 지식은 별로 필요하지 않다. 그저 이야기의 손만 붙잡고도 가볍게 여행을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서, 우리 모두는 영웅이며 패배자다. 곳곳이 튼 손등과 목에 진 주름이 각자가 지낸 삶의 질곡을 드러낼 때, 이야기꾼은 그 질곡을 비범하게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야기꾼의 언어는 비약이며 도약이다. 현실을 비현실로 극화할 때 발생하는 아이러니irony, 그것이 이야기이고 문학이다. 이자크 디네센은 인물들이 품고 있는 어둠과 모순을 끄집어내고, 하나하나 정갈하게 모아 독자 앞에 진상한다.

저마다 자신만의 어둠을 품은 인간들-파리 꼬뮌 지지자이자 ‘위대한 예술가’인 바베트(「바베트의 만찬」), 연극 ‘템페스트’와 실제 폭풍우를 혼동한 말리(「폭풍우」), 냉정한 사업가의 얼굴 뒤로 존재에 대한 동정을 품은 엘리샤마(「불멸의 이야기」)-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 겹치면서 독특한 지층을 형성한다. 단편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로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점에서, 이 소설집은 또 다른 아라비안 나이트다. 간결한 문장에 담긴 비범한 이야기들이 귓가에 속살거린다. 슬픔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그래서 끝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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