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니에 대해 쓴 <시장을 사회에 착근시켜라 : 시장주의에 대한 오히려 급진적인 대안>은 서투르게 쓰여진 감이 있다. <한겨레21>의 기사들에 많은 부분을 의존한 탓일테고 기사에서도 약간 설레발을 치는 감이 있긴 하지만, <한겨레21>만을 탓할 순 없는 노릇이다. (관련기사 : <시장을 의심하는 당신 떠나라, 폴라니의 세계로>, <위기의 시대, 상상력의 원천>)
한편 이택광 님은 <장기판 좌파>에서, 칼 폴라니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반응을 못 미더워한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폴라니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품이 영 마뜩찮은가 보다(<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에서는 폴라니에 대해 어느 정도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솔직히 그런 의심과 경계도 이해가 된다. 우리 학계는 너무 쉽게 해외학풍에 영향을 받아왔고 설레발을 좀 많이 쳐왔단 얘기다. 몇년 전의 들뢰즈 유행이 그랬고, 그 이전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그랬다. 문제는 담론이 갖는 의미의 깊이와는 별개로, 담론 자체가 지식시장에서 단순히 소비되곤 한다는 것이다. 유행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비판적이고 심도있는 논의가 가능할텐데 아예 논의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실수(<해체주의와 그 이후>처럼)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폴라니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다. 특히나 경제학이 아직까지도 지식담론의 주류인 현재, "맑스 30년-케인스 30년-하이에크 30년을 뒤이을 대안 : 폴라니 30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또 얼마나 그럴싸해 보이는가. 그러나 막상 이를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건 아직 우리나라에서 폴라니를 제시하는 사람이 홍기빈 씨를 포함해서 몇 되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폴라니의 사상과 연구를 이해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반증일 것이다(아님 시시해보이던가...). 지식담론의 내외적인 조건이 이렇다면, 폴라니를 이해하기로는 오히려 적당한 시기일수도 있다. 폴라니도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비판정신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린 고민이 없는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테다.
칼 폴라니(1886-1964)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홍기빈 옮김/책세상, 2002)는 칼 폴라니의 짧은 글 7편과 <거대한 변형> 일부를 모아놓은 소책자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폴라니 소개서다. 폴라니가 자본주의와 국제정치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맛배기로 보여준달까. 책을 시작하는 칼럼인 <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1947)과 다음 장 <거대한 변형 중에서>(1944)는 사실 같은 이야기의 변주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가격을 매개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의 균등한 분배가 이뤄진다는 것(이를 자기조정시장이라고 부른다.)은 하나의 환상,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통찰에 따라, 폴라니 역시 자본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다. 시장이란 제조품을 거래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노동(인간), 자본(화폐), 토지(자연)는 원래 거래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과연 인간과 자연은 사고 팔리기 위해 태어났는가? 화폐라는 금속(종이)조각의 힘은 상품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구매력에 불과한데, 그것 역시 '자연적으로' 거래되기 위해 만들어졌는가? 이를 폴라니는 상품 허구(허구적 상품) Commodity Fiction 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시장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 요소를 생산에 편입시키면서 요소시장을 형성했고, 그 과정에서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상품-버젓이 생산의 3요소라는 간판을 달고서-이 되면서 소외가 발생하고,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자연은 파괴되며 화폐유통은 사회를 쇠퇴로 몰고 간다(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를 기점으로 여전히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경기후퇴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금융'(화폐의 매매)이라는 건 직관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러나 폴라니는 속류 맑스주의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경제결정론-를 피해가고 있다. 폴라니는 시장을 원천적으로 악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시장은 늘 존재해 왔으며, 그곳은 상품이 가격을 매개로 거래되는 장이다. 다만 사회에 묻어들어가 있기(착근, embeded) 때문에 현대사회처럼 모든 것이 시장의 법칙대로 굴러가지 않았을 뿐이다. 중세시대의 장원경제와 트로브리앙 제도의 쿨라 교역이 자본주의 경제와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나름대로 존재해 왔지만, 그건 사회의 전부가 아니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시장이 사회를 먹어치워버렸다. 이런 경향은 금본위제가 지탱하던 19세기 부르주아 세계가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붕괴되기 전까지 유럽과 미국의 주류이념으로 존재해 왔다. 시장의 법칙이 제대로 구현된다면 모두 잘 살게 될 거라는 공리주의적 유토피아가 인간에게 강요되는 현실과, 시장이 무제한적으로 자신을 확장하려는 경향을 파헤치기 위해 폴라니가 선택한 건 역사였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사논고>를 통해, 맑스가 <자본론>을 통해 당대의 고민을 풀어냈듯이. 그리고 그의 노력은 <거대한 변형>(1944)으로 맺어졌다.
폴라니가 미국으로 건너간 1947년 이후, 폴라니는 경제인류학 분야에서 독특한 자리를 점했다. 기존의 경제인류학이 주류경제학의 개념과 연구방법을 고스란히 가져와 자본주의 이전 시대를 연구했다면, 폴라니는 시장이 사회에 묻어들어가 있음을 증명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경제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폴라니는 일찌감치 학문 간의 경계를 넘나든 사람이었다. 그의 독특함은 세번째 관심분야인 국제정치에서 드러나 있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1945)는 구 소련의 지역주의 블록 형성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자칫 스탈린주의자로 오해받을 소지를 안고 있다. 폴라니는 평소의 입장을 고수하며 전지구적으로 팽창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2차 대전 이후 쇠퇴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여기에 승전국 소련과 영국이 세계질서를 재편하면서 세계경제가 지역적 계획경제로 나갈 경향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영국이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영연방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측이 전혀 어긋났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영국은 노동당이 전시연립내각과 전시계획경제 경험을 통해 보수당보다 높은 지지를 받아 집권에 성공했기 때문이다(<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참조). 소련은 산업생산력이 전후 승리의 탄력을 받아 나날이 높아가고 있었고, 이른바 자유세계에서도 복지국가 모델이 채택되어 1950년대~제1차 오일쇼크 이전까지 '황금시대'를 구가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미국의 세계질서에 편승했고, 뒤이은 보수당 정부가 그 노선을 이어가면서 폴라니의 구상도 힘을 잃었다. 그의 예견은, 꼭 정확하지는 않았더라도 "영국은 대외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은, 미합중국의 대륙 경제에나 적합한 낡은 체제, 즉 전 지구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안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동반자가 될 뿐이다" 라는 말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한편 그는 발칸반도의 민족주의 갈등이 시장체제와 결합함으로 인해 폭증하기 마련이고, 티토의 사회주의 정부가 지역 계획경제 운영으로 이 갈등을 조정해낼 것으로 기대했다. 티토와 공산당의 지배가 반드시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티토 사후 유고 연방이 분열되고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민족갈등('코소보 사태')이 극심해졌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폴라니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과시적 소비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한 토스타인 베블런과, 금본위제에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을 경고한 케인스(이 둘의 공통점은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케인스보다 먼저 재정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을 제시한 스웨덴 사민당 이론가 비그포르스 등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 또, 그는 뉴라나크에 사회주의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던 로버트 오웬의 자본주의 비판을 지지했다.
폴라니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가 꿈꾼 사회의 핵심은 상호부조와 호혜성, 즉 관계와 소통이다. 시장이 존속하되 사회에 묻어가며, 사회는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생존을 방치하지 않는 공동체. 폴라니는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1925)에서 노동조합-산업결사체-협동조합-사회주의 자치체와 정당이 연계된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지향했다(이 전략은 화끈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아 보이기 때문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올법하다.). 그러나 폴라니는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힘 관계가 어떤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춤을 추는가를 통찰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맑스주의자로 단정지을 수도 없고, 사회민주주의자도 아닌, 그저 사회주의자로 불리워질 수 밖에 없는 그의 비(非)경계성은 사람의 살림살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정파의 구분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고민도 던져준다. 폴라니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나의 점수 : ★★★
사람의 살림살이에 대한 고민.
서로 소통하면서 돕고 사는 세상이 과연 불가능할까요?
한편 이택광 님은 <장기판 좌파>에서, 칼 폴라니에 대한 몇몇 학자들의 반응을 못 미더워한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폴라니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품이 영 마뜩찮은가 보다(<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에서는 폴라니에 대해 어느 정도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솔직히 그런 의심과 경계도 이해가 된다. 우리 학계는 너무 쉽게 해외학풍에 영향을 받아왔고 설레발을 좀 많이 쳐왔단 얘기다. 몇년 전의 들뢰즈 유행이 그랬고, 그 이전의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그랬다. 문제는 담론이 갖는 의미의 깊이와는 별개로, 담론 자체가 지식시장에서 단순히 소비되곤 한다는 것이다. 유행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비판적이고 심도있는 논의가 가능할텐데 아예 논의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실수(<해체주의와 그 이후>처럼)가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폴라니도 비슷한 전철을 밟을 위험이 있다. 특히나 경제학이 아직까지도 지식담론의 주류인 현재, "맑스 30년-케인스 30년-하이에크 30년을 뒤이을 대안 : 폴라니 30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또 얼마나 그럴싸해 보이는가. 그러나 막상 이를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건 아직 우리나라에서 폴라니를 제시하는 사람이 홍기빈 씨를 포함해서 몇 되지 않은데다, 무엇보다 폴라니의 사상과 연구를 이해하는 사람이 그만큼 적다는 반증일 것이다(아님 시시해보이던가...). 지식담론의 내외적인 조건이 이렇다면, 폴라니를 이해하기로는 오히려 적당한 시기일수도 있다. 폴라니도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비판정신과,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린 고민이 없는 사람들에게 소비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테다.
칼 폴라니(1886-1964)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홍기빈 옮김/책세상, 2002)는 칼 폴라니의 짧은 글 7편과 <거대한 변형> 일부를 모아놓은 소책자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폴라니 소개서다. 폴라니가 자본주의와 국제정치경제를 바라보는 시각을 맛배기로 보여준달까. 책을 시작하는 칼럼인 <낡은 것이 된 우리의 시장적 사고방식>(1947)과 다음 장 <거대한 변형 중에서>(1944)는 사실 같은 이야기의 변주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가격을 매개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소득의 균등한 분배가 이뤄진다는 것(이를 자기조정시장이라고 부른다.)은 하나의 환상,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맑스의 자본주의 통찰에 따라, 폴라니 역시 자본주의에 매우 비판적이다. 시장이란 제조품을 거래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노동(인간), 자본(화폐), 토지(자연)는 원래 거래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과연 인간과 자연은 사고 팔리기 위해 태어났는가? 화폐라는 금속(종이)조각의 힘은 상품과의 관계에서 파생된 구매력에 불과한데, 그것 역시 '자연적으로' 거래되기 위해 만들어졌는가? 이를 폴라니는 상품 허구(허구적 상품) Commodity Fiction 라는 개념으로 제시한다. 시장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 요소를 생산에 편입시키면서 요소시장을 형성했고, 그 과정에서 상품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상품-버젓이 생산의 3요소라는 간판을 달고서-이 되면서 소외가 발생하고, 인간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자연은 파괴되며 화폐유통은 사회를 쇠퇴로 몰고 간다(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사태를 기점으로 여전히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경기후퇴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금융'(화폐의 매매)이라는 건 직관을 강하게 자극한다.).
그러나 폴라니는 속류 맑스주의가 갖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경제결정론-를 피해가고 있다. 폴라니는 시장을 원천적으로 악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시장은 늘 존재해 왔으며, 그곳은 상품이 가격을 매개로 거래되는 장이다. 다만 사회에 묻어들어가 있기(착근, embeded) 때문에 현대사회처럼 모든 것이 시장의 법칙대로 굴러가지 않았을 뿐이다. 중세시대의 장원경제와 트로브리앙 제도의 쿨라 교역이 자본주의 경제와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나름대로 존재해 왔지만, 그건 사회의 전부가 아니었다. 지금은 정반대다. 시장이 사회를 먹어치워버렸다. 이런 경향은 금본위제가 지탱하던 19세기 부르주아 세계가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붕괴되기 전까지 유럽과 미국의 주류이념으로 존재해 왔다. 시장의 법칙이 제대로 구현된다면 모두 잘 살게 될 거라는 공리주의적 유토피아가 인간에게 강요되는 현실과, 시장이 무제한적으로 자신을 확장하려는 경향을 파헤치기 위해 폴라니가 선택한 건 역사였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사논고>를 통해, 맑스가 <자본론>을 통해 당대의 고민을 풀어냈듯이. 그리고 그의 노력은 <거대한 변형>(1944)으로 맺어졌다.
폴라니가 미국으로 건너간 1947년 이후, 폴라니는 경제인류학 분야에서 독특한 자리를 점했다. 기존의 경제인류학이 주류경제학의 개념과 연구방법을 고스란히 가져와 자본주의 이전 시대를 연구했다면, 폴라니는 시장이 사회에 묻어들어가 있음을 증명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경제학자이자 인류학자인 폴라니는 일찌감치 학문 간의 경계를 넘나든 사람이었다. 그의 독특함은 세번째 관심분야인 국제정치에서 드러나 있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1945)는 구 소련의 지역주의 블록 형성을 옹호했다는 점에서 자칫 스탈린주의자로 오해받을 소지를 안고 있다. 폴라니는 평소의 입장을 고수하며 전지구적으로 팽창하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2차 대전 이후 쇠퇴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여기에 승전국 소련과 영국이 세계질서를 재편하면서 세계경제가 지역적 계획경제로 나갈 경향이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 글을 통해 영국이 소련과 미국 사이에서 영연방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측이 전혀 어긋났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당시 영국은 노동당이 전시연립내각과 전시계획경제 경험을 통해 보수당보다 높은 지지를 받아 집권에 성공했기 때문이다(<보수정치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참조). 소련은 산업생산력이 전후 승리의 탄력을 받아 나날이 높아가고 있었고, 이른바 자유세계에서도 복지국가 모델이 채택되어 1950년대~제1차 오일쇼크 이전까지 '황금시대'를 구가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는 미국의 세계질서에 편승했고, 뒤이은 보수당 정부가 그 노선을 이어가면서 폴라니의 구상도 힘을 잃었다. 그의 예견은, 꼭 정확하지는 않았더라도 "영국은 대외 교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은, 미합중국의 대륙 경제에나 적합한 낡은 체제, 즉 전 지구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안에서 아무런 힘도 없는 동반자가 될 뿐이다" 라는 말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한편 그는 발칸반도의 민족주의 갈등이 시장체제와 결합함으로 인해 폭증하기 마련이고, 티토의 사회주의 정부가 지역 계획경제 운영으로 이 갈등을 조정해낼 것으로 기대했다. 티토와 공산당의 지배가 반드시 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티토 사후 유고 연방이 분열되고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민족갈등('코소보 사태')이 극심해졌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폴라니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과시적 소비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한 토스타인 베블런과, 금본위제에 기반한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을 경고한 케인스(이 둘의 공통점은 싸가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케인스보다 먼저 재정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을 제시한 스웨덴 사민당 이론가 비그포르스 등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 또, 그는 뉴라나크에 사회주의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던 로버트 오웬의 자본주의 비판을 지지했다.
폴라니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꿨다. 그가 꿈꾼 사회의 핵심은 상호부조와 호혜성, 즉 관계와 소통이다. 시장이 존속하되 사회에 묻어가며, 사회는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의 생존을 방치하지 않는 공동체. 폴라니는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1925)에서 노동조합-산업결사체-협동조합-사회주의 자치체와 정당이 연계된 상호부조의 공동체를 지향했다(이 전략은 화끈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아 보이기 때문에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올법하다.). 그러나 폴라니는 단순한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힘 관계가 어떤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춤을 추는가를 통찰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맑스주의자로 단정지을 수도 없고, 사회민주주의자도 아닌, 그저 사회주의자로 불리워질 수 밖에 없는 그의 비(非)경계성은 사람의 살림살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정파의 구분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하는 고민도 던져준다. 폴라니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외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책세상
나의 점수 : ★★★
사람의 살림살이에 대한 고민.
서로 소통하면서 돕고 사는 세상이 과연 불가능할까요?
'Read & Think' 카테고리의 다른 글
[렛츠리뷰] 시사인 제84호 (10) | 2009.05.02 |
---|---|
칼 폴라니 : 서평에서 못다한 이야기 (32) | 2009.04.15 |
시장을 사회에 착근시켜라 : 시장주의에 대한 오히려 급진적인 대안 (68) | 2009.03.27 |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 (18) | 2009.03.21 |
대한민국 표류기 (8) | 2009.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