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유원의 『인문 古典 강의』(강유원 / 라티오, 2010)는 제목 그대로 강의록이다. 2009년 2월부터 11월까지 동대문구정보화도서관에서 진행한 고전 읽기 강의가 수록되어 있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강의인 만큼, 용어도 가능한 풀어 쓰고 예를 들어 말하고 있어 읽기에 무척 수월하다. 말이 곧 글이 되는 사례를 찾는다면 강유원이 그럴 것이다.
2. 강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공자의 『논어』까지 다루고 있다. 강유원은 서양의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동양의 고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문학적 교양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문학적 교양인'이란 상황에 따라 올바른 것을 감지할 수 있는 힘, 구체와 추상을 구별할 수 있는 감각, 역사적 맥락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시야, 언어 표현의 미묘함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p.15)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읽고 있으니 벅차다. 이런 인간이라니, 가능은 할까? 그러나 강유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빌어, 비록 도달하기 어려워보일지라도 마땅히 인문학적 교양인의 길을 추구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p.183)
3. 내가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강유원의 『군주론』 해석이다.
우선 똑같은 사람이 어떤 책에서는 공화주의를 옹호하고 다른 책에서는 독재를 옹호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는 사람은 허다하지만 그런 사람이 책까지 써가면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경우란 없습니다. (…)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공화국이냐 군주국이냐 하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누가 나라를 설립하고 어떻게 개혁하고 유지하는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사 논고》에는 그가 《군주론》에서 펼쳐보인 군주의 모습에 걸맞거나 어긋나는 사례들이 담겨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p.272)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보다 병법가 마키아벨리 쪽에 무게를 두는 해석이다. 강유원이 바라보는 마키아벨리는 차라리 손자(孫子)나 한비자(韓非子)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한비자와 자주 비교되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묘한 엇갈림이 있다.
자유로운 생활양식에 익숙해진 도시국가의 지배자가 된 자로서 그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는 자는 누구나 그 도시에 의해서 자신이 파멸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도시는 반란을 일으킬 때, 시간의 흐름과 새로운 통치자가 부여한 이득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 자유의 정신과 고래의 제도를 항상 명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공화국에는 더 많은 활력, 더 많은 증오, 복수에 대한 강렬한 집념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유를 쉽게 잊지 못하며, 실로 잊을 수도 없다. 따라서 확실한 방법은 그 나라들을 파괴해버리거나 아니면 직접 그곳에 살면서 다스리는 것이다. (『군주론』 p.36-37)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사실상 '살해'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자. 이토록 위협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공화국은 금세 부활할 것이다. 도시의 지배자가 자신의 도시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건 모순이다. 군주론의 저 대목은 한 번 '자유'를 몸으로 겪은 시민을 억압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역사가 퀜틴 스키너는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에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해석한다. 『군주론』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로마사 논고』는 자유Libertas의 획득과 유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새로운 인간'인 군주에 대비되는 인민(혹은 민중, 시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해석은 그에 대한 논쟁의 여지를 더욱 확대시킨다.
그렇다면 나는 인민이 권력을 잡으면 동요하기 쉽고, 변덕이 심하며 배은망덕하다는 통상적인 의견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과오에서 인민이 개별 군주와 다르지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민과 군주를 동등하게 비난하는 자들은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비난을 함에 있어 군주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속이는 셈이다. 왜냐하면 잘 정비된 제도를 통해 명령을 내리는 인민은 군주만큼이나 침착하고 신중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로마사 논고』 p.250)
강유원의 마키아벨리 해석은 『군주론』에 대한 상식적인 해석에 치우쳐 있다. 두 문헌 사이의 결의 차이를 무시하고 『로마사 논고』를 『군주론』의 사례 모음집 정도로 격하시켜, 마키아벨리 사상의 역동성 역시 간과하고 있지 않을까.
4.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부터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까지는 강의 시간을 빠듯하게 돌리느라 주마간산 격으로 넘어간 느낌이 든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근대 사상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소유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는지(로크의 『통치론』), 근대 정치는 어째서 악마성을 띠고 있는지(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효율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사회(즉, 우리 사회)의 시초가 왜 하필 '감옥'이었는지(벤담의 『파놉티콘』)를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뒤에 강의록을 펼쳐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꾸로 강의록을 나침반 삼아 고전을 탐색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마지막 고전을 공자의 『논어』로 정한 것이 특이하다. 유학(儒學)하면 떠오르는 고루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논어』일까? 여기서 강유원은 지식인의 자세를 되짚어 보자고 주장한다.
수구 세력은 사문을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옛것만 목숨걸고 지키는 것이 보수주의는 아닙니다. 고전을 읽는 우리들은 모두 보수주의자입니다. 과거의 문화를 전수받기 위해서 고전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수받는 것이 없으면 새로운 것도 허망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실존주의자들에게는 전통이 무의미합니다. 주체의 실존이 오늘 처한 상황에서 결단하는 것이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와 대극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좌파가 아니라 실존주의자들입니다. (p.552)
고전을 읽는 사람은 지적 보수주의자로서의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변혁을 꿈꾸는 사람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실존주의자는 근대인이다.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속에 녹아버리도록 만드는 힘. 그 힘이 곧 근대성이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근대인이다(leopord, <현대성의 경험>).
6. 강유원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를 거쳐 다시 고대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은 사람, 인문학적 교양을 쌓은 사람을 '세상의 어려움을 겪은 소년'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파괴되고 재편되는 세계에서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급진적인 동시에 보수적인 시도이다. 레닌도 재해석되는 시대에 고전은 더 말할 것 없을 게다. 근대인을 벗어나 '다른 인간', '세상의 어려움을 겪은 소년'이 되는 경험.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삶.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계발서를 읽는다는 것과 다른 행위이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고전 읽기가 '자기계발하는 신체'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수 있을까?
2. 강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공자의 『논어』까지 다루고 있다. 강유원은 서양의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동양의 고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문학적 교양인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인문학적 교양인'이란 상황에 따라 올바른 것을 감지할 수 있는 힘, 구체와 추상을 구별할 수 있는 감각, 역사적 맥락에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는 시야, 언어 표현의 미묘함을 감별할 수 있는 능력(p.15)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읽고 있으니 벅차다. 이런 인간이라니, 가능은 할까? 그러나 강유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빌어, 비록 도달하기 어려워보일지라도 마땅히 인문학적 교양인의 길을 추구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다.
'인간이니 인간적인 것을 생각하라', 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죽을 수밖에 없는 것들을 생각하라'고 권고하는 사람들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우리들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도록, 또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이 최고의 것이 크기에서는 작다 할지라도, 그 능력과 영예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p.183)
3. 내가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강유원의 『군주론』 해석이다.
우선 똑같은 사람이 어떤 책에서는 공화주의를 옹호하고 다른 책에서는 독재를 옹호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한 입 가지고 두 말 하는 사람은 허다하지만 그런 사람이 책까지 써가면서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경우란 없습니다. (…)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공화국이냐 군주국이냐 하는 정치체제가 아니라 '누가 나라를 설립하고 어떻게 개혁하고 유지하는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사 논고》에는 그가 《군주론》에서 펼쳐보인 군주의 모습에 걸맞거나 어긋나는 사례들이 담겨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p.272)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보다 병법가 마키아벨리 쪽에 무게를 두는 해석이다. 강유원이 바라보는 마키아벨리는 차라리 손자(孫子)나 한비자(韓非子)에 가깝다. 마키아벨리가 한비자와 자주 비교되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마키아벨리가 공화국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묘한 엇갈림이 있다.
자유로운 생활양식에 익숙해진 도시국가의 지배자가 된 자로서 그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는 자는 누구나 그 도시에 의해서 자신이 파멸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도시는 반란을 일으킬 때, 시간의 흐름과 새로운 통치자가 부여한 이득에도 불구하고 결코 잊혀지지 않는 자유의 정신과 고래의 제도를 항상 명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공화국에는 더 많은 활력, 더 많은 증오, 복수에 대한 강렬한 집념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자유를 쉽게 잊지 못하며, 실로 잊을 수도 없다. 따라서 확실한 방법은 그 나라들을 파괴해버리거나 아니면 직접 그곳에 살면서 다스리는 것이다. (『군주론』 p.36-37)
여기서 마키아벨리는 공화국을 사실상 '살해'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자. 이토록 위협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공화국은 금세 부활할 것이다. 도시의 지배자가 자신의 도시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건 모순이다. 군주론의 저 대목은 한 번 '자유'를 몸으로 겪은 시민을 억압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역사가 퀜틴 스키너는 『근대 정치사상의 토대 1』에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해석한다. 『군주론』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로마사 논고』는 자유Libertas의 획득과 유지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새로운 인간'인 군주에 대비되는 인민(혹은 민중, 시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해석은 그에 대한 논쟁의 여지를 더욱 확대시킨다.
그렇다면 나는 인민이 권력을 잡으면 동요하기 쉽고, 변덕이 심하며 배은망덕하다는 통상적인 의견과 다른 결론을 내리고 싶다. 왜냐하면 나는 그러한 과오에서 인민이 개별 군주와 다르지 않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민과 군주를 동등하게 비난하는 자들은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비난을 함에 있어 군주를 제외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속이는 셈이다. 왜냐하면 잘 정비된 제도를 통해 명령을 내리는 인민은 군주만큼이나 침착하고 신중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때문이다. (『로마사 논고』 p.250)
강유원의 마키아벨리 해석은 『군주론』에 대한 상식적인 해석에 치우쳐 있다. 두 문헌 사이의 결의 차이를 무시하고 『로마사 논고』를 『군주론』의 사례 모음집 정도로 격하시켜, 마키아벨리 사상의 역동성 역시 간과하고 있지 않을까.
4.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부터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까지는 강의 시간을 빠듯하게 돌리느라 주마간산 격으로 넘어간 느낌이 든다.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근대 사상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데카르트의 『방법서설』), 소유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는지(로크의 『통치론』), 근대 정치는 어째서 악마성을 띠고 있는지(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효율성과 합리성에 기반한 사회(즉, 우리 사회)의 시초가 왜 하필 '감옥'이었는지(벤담의 『파놉티콘』)를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다. 고전을 직접 읽는 것이 가장 좋고, 그 뒤에 강의록을 펼쳐 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거꾸로 강의록을 나침반 삼아 고전을 탐색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 마지막 고전을 공자의 『논어』로 정한 것이 특이하다. 유학(儒學)하면 떠오르는 고루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논어』일까? 여기서 강유원은 지식인의 자세를 되짚어 보자고 주장한다.
수구 세력은 사문을 영원히 불변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옛것만 목숨걸고 지키는 것이 보수주의는 아닙니다. 고전을 읽는 우리들은 모두 보수주의자입니다. 과거의 문화를 전수받기 위해서 고전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수받는 것이 없으면 새로운 것도 허망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실존주의자들에게는 전통이 무의미합니다. 주체의 실존이 오늘 처한 상황에서 결단하는 것이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보수주의자와 대극점에 서 있는 사람들은 좌파가 아니라 실존주의자들입니다. (p.552)
고전을 읽는 사람은 지적 보수주의자로서의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변혁을 꿈꾸는 사람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실존주의자는 근대인이다. 견고한 모든 것을 대기 속에 녹아버리도록 만드는 힘. 그 힘이 곧 근대성이고,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근대인이다(leopord, <현대성의 경험>).
6. 강유원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를 거쳐 다시 고대로 돌아오는 과정을 겪은 사람, 인문학적 교양을 쌓은 사람을 '세상의 어려움을 겪은 소년'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쉽게 파괴되고 재편되는 세계에서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은 급진적인 동시에 보수적인 시도이다. 레닌도 재해석되는 시대에 고전은 더 말할 것 없을 게다. 근대인을 벗어나 '다른 인간', '세상의 어려움을 겪은 소년'이 되는 경험.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중 최고의 것에 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삶.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계발서를 읽는다는 것과 다른 행위이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고전 읽기가 '자기계발하는 신체'에서 벗어나는 길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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