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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독서와 학문

by parallax view 2009. 5. 6.
1.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난 학문에 뜻이 있는 게 아니라 마냥 책이 좋을 뿐인 게 아닐까 싶다.

2. 학문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재능. 가정의 후원. 본인의 의지. 여러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정말로 필요한 건 끈기다. 오로지 주제 하나 잡고서 끈덕지게 달려드는 집념과 그걸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엉덩이. 그래서 모름지기 학자는 엉덩이를 소중히 해야... (응?) 김우재는 흔히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에 대해 20년은 공부해야 인문학자 소리를 듣는다는 말을 하면서 끈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과학의 정통적인 공부법>). 즉, 어떤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가고, 근본적인 부분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다. 공부에 왕도가 없다지만, 사실 이런 게 왕도다. 니체를 논하려면 칸트부터 읽어야 되고, 먼저 플라톤이랑 댓거리해야 된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도 아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정말 맞는 건지, 내가 한 말은 역사속 혹은 세계중 누군가가 이미 꺼낸 말이 아닌지. 인터넷이 좋은 건 바로 그걸 확인하고 교정하고 보완할 여지가 좀 더 많다는 점이다. 거꾸로 말해서 살짝 잘못 말해도 밑천이 바로 뽀록난다는 말이기도 하다.

3. 지금이야 학생이라는 포지션에 있기에 어느 정도 아카데믹한(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글-누군가에 대한 크리틱을 포함해서-을 쓸 수 있겠지만,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는 이상 그런 분위기는 점차 사라질 것이다. 아무래도 글이란 삶을 반영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만큼 유연해지고 능란해질 수 있겠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학구적인 정치(精緻)함은 사라진다는 말이다(periskopsonnet 같은 분들은 정말로 훌륭한 예외케이스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나는 제네럴리스트 Generalist는 되도, 스폐셜리스트 Specialist는 좀 힘들지 않나 싶다. 스스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취하는 관점이 보편적인 부분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고. 그런데 제네럴한 글쓰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말 그대로 특정분야에 대한 지식이 얕다. 즉, 제네럴리스트가 얕고 넓다면, 스페셜리스트는 깊고 좁다. 포스트모던 중인(나는 그게 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제네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사이의 구분마저 모호해지고 있다지만, 여전히 둘 사이의 간격은 깊고 넓다. 그 부분이 슬슬 고민된다.

4. 보통 기자는 제네럴리스트고, 학자는 스페셜리스트라고 한다. 근대 학문을 포함해 모든 것이 전문화·세분화된 사회의 자연스런 역할분담이다. 이는 고대사회의 무경계성과 사통팔달함과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새삼 고대와 중세가 주목되는 이유는 경계가 사라지는 현대를 고스란히 반영하면서도 고대의 당대성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계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다. 여전히 근대의 자식인 학자들은 고대사회의 다층성과 풍부함을 알아보는 것이 난감하다(사료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지만.).

5. 그럼에도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다종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쏟아져나온다는 것은 축복이다. 동시에 재앙이다. 지식과 정보는 어디서 무얼 어떻게 취할 것이냐는 방법론을 독자다중에게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지식인에 준하는 지식인, 학자에 준하는 학자, 기자에 준하는 기자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걸 다중지성이라고 속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지식의 속류화는 엘리트를 위협하지만, 그 속류화는 엘리트주의를 되려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들에겐 시간이 없다. 진득하니 책상머리에 붙어앉아 엉덩이를 단련할 시간과 금전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크릿> 같은 책은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대신 쉽고 빠르게 세상의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유혹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수를 담은 듯한 이런 자기개발서가 여전히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은 시대의 관성과 함께 다중지성이란 개념에 손쉽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속류적 지식이란 그 어떤 것보다 지배적인 관습을 반영한다.

6. 여전히 체계적인 독서보다 폭넓은 독서에 관심이 끌리기에, 분야는 다양해지고 (가뜩이나 없는) 깊이는 좁아지는 것 같다. 요즘은 로널드 사임의 <로마혁명사>(1939)를 읽고 있는데, 에이드리언 골즈워디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2000)에서 카이사르의 다중성과 불분명한 의도를 조심스럽게 제시하는 데에는 사임의 그늘이 있다고 봐야 한다. 사임은 로마 공화정의 과두정적인 성격에 주목한다. 로마 과두정은 귀족가문 간의 갈등과 알력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고대사회의 정치제도란 근대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클리엔텔라이와 같이 인격적인 관계와 계약적인 관계가 혼재해 있다.). 우리는 결과로서 역사를 바라보지만, 역사가에겐 그 시대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 과제가 있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라는 카(E.H.Carr)의 진술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다. 역사란 결과와 과정(당대성) 사이의 전쟁이다.

7. 그나마 진득하니 붙을 수 있는 관심거리는 로마사 정도인 것 같다. 경제학은 솔직히 두번째. 무엇보다 고전학습과 주류경제학 학습이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게 명백해진 상태에서(꼭 <경제학에서 교과서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경제학과 수업 반년만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좀 애매한 기분이 든다. 재밌는 건 그럼에도 교수님들은 학생들이 A.스미스의 <국부론> 정도는 읽었으면 싶어하는 것 같다는 거다. 내 생각이지만 그러려면 한 학기당 <국부론> 강의 하나쯤은 개설해줘야 할 것 같다. 단지 학생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국부론>이 포괄하고 있는 경제사·사회사적인 부분과, A.마샬 이전의 비(非)수학적인 경제기술과 현대 경제학의 수학적인 기술을 매치시키는 부분(현대 경제학은 얼마든지 매치시킬 수 있다고 자부하겠지만)이 없으면 경제학과 학생들에게 읽으려는 유인이 되기 힘들지 않을까.

8. 독서와 학문은 별개다. 많이 아는 것과 체계적으로 아는 것이 서로 다르듯이. 이는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사람의 삶을 만들어나간다. 그렇다면 이 기로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물론 나의 조건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전자다. 고민은 지식과 정보가 과다하게 뿜어져 나오는 시대에, 나의 지식을, 밑천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다. 속류적인 지식과 함께 하면서도 그에 휩쓸리지 않을 방법. 그건 끈기 없는 나에게 엉덩이를 부단히 단련시키라는 정언명령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