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앞서 이야기한 칼 폴라니의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2002) 서평에서 못다한 것들에 대해.
1. 지난 서평에서 묘사된 폴라니는 자칫하면 조합주의자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노동조합-생활협동조합-공정무역-사회적 기업-지방자치단체-진보정당을 엮는 풀뿌리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대안'은 <한겨레21>에서 일부 제시했지만, 사실 그건 폴라니가 중점적으로 제시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겨레21>의 설레발에 발이 묶인 셈이 되었는데 그 정도 착오야 감내하겠다.
2.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소책자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에서 제시한 노동조합-산업결사체-소비자협동조합(생협)-사회주의적 자치단체-사회주의 정당의 연계란, 1920년대 당시 유럽 각국에 널리 퍼져있던 노동세력 조직을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전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전략은 당대의 현실과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역 풀뿌리 공동체 전략은 낡은 것이니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폴라니는 조망이라는 개념-독일 관념론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을 통해 사람의 살림살이가 시장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인간의 욕구와 노동의 노고, 정신적인 보상을 챙겨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앙집권적) 관치 계획경제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부가 통계와 조직을 무기로 경제를 계획해 나갈 때, 시장경제가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치 계획경제 또한 마찬가지 잘못을 저지를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각각의 노동주체가 자신의 삶의 영역(노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표현하고 자신과 자기 조직을 조망해야만 민주적인 내적감시가 활발해져 민주적인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아이디어는 기존의 조직을 재해석하고 재활용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그의 주장은 소책자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오토 바우어가 주장한 기능적 민주주의의 연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현재의 금융위기 국면에, 중앙집권적 토건국가 대한민국에 액면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응용과 변형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노동조합(민주노총 등)과 생산자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이 있고 공정무역의 무역량은 증가하고 있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하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물며 이들 간의 연계는 더더욱 먼 길이다. 인터넷과 빠르고 폭넓은 정보유통이 있으니 그나마 1920년대 유럽보다 나은 조건이라고 하겠다.
3. 폴라니의 강점은 <거대한 변형>을 비롯한 경제인류학적 연구에 있다. 인간이 상품으로 거래됨으로써 발생하는 소외에 맞서기 위해 시장과 사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명하는 시도는, 시장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기 이전에 시장 신화를 먼저 공격하고 깨뜨림으로써 대안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는 노력과 병행할 때 의미가 있다. 한편 이택광 님은 "최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칼 폴라니를 거론하는 이들도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폴라니의 정체성을 '경제학자'라는 포장으로 덮기에 바쁠 뿐, 그 비슷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온 인문학의 목소리에 그닥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고 비판했다(<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폴라니를 읽어냄에 있어서 경제학과 인류학(이를 인문학 일반으로 넓혀도 좋은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을 따로 구분하기란 사실 어렵다. 폴라니의 자본주의 비판은 경제학자보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가 받아들이기 쉬운 부분이 더 많다는 것도 생각해 봐야한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무역과 근대 국제무역을 비교했을 때 상(商)에 대한 관점과 사회적 기반이 다르다는 고찰은 역사학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소재이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아이디어를 주신 한단인 님 ㄳ). 폴라니가 너무 경제학자라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현상과, 학자들의 '설레발'에 대한 짙은 피로감은 이해가 되지만 말이다.
4. 당대(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여느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폴라니 역시 점점 심화되고 강화되는 자유시장경제와 대중정치 사이의 충돌을 걱정하고 있었다. 폴라니는 근대 이전까지의 사회와 시장 사이의 관계가 근대에 들어서 역전됨에 따라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발생하고, 사회의 자기보호운동과 시장의 자기조정능력이 충돌함으로써 19세기 세계가 이중적 운동으로 굴러왔다고 분석한다. 문제는 이중적 운동이 헤겔적인 변증법(정-반-합)의 발전 구도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가 걱정한 건 두 세력의 충돌 자체가 아니라, 두 세력 간의 교착상태였다. 폴라니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에 반드시 진보세력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토지귀족의 부르주아 계급 견제와 같이), 극도의 비인간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장 자본주의는 결국 파시즘으로 흘러갈 것을 두려워했다. 자기실현적 우려였을까. 파시즘은 현실화되었고 그가 활동하던 오스트리아도 파시즘에 침식당해버렸다.
5. 폴라니의 궁극적인 고민이 사람다운 삶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특히 청년 맑스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파헤친, 상품생산과정에서 인간이 노동으로 바뀌면서 소외되어간다는 지적에 동의하고, 물질적인 만족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만족까지 충족되어야 참다운 삶이라고 보았다. 폴라니는 (비록 아버지의 뜻이긴 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고, 종교적 영성이 인간의 삶에 주는 힘을 소중히 여겼다. 맑스주의에 대한 소고와 강의록을 모아놓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 마지막에는 폴라니의 맑스 비판이 눈에 띈다. 맑스는 종교의 힘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종교 자체를 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또, 맑스의 정치·종교 비판이 미국과 캐나다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미국이 건국 때부터 의회정치를 시작했듯이-을 통해, 폴라니는 맑스는 천상 유럽인이었다고 지적한다(비슷한 지적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도 나타난다.).
6. 성장에 집착하지 말고, 소비에 너무 빠져들지 않기. 폴라니의 시장경제 비판을 실천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부분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표류기>에서, 또 블로그에서 허지웅이 여러 번 강조하는,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대안'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한편, 한윤형은 <이택광과 칼 폴라니 논쟁, 그리고 독해의 문제>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체제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대중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데에 그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이고, 또 폴라니 역시 그런 지식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안이란 비판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니만큼 그걸 대중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도 어딘가 궁색해 보인다. 유일한 대안도, 진정한 대안도 없다. 그러나 대안의 새싹은 비판이라는 밑거름이 있어야 싹틀 수 있다. 시장이 사회를 잡아먹고, 금융이 실물을 잡아먹고, 기득권층이 서민을 잡아먹는 시대. 폴라니는 더 나은 싹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 같다.
1. 지난 서평에서 묘사된 폴라니는 자칫하면 조합주의자 정도로 밖엔 보이지 않을 위험이 있었다. 노동조합-생활협동조합-공정무역-사회적 기업-지방자치단체-진보정당을 엮는 풀뿌리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대안'은 <한겨레21>에서 일부 제시했지만, 사실 그건 폴라니가 중점적으로 제시한 대안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겨레21>의 설레발에 발이 묶인 셈이 되었는데 그 정도 착오야 감내하겠다.
2.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소책자 <우리의 이론과 실천에 대한 몇 가지 의견들>에서 제시한 노동조합-산업결사체-소비자협동조합(생협)-사회주의적 자치단체-사회주의 정당의 연계란, 1920년대 당시 유럽 각국에 널리 퍼져있던 노동세력 조직을 최대한 잘 활용하자는 전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전략은 당대의 현실과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역 풀뿌리 공동체 전략은 낡은 것이니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폴라니는 조망이라는 개념-독일 관념론의 냄새가 나긴 하지만-을 통해 사람의 살림살이가 시장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인간의 욕구와 노동의 노고, 정신적인 보상을 챙겨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중앙집권적) 관치 계획경제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부가 통계와 조직을 무기로 경제를 계획해 나갈 때, 시장경제가 인간의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치 계획경제 또한 마찬가지 잘못을 저지를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각각의 노동주체가 자신의 삶의 영역(노동조합, 생활협동조합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기자신의 인간적 욕구를 표현하고 자신과 자기 조직을 조망해야만 민주적인 내적감시가 활발해져 민주적인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아이디어는 기존의 조직을 재해석하고 재활용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새롭지는 않다. 그의 주장은 소책자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오토 바우어가 주장한 기능적 민주주의의 연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을 현재의 금융위기 국면에, 중앙집권적 토건국가 대한민국에 액면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응용과 변형이 필요하다. 물론 우리에게도 노동조합(민주노총 등)과 생산자조합과 생활협동조합이 있고 공정무역의 무역량은 증가하고 있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제시하기까지는 여전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하물며 이들 간의 연계는 더더욱 먼 길이다. 인터넷과 빠르고 폭넓은 정보유통이 있으니 그나마 1920년대 유럽보다 나은 조건이라고 하겠다.
3. 폴라니의 강점은 <거대한 변형>을 비롯한 경제인류학적 연구에 있다. 인간이 상품으로 거래됨으로써 발생하는 소외에 맞서기 위해 시장과 사회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조명하는 시도는, 시장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하기 이전에 시장 신화를 먼저 공격하고 깨뜨림으로써 대안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려는 노력과 병행할 때 의미가 있다. 한편 이택광 님은 "최근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칼 폴라니를 거론하는 이들도 '인문학자'이기도 했던 폴라니의 정체성을 '경제학자'라는 포장으로 덮기에 바쁠 뿐, 그 비슷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해온 인문학의 목소리에 그닥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다"고 비판했다(<폴라니, 그리고 인문학의 개입>). 폴라니를 읽어냄에 있어서 경제학과 인류학(이를 인문학 일반으로 넓혀도 좋은지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을 따로 구분하기란 사실 어렵다. 폴라니의 자본주의 비판은 경제학자보다 역사학자나 인류학자가 받아들이기 쉬운 부분이 더 많다는 것도 생각해 봐야한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무역과 근대 국제무역을 비교했을 때 상(商)에 대한 관점과 사회적 기반이 다르다는 고찰은 역사학자들에게 이미 익숙한 소재이기 때문이다(그런 점에서 아이디어를 주신 한단인 님 ㄳ). 폴라니가 너무 경제학자라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현상과, 학자들의 '설레발'에 대한 짙은 피로감은 이해가 되지만 말이다.
4. 당대(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여느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폴라니 역시 점점 심화되고 강화되는 자유시장경제와 대중정치 사이의 충돌을 걱정하고 있었다. 폴라니는 근대 이전까지의 사회와 시장 사이의 관계가 근대에 들어서 역전됨에 따라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이 발생하고, 사회의 자기보호운동과 시장의 자기조정능력이 충돌함으로써 19세기 세계가 이중적 운동으로 굴러왔다고 분석한다. 문제는 이중적 운동이 헤겔적인 변증법(정-반-합)의 발전 구도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가 걱정한 건 두 세력의 충돌 자체가 아니라, 두 세력 간의 교착상태였다. 폴라니는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에 반드시 진보세력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고(토지귀족의 부르주아 계급 견제와 같이), 극도의 비인간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시장 자본주의는 결국 파시즘으로 흘러갈 것을 두려워했다. 자기실현적 우려였을까. 파시즘은 현실화되었고 그가 활동하던 오스트리아도 파시즘에 침식당해버렸다.
5. 폴라니의 궁극적인 고민이 사람다운 삶이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는 특히 청년 맑스의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파헤친, 상품생산과정에서 인간이 노동으로 바뀌면서 소외되어간다는 지적에 동의하고, 물질적인 만족 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만족까지 충족되어야 참다운 삶이라고 보았다. 폴라니는 (비록 아버지의 뜻이긴 했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고, 종교적 영성이 인간의 삶에 주는 힘을 소중히 여겼다. 맑스주의에 대한 소고와 강의록을 모아놓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노트> 마지막에는 폴라니의 맑스 비판이 눈에 띈다. 맑스는 종교의 힘을 지나치게 경계한 나머지 종교 자체를 악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또, 맑스의 정치·종교 비판이 미국과 캐나다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미국이 건국 때부터 의회정치를 시작했듯이-을 통해, 폴라니는 맑스는 천상 유럽인이었다고 지적한다(비슷한 지적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도 나타난다.).
6. 성장에 집착하지 말고, 소비에 너무 빠져들지 않기. 폴라니의 시장경제 비판을 실천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부분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표류기>에서, 또 블로그에서 허지웅이 여러 번 강조하는, "조금 덜 부유하고 조금 더 가난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대안'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한편, 한윤형은 <이택광과 칼 폴라니 논쟁, 그리고 독해의 문제>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대안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체제를 정확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대중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데에 그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일견 맞는 말이고, 또 폴라니 역시 그런 지식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안이란 비판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니만큼 그걸 대중의 몫으로만 돌리는 것도 어딘가 궁색해 보인다. 유일한 대안도, 진정한 대안도 없다. 그러나 대안의 새싹은 비판이라는 밑거름이 있어야 싹틀 수 있다. 시장이 사회를 잡아먹고, 금융이 실물을 잡아먹고, 기득권층이 서민을 잡아먹는 시대. 폴라니는 더 나은 싹을 위한 좋은 밑거름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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