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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츠리뷰] 시사인 제84호

by parallax view 2009. 5. 2.

0. <시사IN>이 사랑스러운 이유. <주간조선>은 그렇다쳐도, <한겨레21>마저 노무현을 메인으로 띄울 때 <시사IN>은 홀로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당선자를 전면에 내세웠다. 지난 83호가 그랬다. 이번 84호의 헤드도 교육이다. 그것도 이미 <프레시안>에서 다룬 바 있는 북유럽식 교육. 이건 또 무슨 뒷북인가. 그러나 <시사IN>의 기사는 결코 허술하지 않다. 핀란드가 무조건 한국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고 미리 재단하지 않기에 또 영리하다.

1. 신호철 기자의 커버스토리 <핀란드 교육 사람을 확 바꾼다>는 4년 전 핀란드로 이민 온 최락호네 집에서 시작한다. 한국에서 뚱보에 왕따로 놀림받던 락호는 핀란드에 오면서 성격도 밝아졌고 공부도 재밌게 한다. 그런데 이 동네에서 재밌게 공부한다는 개념은 한국과 다르다. 성적을 비교하지 않기 때문에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고, 좀 못한다 싶으면 선생들이 학생의 공부를 '평준화'시키기 위해 매달린다. 우리가 '평준화'를 공부 잘 하는 애를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반대로, 여기선 공부 못 하는 애를 잘하게 하는 걸 평준화라고 본다.

핀란드를 포함한 북유럽 교육의 장점은 진보진영의 주된 교육담론이다. 지난 총선 때 심상정 씨가 덕양갑에서 내세웠던 공약 역시 핀란드형 선진교육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많이들 북유럽식 교육에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호감은 종종 한국에는 맞지 않는 이상주의 내지는 북유럽 사민주의 오퍼상의 순진한 장사질 정도로 폄하되곤 한다. 교육이 단순히 교육방식과 같은 내적구성 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는 사회적 영향력(소득분배의 수단이자 계급상승의 도구로서), 또 한 인간의 사고방식을 결정짓는 요소로서 기능한다는 다양한 층위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면, 좀 억울해도 무턱대고 울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 이 점에서 이번 84호 기사는 교육제도 이전에 그걸 지탱해주는 사회의 면모를 맛배기로 보여주고자 한다. <핀란드 부자는 한국 부자와 사는 법이 다르다>는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재정이 어떻게 확보되는지, 공교육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유층에 어떻게 퍼져있는지를 드러낸다. 정말로, 제 주머니에 급급한 좌파보다 정부 욕 실컷 하면서도 세금 꼬박꼬박 내는 우파가 공동체에 더 공헌한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쯤 되면 핀란드 교육이 이뤄지는 조건이 더욱 궁금해진다. 핀란드가 건국했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시행했을리는 없다. 분명 어떤 계기가 있고, 계기를 뒷받침하는 내외적이고 역사적인 조건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마 이 기사를 통해 핀란드 교육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 분들은 프레시안의 <핀란드 교육탐방> 시리즈를 읽어보는 게 좋겠다.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객원 연구원 안승문 씨가 현지에서 꼼꼼한 조사와 관찰을 통해 생생한 현장을 전달하고 있으니.

한편, <영국의 현재는 한국의 미래다?>는 한국보다 먼저 일제고사 논란에 빠져있는 영국을 조명한다. 이 부분에 대한 글로는 Periskop의 <일제고사 논란과 영국의 3T>가 더 적절한 것 같다. 영국도 일제고사가 학업성취도를 적절히 판단할 기준이 되기 어렵거나, 또 학교간 성적경쟁을 부추겨 지역간·계층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등의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러나 링크한 글은 제도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함께 고찰함으로써 단편적인 옹호나 비방을 넘어 폭넓은 정책적 접근이 이뤄지길 소망하고 있다. 자유주의 교육이라고 해서 반드시 악(惡)은 아닌 것이다.

비록 신호철 기자는 핀란드에서도 자유주의 논리에 기반한 사립학교가 설립되는 현상을 우려하지만, 같은 블로거의 <사민주의 스웨덴의 급진 자유주의 교육실험>은 공교육의 천국이라고 생각되는 스웨덴에서도 사립(자율)학교는 존재하며 또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문제는 그 학교에 학생이 많이 몰리냐 몰리지 않느냐가 아니다. 고액의 수업료를 지불할 수 있는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질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이 받는 교육의 질 사이에 심각한 격차가 발생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문제다. 스웨덴 사회는 적어도 아직까지는 소외계층에 대한 사회적 완충망이 견고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주의 교육도 설 자리가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한 부작용도 충분히 포용할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에 그런 여유가 있을까? 제2,3의 민족사관고를 목표로 한다지만 결국엔 계급고착화만을 부추길 자율형 사립학교에 소외계층의 교육의 질을 고민할 여지가 있을까?

3. 특집기사인 <부모의 집값이 자녀의 학벌을 결정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이 발표한 <명문대 진학률의 지역간 격차분석 보고서>(링크한 글은 보도문. 보고서는 아래 첨부. 제목은 영문으로 변경)에 의하면 서울대·고려대·연세대 합격자 중 58.7%가 서울 및 광역시 출신들이고, 집값 상위 10개와 하위 10개 지역의 합격률 차이는 무려 30배다. 또, 집값이 낮은데도 합격률이 높은 곳에는 대부분 특목고가 있었다. 예컨대 강원도 횡성의 합격률이 높은 이유는 민족사관고가 있기 때문이고, 충남 공주에는 충남과학고와 한일고 등이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천관율 기자가 지적한대로, 그 동안 경험적으로 또 어렴풋이 땅값 집값에 따라 대학 가는 놈과 못 가는 놈이 갈린다고 말해온 것이 실증된 것이다.([#FILE|090421_SKY_Report.hwp|pds/200905/02/10/|mid|0|0|pds12|0#])

이는 중요한 실증분석이면서,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가 결코 희망적이지만은 않다는 걸 다시 상기시켜준다. 교육제도를 정비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난망한 것이다. 권영길 의원실 자료를 그래프로 표시한 <시사IN> 자료를 보고 있으면 그냥 왠지 낯설다. 언젠가, 나더러 "네가 서울 살았으면 서울대 갔을거야" 라고 말했던 편의점 주인 아줌마 생각이 났다. 내가 대학을 가고 못가고가 내가 살았던 땅과 관계가 있다는 걸 이런 식으로 확인해야 하다니. 지방의 인문계 학교에 갇혀 6년을 보내는 동안, 몽둥이로 애를 줘패서라도 대학에 보내겠다는 선생들의 마음을 알 길이 없었는데(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요즘에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다. 지방민으로서 체감하는 부분이 이렇게 떡하니 실증되었을 때의 난감함이란. 하지만 새삼 안타까운 건 지방대를 나와서 취직은 고사하고 공무원 시험장으로 발길을 돌리는 내 동기들과, 앞으로도 꾸준히 개천에서 용나는 신화창조를 위해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 속에서 졸음과 싸우고 스트레스와 친구 먹을 내 후배들이다. 교육에서도 지방은, 여전히 식민지다.

4. 그런 점에서 핀란드 아이들의 말은 사치로 들린다. 꽃집 주인이 되고 싶다는 웁팔라도, 돈은 필요한 만큼만 벌면 된다는 쿠티도 괜히 얄밉다. 아버지 잘 만나서 핀란드에서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안희 락호 남매에게 샘도 난다. 나의 과거가 이 아이들의 현재였으면 하는 꿈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 아이들의 현재는 여전히 우리의 과거에서 맴돌고 있다. 핀란드는 천국이 아니다. 영국도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며 정책을 보완해 나갈 것이다. 한국에는 한국 나름의 방법론을 고민해야 할 게다. 하지만 적어도 핀란드의 교육정책과 사회적 기반은 우리나라의 미래에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을 사랑하고, 그걸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교육은 도달불가능한 걸까. 신호철 기자는 그 고민의 실마리를 어렴풋하게나마 잡은 것 같다.

나라가 꾸는 꿈이 다르면 아이들이 꾸는 꿈도 다르다. 우리나라는 과연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 <시사IN> 85호 기사는 촛불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오늘은 부처님이 오신 날이고, 촛불 1주년이다. <촛불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는 촛불에 대한 100명의 말을 담았다. 나도 한 번 물어보고 싶다. 촛불은 당신에게 무엇이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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