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의 독재관. 탁월한 정치가. 전쟁의 천재. 갈리아를 평정하고 내전을 종결지음과 동시에 로마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변혁하다. 그리고 암살당하다.
카이사르는 이 정도 팩트로 알려져 있다. 현대에 와서는 독재자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나폴레옹이 가장 본받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카이사르이며, 박정희는 나폴레옹을 존경했다는 말처럼.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을 가장 크게 알린 공로는 시오노 나나미에게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전 15권의 '로마인 이야기'에서 무려 두 권이나 할애하여 카이사르를 설명하고 있으니까(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5권 (하)).
그녀가 묘사하는 카이사르는 모든 것을 꿰뚫어본 영웅이다. 특히 독일의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의 말을 인용하면서 "역사는 때로 불가사의한 존재를 통해 압축적으로 실현되곤 한다"는 명제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녀의 카이사르는 지나치게 전지전능한 존재이다. 도무지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로마의 국난을 치열하게 간파한 뒤 로마의 변혁을 위해 싸우다가 살해당한다. 이 얼마나 비장한 스토리인가. 거기다가 인간적인 매력도 풍부해서 부하들의 신뢰와 여인들의 사랑을 동시에 얻는다. 여자들과의 파란만장한 연애는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클레오파트라의 애인이라는 명성(?)까지 갖고 있을 정도니.
영국의 역사학자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관용과 카리스마의 지도자(Caesar, 2006)에서 카이사르라는 사나이를 객관적으로 조망한다. 학자가 쓴 역사서이지만 결코 딱딱하지 않은 것이 첫번째 미덕이다. 번역자 백석윤 씨도 이 책의 재미를 제일순으로 꼽는다. 로마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마치 이야기꾼이 말하는 것처럼 술술 넘어간다. 단, 학자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에 약간 시시한 부분도 있다. 즉, 팩트와 극적 재미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팩트를 선택한다는 얘기다. 그만큼 책에서 중시하는 두번째 부분은 객관성과 균형이다.
그러나 객관성의 오류에 매몰되지만은 않는다. 다양한 사료를 토대로(책에서 제시하는 사료는 키케로의 저술에서부터 비교적 최근 연구자의 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야기를 다각도로 접근하되, 각각의 사료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런 이유로 시오노 나나미의 이야기와 많은 부분 중복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이야기의 골격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비교열전)이나 수에토니우스의 '황제열전'에서 오기 때문이다.
골즈워디는 고대의 사료를 바탕으로 할 때 그것이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이야기임을 잊지 않는다. 그는 카이사르가 해적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난 뒤, 해적들을 몰살시킨 일화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이야기이며 어떤 경우에도 상황을 주도했던 카이사르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일화다. 자신의 생사를 쥐고 있는 자들을 놀려댔고 그들이 요구한 자신의 몸값을 비웃었으며 한시도 평정을 잃지 않았던 젊은 귀족의 이야기...
...매우 멋진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가 여러 번 되풀이되면서 변형되고 꾸며졌을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해적들에게 잡혀 있던 당시, 동료들이 그에게 몇몇 노예와 의사만을 남기고 떠났던 것을 고려한다면, 과연 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이런 의문은 카이사르의 인생이 가장 원숙기에 접어든 40대 때에도 계속 이어진다(역시 남자의 전성기는 마흔인가?). 즉, 카이사르가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갈리아(오늘날의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 서부) 원정에 나설 때와, 폼페이우스 및 원로원과의 내전에서 현대 사가들이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전쟁사료가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원정기'와 '내전기'에 국한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카이사르가 글을 못 쓴다는 게 아니다. 왜곡을 심하게 했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둘 외에는 다른 사료가 없어 그 시대를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3세 시대의 알레시아 발굴이나 각종 문헌학적·고고학적 발견에 힘입어 그 시대에 대한 자료가 점점 늘어난 덕분에, 골즈워디는 갈리아 전쟁 시대와 내전 시대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를 간결한 문체로 유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무척 방대한 내용임에도 전문 군사용어 따위에 의지하지 않고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전쟁사학자로서의 작가의 기량을 보여준다(이 또한 영국 학계의 간단명료한 서술과 기풍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지?).
골즈워디의 관점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카이사르는 정말 공화정을 혁파하려고 하였는가?"이다. 여기서 그는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그를 공화국이 직면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공화정 체제로는 변화된 환경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선각자로 여긴다. 결국 카이사르는 왕조 또는 제정만이 그 해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카이사르는 급격한 개혁주의자 또는 원대한 계획을 가진 선각자가 아니라 공화국 체제 내에서 개인의 영광과 지위를 추구하던 와중에 권력을 얻게 된, 극히 보수적인 귀족이었다. ...학자들의 견해는 대부분 이 두 가지 의견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적어도 카이사르가 처음부터 공화정을 바꾸려고 하였다는 주장에 대해 골즈워디는 반대한다. 카이사르는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싸운 전형적인 로마 귀족이며, 투표로 관직을 선출하던 고대 로마사회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민중들에게 인기있는 정책에 편승하던 포퓰라리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포퓰라리스라는 사실을 '기회주의적 인간의 전형'으로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저자가 누차 말하듯이 그와 같은 일은 "공화국에서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골즈워디가 책을 쓴 목적은 단순명료하다. 카이사르의 일생을 고찰하고 그것을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사회를 배경으로 투영시키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역사적 사건들도 카이사르와 관련된 것만 이야기하고, 로마사회에 대한 설명도 최대한 간소화한다. 결코 쉽지 않은 목표를 작가는 훌륭히 완수했다.
골즈워디의 카이사르는 여러모로 시오노 나나미의 카이사르와 좋은 비교가 된다. 시오노 나나미의 카이사르가 창천항로라면, 골즈워디의 카이사르는 김구용 삼국지(중어문학자의 삼국지로서 당대의 시를 훌륭히 모아놓았다.) 같다. 과장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료와 이야기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창천항로에도 나름의 재미라는 게 있고, 김구용 삼국지에도 밋밋한 단점은 있으니, 결국 독자가 원하는 카이사르를 만나면 될 것이다.
야심, 재능, 통찰력, 허영심, 실수, 여자들과의 염문, 관용, 잔혹함... 카이사르에 대한 서술은 다양하고, 확실한 것은 극히 적다. 현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도, 받아들일 수 없는 여지 또한 많다(적어도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는 그렇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소설속 인물 중에도 카이사르 같은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드리안 골즈워디 지음, 백석윤 옮김 / 루비박스
나의 점수 : ★★★★
카이사르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겐 침착을,
카이사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겐 호감을,
카이사르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겐 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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