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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잊히고 부인된 역사, 아이티 혁명을 기억하라!

by parallax view 2016. 6. 26.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5.16) 

<잊히고 부인된 역사, 아이티 혁명을 기억하라!> 



잊히고 부인된 역사, 아이티 혁명을 기억하라! 

프랑스의 노예제폐지론에 기입된 '부인된 근대성'을 탐색하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에 따라 이제 더 이상 노예는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해서도 안 된다는 건 이 시대의 상식에 속한다. 우리는 자유와 해방의 근대정신이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 역시 당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 잊힌 역사가 있다. 바로 아이티 혁명이다. 세계 최초의 유색인 혁명이자 대규모 노예 혁명으로 독립국을 세운 아이티인의 역사는 오늘날 빈곤과 절망의 대명사가 되었다. 아이티는 내분과 독재, 강대국의 개입과 막대한 부채, 만연한 부정부패와 환경파괴에 뒤이은 지진으로 ‘실패한 국가’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아이티 혁명은 ‘부인된 혁명’으로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권윤경 창원대 인문과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의 「프랑스 혁명과 아이티 혁명의 역사적 유산,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지 개혁론: 프랑수아앙드레 이장베르의 정치 경력을 통해 본 프랑스의 노예제폐지론, 1823-1848」(프랑스사 연구 제28호, 2013년 2월)은 역사의 침묵 속에 놓인 아이티 혁명에 관한 종래의 담론을 비판하면서, 아이티 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관계를 통해 노예해방을 둘러싼 투쟁이 혁명으로 만들어진 국가를 해석하는 데 미친 영향을 탐구한다. 특히 연구자는 ‘아이티 혁명 침묵시키기’가 흑인 노예의 혁명에 충격을 받은 유럽인의 이해 불능 때문이 아니라, 급변하는 프랑스의 여러 정치 세력이 혁명을 사고하고 전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영국과 미국의 사례에 가려진 

프랑스 노예제폐지 운동의 역사 


  종래의 노예제폐지에 대한 연구는 영국과 미국의 사례에 집중되었다. “서구의 주류 연구들은 주로 영국에서 발달한 박애주의, 감성sensibility의 문화, 기독교 사회운동, 자본주의적 자유노동 이데올로기 등의 틀로 노예제폐지론의 발전을 설명”해 왔다. 그러나 연구자는 “영국 노예제폐지 운동은 프랑스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왜 프랑스는 영국의 성공적 예를 모방하는 데 실패하였나?”라는 식의 접근에서는 영국의 외교적 영향력과 리더십을 강조한 나머지, 식민지인들의 투쟁이 노예제폐지론에 미친 영향을 과소평가한다고 지적한다. 


  프랑스는 카리브해 연안의 식민지인 생도맹그, 과들루프, 마르티니크 등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막대한 부를 추출했다. 그 부는 농장에서 고된 노동에 종사하는 흑인 노예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1791년 생도맹그에서 대대적인 노예 반란이 일어나자 프랑스 혁명의회의 판무관들은 식민지의 무장세력을 공화국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1793년에 노예해방을 단행했다. 이어서 1794년 2월 14일 국민공회는 전면적인 노예제폐지령을 선언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집권 이후 노예제도는 다시 공인되었고, 나폴레옹과 맞서 싸운 생도맹그는 아이티 공화국으로 독립하지만 다른 식민지에서는 노예제가 복구되었다. 


  나폴레옹의 축출과 왕정복고 이후 프랑스에서 노예제폐지 혹은 노예해방은 자코뱅의 공포정치와 동일시되었고 특히 식민지의 노예 반란과 연결되면서 금기시된다. 여기에 왕당파와 보수주의자들은 “생도맹그를 기억하라!”라던가 “아이티를 보라!”고 말하면서 반대파를 억압하는 레토릭으로 아이티 혁명을 전유하기에 이른다. 반면 프랑스 혁명의 성과를 왕정복고 시기에도 이어가려는 자유주의자들은 노예제폐지가 시민적 자유와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1794년 국민공회가 남긴, “유예기간이나 보상 없이 노예제를 전면 폐지함으로써 본국의 혁명과 식민지의 반란이 서로를 급진화하는 혁명적 해방주의revolutionary emancipationism의 전례”는 왕당파와 자유주의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며 19세기 초 프랑스에서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연구자는 프랑스 노예제폐지 운동의 지도자였던 프랑수아앙드레 이장베르의 정치 경력을 살펴봄으로써 당시 노예제폐지를 둘러싼 담론투쟁을 분석한다. 프랑수아앙드레 이장베르는 중도파 자유주의자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프랑스의 최고항소법원인 파기법원의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장베르는 ‘반동적인 왕정과 부활한 교권주의에 맞서 싸우는 자유주의의 투사’로 명성을 얻었으며 1830년 7월 혁명 후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848년 2월 혁명 후에는 제2공화국의 국민의회와 제헌의회 의원을 역임했다. 


  이미 성공한 변호사였던 그는 비세트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노예제폐지 운동의 선봉에 섰다. 1823년 마르티니크에서 유색인 자유민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한 팸플릿을 배포했다는 혐의로 낙인형과 채찍형을 받고 추방된 시릴 비세트는 유색인 자유민들의 연락망을 이용해 이장베르와 접촉했다. 이장베르는 비셰트의 변호를 맡았고 자유주의 언론은 ‘비세트 사건을 시민적 자유가 침해당한 명백한 예’로 선전했다. 이장베르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은 식민지의 엘리트 농장주가 국가 권력을 명백히 사유화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식민지 문제를 본국 정치에 접합”시켰다. 연구자에 따르면 “자유주의 반대파가 보기에 농장주들의 전제가 지배하는 프랑스 식민지는 복고왕정이 군림하는 본국의 비뚤어진 축소판이었다.” 


  이장베르는 비세트와 유사하게 낙인형과 채찍형을 받은 흑인 여성 마리루이즈 랑베르의 변호도 맡아 파기법원에서 항소를 진행했다. 비세트 사건과 랑베르 사건 모두 노예제와 식민지 개혁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이장베르는 “16세기 이후 프랑스 식민지의 역사를 탐욕스러운 노예소유주들과 이들을 제어하려는 ‘계몽된’ 본국 정부의 끝없는 투쟁으로 묘사”했다.  그는 아이티 혁명의 책임이 왕당파가 비난하는 것처럼 본국의 박애주의자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내전과 노예폭동을 자초한 농장주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장베르는 1789년 혁명 이후의 급진적인 역사에는 입을 다물었다. 


  1827년 파기법원은 비세트 사건의 원심 판결을 파기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승리에 고무되었고 이 판결은 3년 뒤의 7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분기점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장베르는 유색인 혼혈의 정치적 자유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의 해방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장베르를 위시한 중도파 자유주의자들에게 아이티 혁명과 아이티 공화국은 일종의 난제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아이티 혁명을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지지했지만, 대농장 중심의 경영을 강조함으로써 아이티의 사실상 노예노동을 묵인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이티 혁명(1791~1804) 중 생도맹그 전투 기록화


‘부인된 근대성’으로서의

아이티 혁명 


  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이중적인 행태는 프랑스 정부가 아이티 공화국이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독립을 승인한다는 1825년의 칙령을 선언하자 더욱 두드러졌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칙령을 두고 ‘아이티의 해방’이라 상찬했다. 1827년 파리 법원의 변호사인 루이앙투안 블랑셰가 항구도시 르아브르에서 아이티 대통령 부아예에 대해 소송을 제기한 블랑셰 사건이 일어났다. 자유주의자들은 또 다시 노예제를 둘러싼 투쟁에 뛰어들었다. 이장베르는 여기서 부아예를 변호했고 왕당파와 보수주의자들은 블랑셰를 지지함으로써 법정투쟁은 혁명의 성과를 둘러싼 해석으로 이어졌다. 르아브르 법정은 개인과 타국의 대통령 사이의 소송을 취급할 수 없다며 블랑셰의 소송을 각하했고, 자유주의자들은 다시금 승리에 고무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필립이 등극하면서 이장베르를 비롯한 중도파 자유주의자들은 의회로 대거 입성했다. 그러면서 노예제폐지를 옹호하는 단체들의 영향력도 확대되었다. 중도파 자유주의자들의 노예제폐지 운동 역시 절정에 달했다. 여기서 이장베르는 노예제폐지 운동을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물론 식민지 노예 반란과도 분리하기 위해, 혁명사로부터 프랑스 노예제폐지론의 계보를 다시 썼다. 그는 “생도맹그의 노예 반란을 1794년의 노예제폐지령과 분리해서 후자는 순수한 인류애와 혁명정신의 발로였으며 식민지 독립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고 역설했다. 이장베르와 중도파 자유주의자들은 법제화와 교육활동 등의 점진적인 방식으로 노예제를 폐지하려 했지만, 급진적 투사가 된 비세트로부터 ‘기회주의적 노예제폐지론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현상유지와 타협을 기조로 하는 7월 왕정 정부는 결코 노예해방과 같은 급진적 실험을 허용할 수 없었다.” 


  이제 중도파 자유주의자들은 배상금을 조건으로 건 독립 승인으로 아이티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고, 내분을 거듭하던 아이티에서 지도자의 독재가 횡횡함에 따라 아이티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중도파 자유주의자들의 노예제폐지 운동은 이제 “아이티라는 ‘실패 국가’가 노예해방의 대의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아이티의 예를 삭제하거나 특수한 예로 고립시키는” 데에 힘을 쏟았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난 뒤 같은 해 4월 27일 제2공화국은 노예제폐지령을 발표했고, 제2의 생도맹그 혁명을 두려워한 식민당국이 자체적으로 노예해방을 선포함으로써 노예해방은 공식화되었다. 이때 이장베르는 제2공화국이 노예제폐지 위원회에서 해방노예들에게 아직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할 수 없다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연구자는 이들 중도파 자유주의자의 노예해방론이 본국에서 왕정과 보수파, 식민지 엘리트의 친노예제 정책에 맞서 싸우면서도,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식민주의 담론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아이티 혁명은 노예제폐지론을 만들어 냈지만 ‘부인된 근대성’으로서 역사의 그늘에 가려지게 되었다. 


  “식민지인들의 자기해방 투쟁의 기억이 물러난 자리에 대신 출현한 것은 1848년의 노예해방은 계몽되고 해방된 본국이 식민지인들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민족주의적, 식민주의적 서사였다. 이제 제2공화국이 프랑스 혁명의 전통과 공화주의를 결합하는 이 영광스러운 서사를 축성하는 한편 노예제에 대한 “망각oubli”을 정책화함에 따라 아이티 혁명과 흑인 공화국은 프랑스의 공적 기억(public memory)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117쪽) 


  논문은 역사란 언제나 기억을 둘러싼 투쟁임을, 기억은 정치적 해석과 직결됨을 드러낸다. 아이티 혁명의 예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성격과, 아이티 혁명이 세계사에서 가려진 경위에 대해서는 수잔 벅모스의 『헤겔, 아이티, 보편사』(문학동네, 2012)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