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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봉기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by parallax view 2016. 6. 25.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5.12) 

<봉기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봉기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에티엔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으로 현대 민주주의를 파헤치다 


  4.13 총선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났다. 과반의석 확보를 자신했던 여당은 후폭풍에 시달리고, 두 개 야당은 저마다 예상 밖의 성과를 거뒀다. 그 때문에 십수 년 만의 여소야대 국면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신문 지상을 가득 메웠다. 지난 총선은 ‘국민의 심판’이란 얼마나 무서우며, 시민의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증명하는 사례로 자리매김하는 듯했다. 진정 승리한 건 야당이 아니라 ‘민주주의’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투표를 통한 참여와 사회 변화를 강조하는 오늘날의 세태는 민주주의를 헌정 질서와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서만 유효한 것으로 바꿔 버렸다. 투표할 권리를 포함한 시민권은 정말로 민주적일까? 시민권과 민주주의의 관계는 항상 순탄하기만 할까? 독립연구자 최원「민주주의적 시민권?: 발리바르의 민주주의론」(민족문화연구 70권 0호, 2016)은 이런 의문에 대해 ‘민주주의적 시민권’이란 이율배반적인 표현임을 지적하면서 에티엔 발리바르의 ‘평등자유’ 개념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를 새로이 사고할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와

평등자유 


  에티엔 발리바르는 루이 알튀세르, 자크 랑시에르 등과 함께 『자본을 읽자』(1965)를 썼고, 알튀세르의 영향 아래에서 독자적인 사유를 전개한 정치철학자다. 그는 현재까지도 시민권/인권을 주된 연구 주제로 삼아 꾸준히 저술과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연구자는 발리바르의 『평등자유명제』(2010)를 독해하면서 오늘날 누구나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민주주의적 시민권이라는 명제의 맹점을 드러내려 한다. 


  발리바르는 「시민권의 이율배반」이라는 서론으로 『평등자유명제』를 시작한다. 연구자에 따르면 발리바르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체régime로 바라보는 대부분의 정치철학적 전통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민주주의를 과정으로 파악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키아벨리, 스피노자와 마르크스, 그리고 자크 랑시에르 같은 이들의 편에 서 있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적 시민권과 인민주권을 대비시킨다. 민주주의적 시민권이 민주주의적 원리, 개인적이고 집합적인 권리들의 보장, 법치국가에의 소속 및 그 제도들에 대한 참여를 포함한다면, 인민주권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이 주권을 행사할(즉 봉기할) 권리를 나타낸다. 오늘날의 민주정체에서는 민주주의적 시민권을 우선시하지만, 발리바르는 인민주권이야말로 정치의 진리이며 근대 정치는 민주주의적 시민권과 인민주권 사이의 끊임없는 길항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발리바르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평등자유égaliberté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민주주의의 어원으로 알려진 데모크라티아demokratia는 ‘어리석은 대중의 지배’라는 경멸적인 뜻을 가졌다. 반면 현재의 민주주의에 더욱 가까운 표현은 이소노미아isonomia다. 이소노미아는 흔히 ‘평등한 권리’나 ‘법 앞의 평등’으로 번역되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자유와 평등 사이의 변증법을 의미한다. 근대 정치철학자들은 자유와 평등 사이에 위계를 설정했는데, 자유를 우선시하는 쪽은 우파, 평등을 우선시하는 쪽은 좌파로 분류되곤 했다. 하지만 전자는 자유를 특권화함으로써 정치를 제도로 환원하고, 후자는 민주주의를 정치 바깥에 놓인 것으로 간주해 시민권 자체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자유와 평등 사이의 관계를 불충분하게 탐색할 뿐이었다. 


  연구자에 따르면 발리바르는 이소노미아의 원리, 즉 평등자유의 원리에 따라 시민권을 주장할 때 그 권리가 죽음에 이른다는 역설을 지적한다. 발리바르는 “이소노미아 또는 평등자유의 원리란 시민권의 헌정의 긍정적 원리라기보다는 부정적 원리이며, 저항, 불복종, 봉기 등을 통해 그것을 위협하며 부단히 되돌아오는 유령이자 정치 그 자체에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그림자로서의 아나키의 원리”다. 하지만 이런 죽음의 원리는 민주주의를 살아 숨 쉬게 하는 내적 긴장으로서 민주주의의 유지를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하다.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나 미국독립혁명의 선언문에 저항권, 봉기권, 시민불복종권 같은 부정적 권리가 기입되는 건 그 때문이다. 


<테니스코트의 선서>(1790~1794)


시민권의 이율배반과

포스트모던 정치 


  하지만 시민권은 시민혁명의 인권선언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부단한 투쟁과 갈등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다. 즉 ‘봉기와 구성/헌정의 변증법’은 근대 시민권의 핵심적인 원리로서 작동한다. 이때 발리바르는 근대 시민권의 첫 번째 국면으로서 ‘평등자유의 흔적’을 분석한다. ‘평등자유의 흔적’은 1789년 선언 이후 인민이 다종다양한 권리를 요구할 때마다 거기에는 늘 봉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민주주의적 발명’만으로 근대 시민권을 설명할 수는 없게 되었다. 그건 근대 시민권의 두 번째 국면인 사회적 시민권의 출현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헌정은 ‘물질적 헌정들’로서 귀족과 평민이라는 고정된 계급 사이의 권리의 분배를 다뤘다. 하지만 근대의 헌정은 ‘형식적 헌정들’로서 명시적인 계급이 타파된 세계에서 모든 시민의 법적 권리를 보장하는 대신 국가를 사회로부터 자유롭게 해 공동체를 대표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고대와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교육은 계급의 평등을 촉진하고 강화하는 요인으로 부상했는데, 이는 민주화가 ‘기회의 평등’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난점은 사회적 시민권이 그 자체로 평등자유의 원리를 담지 못하고 이중의 전위를 거쳐 도입되었다는 데 있다. 첫 번째로 인민은 사회적 시민권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통해 노동력의 재생산이 정상화/규범화의 장場이 되는 대가를 치렀다. 두 번째로 사회적 시민권은 국가 간 갈등에 따라 계급타협이 정당성을 얻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처럼 도입되었다. 여기서 발리바르가 끌어내고자 하는 논점은 사회적 시민권의 위기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같은 외부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시민권이 조직되는 방식 자체에 내재한 모순에서 발생했다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는 국가라는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시민권이 이른바 ‘정상성’에 의해 침식되는 상황에 대해 노동자 운동이 전혀 반작용하지 못하고 묵인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런 경향은 노동자 운동에 국한된 게 아니라 ‘모든 해방 운동이 가진 유한성의 문제’로 확장된다. 어떤 투쟁 주체도 대항권력을 형성할 때 권위주의의 유혹에서 간단히 빠져나갈 수 없으며, 대항공동체는 그 대안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모종의 배제와 위계구조를 갖는다. 그 때문에 누구도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해방적 보편성’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발리바르는 평등자유에 입각한 정치의 시민-주체는 다수성의 정치를 추동하며, 성별, 인종, 장애 등 인간학적 차이로 인해 보편성이 의문에 부쳐지는 상황과 이런 ‘비정상성’ 자체를 배제한다고 지적한다. 연구자는 아직 발리바르의 연구가 어디로 나아갈지 아직 분명하진 않지만, 그의 민주주의론이 다수자의 정치에서 소수자의 정치로 관점을 이동하고 있다고 보았다. 발리바르가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정치’로 나아간다고 보는 것이 얼마나 온당한지는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연구자가 지적하는 경향은 시민권과 민주주의 사이의 길항과 진동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는 듯하다. 


  “다만 내가 보기에 발리바르는 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주체’라는 범주를 ‘역사의 주체’는 물론 심지어 ‘정치의 주체’라는 제한된 의미로도 적어도 일괄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곤란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행위자’나 ‘담지자’라는 용어를 선호한다고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이 아닐까?” (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