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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Archive

'위대한 거짓'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여성혐오

by parallax view 2016. 6. 29.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5.23) 

<'위대한 거짓'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여성혐오> 



'위대한 거짓'으로 만들어진 인터넷 여성혐오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인터넷 여성혐오를 파헤치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의 희생자를 애도한다.


  “자신의 딸들을 죽인 자들이여, 자신의 딸들을 생매장한 자들이여, 최후의 심판의 날이 왔을 때 그녀들이 어떤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는지, 너희들은 해명할 수 있겠느냐.”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132쪽에서 인용. 


  작가이자 철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에서 『코란』에 적힌 글귀를 인용한다. 여자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당대 아라비아인을 통렬히 비판한 무함마드는 죽음을 각오하고 포교를 했다.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전파한 게 600년대 초이니 그로부터 약 1400년이 지났다(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당대의 야만에 맞서 전파했던 이슬람교는 오늘날 성차별을 비롯한 보수주의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다). 반면 근대화되고 문명화되었다고 자부하는 한국에서는 여전히 여성혐오가 심각하다. 급기야 강남역 인근에서 한 여성이 남성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지금의 한국은 과연 무함마드가 일갈했던 야만의 시대에서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한편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의 회원들이 피해자를 추모하는 공간에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는 화환을 보내면서 논란이 가중되었다. 이는 한국사회의 여성혐오가 점점 더 심각한 수준으로 치달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럴 때일수록 여성혐오, 특히 인터넷을 통해 번지는 오늘날의 여성혐오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인경 가톨릭대 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의 「포스트페미니즘 시대 인터넷 여성혐오」(페미니즘연구 제16권 1호, 2016년 4월)는 인터넷이라는 기술을 통해 여성혐오가 “페미니즘의 시대는 갔다”는 식의 논리 안에서 어떻게 전파되고 재생산되는지, 그리고 여기에 대해 어떤 해법을 내놓을 수 있는지 모색한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평판과 대상화로 작동하는 

인터넷 여성혐오 


  연구자는 여성혐오가 인터넷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며, 더욱이 최근에 부상한 전례 없는 현상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페미니즘은 여성혐오에 반대해 “근대 시민혁명을 통해 부상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호소해 여성의 자유와 평등한 권리를 지속적으로 옹호해 온 이념이자 실천”이다. 페미니즘이 없었다면 오늘날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보편적인 인권은 여성에게 적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성혐오는 여전히 지배적인 문화의 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남성을 규범으로, 여성을 그 변이로 사고하는 성차sexual difference의 인간학을 통해 작동”한다. 이성, 국가, 노동, 과학, 예술 등 이른바 생산적·공적 영역은 남성적인 것으로, 그것의 부정이자 결핍인 자연, 육체, 감정 등 재생산적·사적 영역은 여성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여성을 공적 영역에서 배제한다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인터넷이라는 최신 기술을 통해 더욱 광범위해진다. 인터넷은 행위자들의 소통 매개로서 그곳에서는 ‘평판’이 행위자들의 주된 정보가 된다. 이때 부정적 평판은 굉장히 빠르게 생산되고 유통됨에 따라 부정적 평판의 대상이 되는 이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런데 혐오 발언과 같은 부정적 평판은 언뜻 반反사회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터넷 커뮤니티 안에서는 일종의 사회성으로 둔갑한다. 연구자는 일베처럼 여성혐오가 일상화된 커뮤니티에서는 “수준이 저열하고 심각한 왜곡의 가능성이 있는 정보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소통되는데, 반응만 좋다면 수많은 공감을 통해 어떤 정보든 ‘사실’이 되고 또 이 ‘사실’에 근거한 새로운 사실이 생산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인용한다. 이용자가 공감과 인정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원하는 ‘사실’을 생산하는 인터넷 문화의 특성이 혐오 정서를 적극적으로 퍼트릴뿐더러 현실에 대한 저항력까지 갖게 되는 것이다. 


  이미 일베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여성혐오는 인터넷 문화의 주요한 코드였다. 남성들은 여성혐오를 통해 남성 간 연대를 형성하는데, 여성혐오가 일상적인 커뮤니티에서는 여성을 성기로 환원함으로써 조롱하고 비판하는 용어가 번번이 언급되는데, 이런 용어를 통한 대상화는 '인터넷 여성혐오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여기서 인격으로서의 여성은 삭제되고 오로지 수단과 소유물로서의 여성만 남는다. ‘김치녀’나 ‘된장녀’ 같은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와 같은 이른바 ‘○○녀’ 담론에서 유포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실제’ 경험담을 제시한다. “신입 여직원이 노래방 도우미 알바한다”라거나, “결혼식 축의금 대신 내달라고 부탁한 여성 지인이 수수료 떼고 송금했다”라든지, “남녀공용 화장실 이용한 친구가 무고하게 성추행범으로 몰렸다”는 식이다. 


  하지만 인터넷 문화의 문법상 이런 일화들은 ‘위대한 거짓’으로서 ‘작성자의 다른 글 보기’ 기능을 이용하면 금세 날조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이야기를 통해 표상된 “‘군대도 안 가는’ 한국 여성들은 성형중독 ‘성괴’에, 공공장소 등에서 새치기를 일삼고, 회사에서는 생리휴가를 쓰거나 칼퇴근해서 일을 떠넘기며, 연애와 데이트에서는 무조건 돈 많은 남자와 명품만 밝히는 속물이고, 어학연수 가서는 외국 남성과 동거하는 ‘걸레’ 등으로 변주”된다. 이와 같은 혐오 코드는 남성의 피해의식을 강조하고 여성에게는 자기혐오를 유발한다. 남자들은 인터넷 여성혐오 담론 안에서 “여가부, 꼴페미, 한국 여자 때문에 공무원 시험에서 군가산점도 못 받고, 회사에서 무거운 생수통을 꽂으며, 여친에게 명품백 사주고 차이는 불쌍한 존재”로 표상된다. 한편 여성들은 남성들의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문제가 되는 여성의 특징을 한심하게 여기거나 그러한 여성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해 자기혐오를 강화한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식으로 여성 스스로 자기규율을 한다는 점 또한 마찬가지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안티 페미니즘이다 


  이런 안티 페미니즘 성향은 ‘페미니즘의 종언’ 운운하는 포스트페미니즘 담론 안에서 더욱 강화된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인권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성과를 인정하지만, 오늘날에는 인권이 확보되었기 때문에 페미니즘의 시효는 만료되었다고 간주한다. 차별이 없는 세계에서 남는 건 개인이 적극적으로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개인적인 성취를 중시하는 자기계발의 서사는 2세대 페미니즘의 집합적 목표가 소비주의적으로 전도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2세대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념에 입각해 성적자기결정권과 재생산에서의 선택권을 주창했다. 하지만 이제 소비의 주체가 된 자율적 개인으로서의 여성에게 “자기 결정과 선택은 사적인 일상의 경험 및 소비 역량과 결부”된다. 


  그러나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은 현실적 제약으로서의 불평등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교육에서 여성의 진출이 눈에 띄게 늘었어도, 경제활동참가율과 소득 수준 등에 있어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개인의 의지와 자기계발만을 강조하는 포스트페미니즘 담론은 집합적 행동과 연대를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안티 페미니즘이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여성혐오 유포자들이 페미니즘을 주적으로 설정하는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역설이다. 포스트페미니즘의 논리에 따르면 페미니즘의 시대는 끝났다. 하지만 세상은 ‘김치녀’와 ‘꼴페미’ 때문에 망가졌다는 여성혐오의 코드는 여성들의 집합적 행동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포스트페미니즘과 상통한다. 


  이에 대해 연구자가 여성혐오를 돌파하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은 ‘성차의 윤리’다. 여성주의자 뤼스 이리가레는 여성이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자연적 재생산자로서 ‘문명의 침묵하는 토대’였다고 주장한다. 문화와 자연,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 공과 사, 능동과 수동의 이원론은 성차의 은유를 통해 강화되었으며, 여자는 항상 두 대립항에서 후자의 자리에 놓였다. 여자는 일자the One에 대립하는 부정적 타자로만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리가레는 인간이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은 생성becoming의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이때 생성의 과정은 관계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두 상이한 주체는 그들 사이에 공간을 마련하면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규정하거나 포섭하지 않은 채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성차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라는 첨단 기술이 포스트페미니즘이라는 담론과 접합하면서 여성혐오를 강화한다는 연구자의 논지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논문 마지막에서 성차의 윤리를 제시할 때는 필요한 논의이긴 하지만 실천적이기보다 관념적이어서 아쉽다. 지금 더욱더 요구되는 것은 집합적인 토론과 행동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