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5.05)
'개독교'의 한가운데에서 사도 바울을 구출하라!
바디우, 지젝, 아감벤이 주목한 야곱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
한국에서 기독교는 어느 순간 ‘개독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 사회의 지독한 보수성을 상징하는 한편, 하나의 신만을 믿는 일신교라는 성격과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 때문에 오늘날의 윤리인 다양성 존중과 어긋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알카에다와 IS, 유럽을 위협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테러는 종교의 배타성으로 인한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신교, 그중에서도 기독교의 논리를 정반대로 해석하는 이들도 나타나고 있다.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조르조 아감벤 등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기독교의 정치신학을 전유해 새로운 정치적 돌파구로 내세우고자 한다. 이런 역설적인 상황의 한가운데 있는 이가 바로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변방의 가르침을 세계 종교로 전환한 인물이라는 평가와 기독교의 보수성을 확립한 사람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사도 바울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도 오래되었다. 신약성서에는 바울의 서신이라 알려진 열네 개의 편지가 있는데, 그중 바울이 쓴 것과 바울의 이름을 빌어 그의 제자들이 쓴 것을 구분할 수 있고, 시기적으로 후대에 갈수록 바울 사상의 급진성이 사라지고 보수화된다는 주장도 있다. 바울은 그가 살아 있을 당시 ‘이방인의 사도’로서 유대인의 율법 중심주의와 싸우고 비非유대인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함으로써 다른 사도들과 마찰을 빚는 등 과거에도 현재에도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안연희 선문대 연구교수의 「바울의 메시아주의에 대한 탈근대 정치신학적 독해: 야곱 타우베스를 중심으로」(『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제66집, 2015년 12월)는 사도 바울을 경유해 정치적·사상적 돌파구를 찾으려는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경향을 분석하고, 이들 정치철학자가 참조하는 철학자 야곱 타우베스를 살피면서 현대 정치철학적 바울 담론의 종교학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바디우, 지젝, 아감벤
이들은 왜 사도 바울에 주목하는가
정치신학이라는 말은 일반인에게는 낯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 신학과 철학의 분리를 당연시하는 근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의 정치는 의례와 스펙터클을 도입함으로써 대중을 동원하고 참여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은연중에 종교를 참조해 왔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바로 파시즘이다. 한편 종교는 여전히 ‘세계에 대한 기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하느님 나라(왕국)’나 ‘메시아(구원자)’ 같은 말은 신화로 포장되긴 했어도 여전히 현실의 어려움을 타개할 상징으로서 현실정치와 적대하기도 한다.
이때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철학 자체를 갱신할 새로운 사유와 문화비평적 가능성”으로서 ‘구원’과 ‘메시아주의’ 등 정치신학적 논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학문적 조류를 형성했다. 바디우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갖는 보편주의에 주목하면서 로마 제국의 거짓 보편성과 유대교의 특수주의 모두와 거리를 두는 보편적 주체로서의 사도를 복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젝은 바울이 사도들에게 외부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는 한편,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신의 이중적 비움kenosis’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으로 독해하고자 한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울의 서간문을 해석하면서 발터 벤야민의 ‘메시아적 시간’ 혹은 ‘진정한 예외상태’에 주목해 법의 논리 저 너머에 놓인 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한다. 연구자에 따르면 민중신학자 김진호는 학계가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정치신학 논의에 관심을 갖는 건 정치신학 자체가 아니라 바디우와 지젝, 아감벤에 대한 관심에 따른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들의 지적 흐름에는 2차대전 이후 서구의 반反유대주의에 대한 성찰에 따른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이 저변에 깔려 있다고 본다.
이렇게 “신학적으로 설정된 경험의 가능성들을 신학 없이 슬그머니 전유하려 들 때” 정치신학은 관념에 매몰되기 쉽다. 그렇지만 종교와 정치 사이의 엄격한 분할이 갈수록 의심스러워지는 오늘날, 종교와 정치 사이의 구분을 의문에 부치는 정치신학적 논의는 종교를 상상하는 새로운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정치신학적 논의는 ‘기독교 정통파’ 바울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바울을 기독교의 창건자라기보다는 유대교의 개혁자로 새로이 해석하는 이 흐름은 발터 벤야민과 게르숌 숄렘,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야곱 타우베스 등 유대 신비주의와 메시아주의에 깊은 관심을 보인 20세기 사상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바울을 유대교 전통의 급진적 개혁자로 평가하는 이 좁은 틈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유대교 내부에서 유대교 전통을 잠식해 나간 바울의 진정한 급진성이 드러날 뿐 아니라, 아직 실증적 도그마로 성립되지 않은 생성 중의 기독교, 도그마를 세우려는 폭력적 제스처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신을 쓰는 사도 바울>(1620)
야곱 타우베스,
종교와 정치, 기독교와 유대교의 구분을 의문에 부치다
철학자 야곱 타우베스(1923~1987)는 그가 ‘단두대 위의 유서’처럼 감행한, 죽기 직전의 강연을 정리한 『바울의 정치신학』(그린비, 2012)을 통해 독자 대중에게 알려졌다. 그는 기독교 신학에서 율법보다 강조한 믿음pistis를 유대 메시아주의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등 새로운 종교사적 해석을 시도했다. 특히 그는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와 ‘적대적 우정’을 맺으면서 그의 정치신학적 관점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칼 슈미트는 정상상태가 아니라 법이 효력을 정지하는 ‘예외상태’를 강조하며 근대 법철학의 세속주의의 정반대편에 섰다. 이는 슈미트가 그의 『정치신학』(그린비, 2010)을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데에서 잘 알 수 있다. 타우베스는 좌파 행동가라는 점에서 슈미트와 적대적이면서도 말년의 슈미트와 함께 「로마서」 강독을 하며 우정을 쌓았다. 또한 타우베스 역시 반反근대주의자이자 반反자유주의자로서 슈미트와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타우베스는 “정치적 함축을 가지지 않은 신학이 없기 때문에, 신학적 전제가 없는 정치 이론도 없다”고 말하며 슈미트와 동일한 전제를 공유한다.
타우베스는 정치신학의 세 형태를 각각 대표유형, 이중주권 유형, 신정정치 유형으로 구분한다. 이중 대표유형은 슈미트의 것이며 “현실의 주권자(현실정치)를 신적 지배(구원)의 대리자로 여기는 첫째 유형”이라고 보았다. 이중주권 유형은 정치와 종교가 서로의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는 그노시스주의적 유형으로서 오늘날의 세속화된 형태와 유사하다. 마지막 신정정치 유형은 “…이 없는(아닌) 듯hos me 살아라”라는 부정적 정치신학이다. 부정적 정치신학은 제국의 정치신학과 오늘날의 이중주권 모두를 중지시키고 무효화한다. 타우베스는 벤야민의 바울 해석을 ‘세계정치로서의 니힐리즘’이라 부르면서 “「로마서」의 바울은 슈미트 식 대표유형의 정치신학에 대한 정치적 선전포고”라고 보았다. 슈미트와 타우베스는 “세속화된 세계가 처한 위기 속에서 초월적 범주가 필수불가결하다”는 데엔 입장을 같이 하지만, 슈미트는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위로부터의 정치신학’을, 타우베스와 벤야민은 급진적이고 해방적인 ‘아래로부터의 정치신학’을 구현하고자 했다.
또한 타우베스는 유대교 메시아주의와 기독교 메시아주의 사이의 단절보다 그 연속성에 주목한다. 유대철학자 게르숌 숄렘은 유대교의 메시아가 공동체와 역사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반면, 기독교의 메시아는 개인의 내면으로 후퇴한다며 비판했다. 하지만 타우베스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가 “바울이 모세와 달리 새로운 민족의 창시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기독교의 독자적 길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족의 구원을 위해 타락의 나락(창조, 육화, 죽음 혹은 배반이 연결되는)을 선택하는 유대 신비주의의 메시아 이미지를 투사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더 나아가 메시아 관념의 내면화만이 “역사무대에서의 메시아주의의 파괴적 결과를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숄렘의 이분법을 반박한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이 타우베스의 바울 독해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진보와 세속화의 논리가 봉착한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한계 때문이다. 연구자는 ‘종교적 전환’을 보여주는 최근의 바울 담론이 현대의 종교 현상을 정확하게 포착할 단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사도 바울과 관련해 좀 더 대중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으로는 김학철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기쁨: 사도 바울과 새 시대의 윤리』(문학동네, 2016)가 참조할 만하다.
“이와 같은 타우베스와 아감벤 등의 탈근대적 모색과 부정적 정치신학은 패배주의나 절망의 어둠에 빠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있기도 하다. 역사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정치신학의 어둠을 통과하였으나 여전히 그러한 정치신학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정치의 종교적 속성과 종교의 정치적 속성은 서로를 유인하면서 곳곳에서 만난다. 그런 점에서 정치신학과 정치의 신학적 구조를 비판하고 무효화하는 정치신학의 가능성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3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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