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5.01)
"여성의 자리는 타이프라이터다"
프리드리히 키틀러의 '기록체계' 다시 읽기
우리가 쓰고 있는 컴퓨터는 계산기와 타자기가 결합된 형태를 갖고 있다.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컴퓨터에 타자 기능이 없었다면 이 물건은 그저 속도 빠른 계산 기계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만큼 글 쓰는 기계는 우리가 기술에 접근하는 가장 직관적이면서 일상적인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수기手記의 시대를 지나 컴퓨터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 생략한 기계가 있다. 바로 타자기typewriter다. 오늘날 타자기는 제 기능을 컴퓨터에 넘긴 뒤 북카페 등에 진열되어 손님의 빈티지 취향을 저격하거나 수집가가 취미로 모으는 물건이 되었다.
그런데 독일의 매체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타자기가 축음기, 영화와 더불어 인간의 인식과 담론을 생산하는 방식을 바꿨다고 지적한다. 특히 ‘글쓰기 기계’인 타자기가 출현하면서 글쓰기의 젠더gender는 물론 문학의 물질적 토대도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타자기가 글쓰기의 여성화를 이끌어 냈고 문학이 생산되는 방식 또한 바꿔 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애령 이화여대 이화인문과학원 HK교수는 「글쓰기 기계와 젠더: 키틀러의 ‘기록체계’ 다시 읽기」(한국여성철학 제23권, 2015년 5월)를 통해 키틀러의 관점에 남아 있는 ‘음성중심주의’를 지적하면서 성별 질서를 교란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논의에 다시금 기존의 질서가 기입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기록체계 1900
축음기·영화·타이프라이터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급진적인 ‘기술/매체결정론’을 주장한 학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에게 ‘매체’는 “데이터 내지는 신호들의 저장, 전달, 작업에 기여하는 문화기술들”을 의미한다. 키틀러는 매체와 데이터를 구분하지 않는 데서 더 나아가 매체를 데이터가 생산되는 장소인 ‘기록체계’로 본다. 이때 기록체계는 “특정한 시대에 데이터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을 앞서 결정하는 기술과 제도의 네트워크”다. 키틀러는 자신의 주저 『기록체계 1800/1900』[국내에는 『기록시스템 1800·1900』(문학동네, 2015)으로 출간]에서 1900년을 전후해 출현한 축음기, 영화, 타이프라이터(타자기)와 같은 아날로그 기록매체가 1800년대와 1900년대를 단절하는, 매체 전환의 결정적인 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알파벳과 인쇄술, 컴퓨터를 결정적 기점으로 서술하는 통상적인 관점과 달리, 축음기와 영화, 타이프라이터가 기존의 문자 독점 체계와 단절해 데이터를 생산, 저장하고 전달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고 본다.
타이프라이터를 치는 한 여자
이때 키틀러는 라캉의 실재와 상상계, 상징계 개념을 끌어들여 축음기와 영화, 타이프라이터에 각각 대응시킨다. 축음기는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리를 가능한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실재와, 영화는 환영 같은 이미지를 기록한다는 점에서 상상계와, 타이프라이터는 문자를 재배열하고 기록한다는 점에서 상징계와 연루된다. 그런데 이들 축음기, 영화, 타이프라이터는 1900년대의 기록체계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만, 똑같은 성격을 갖지는 않는다. 축음기와 영화가 문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소리와 이미지)을 기록하고 재현한다면, 타이프라이터는 이전 시대와 유사하게 문자를 기록한다. 하지만 타이프라이터가 기록 방식을 손으로 쓰기에서 기계로 쓰기로 바꾸면서 두 가지 결정적인 변화가 발생한다.
첫 번째 변화는 글쓰기의 성별이 바뀐 것이다. 그 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문자와 글쓰기는 ‘타자기를 치는 여자’의 것으로 바뀌었다. 논문 앞부분에 인용된 도표는 1870년부터 1930년까지 10년 간격으로 미국 속기사의 여성 타자수의 비율을 보여준다. 1870년 4.5%였던 여성 타자수의 비율은 1930년에는 95.6%까지 증가한다. 특히 1880년에는 40.0%로 급상승하면서 타자수의 여성화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여성의 문자해독율과 함께 교육과 취업의 기회 역시 확산되었음을 알려준다. 펜이라는 남성적 상징을 대신한 타이프라이터는 ‘글쓰기의 탈성별화’를 야기했다. 이와 연관된 두 번째 변화는 ‘글쓰기의 탈신체화’다. 타이프라이터로 쓴 글에는 인간이 손으로 쓴 필적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혼종으로서의 타이프라이터
그리고 여성
그런데 타이프라이터는 기록체계 1900의 ‘완전히 새로운 사물의 질서’ 중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타이프라이터는 다른 매체와 달리 여전히 상징계에 연루되어 있으며, ‘아직 기계가 아닌 기계’, ‘도구와 기계 사이의 중간물’로서 인간이 직접 그 기계를 다루어야 한다. 또한 타이프라이터라는 말 자체에는 ‘글쓰기 기계’와 ‘그 기계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이중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런 모호한 성격 때문에 타이프라이터는 일종의 혼종으로서 기계와 유기체(인간)의 연결인 ‘연합 사이보그coalition cyborg’라고 할 수 있다.
타이프라이터가 가진 혼종적 성격은 타이프라이터가 회의장이나 사무실에서 누군가 말한 것을 속기할 수 있다는 데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글쓰기에 구어적 효과가 되살아나는 역설이 발생한다. 데리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문자가 음성에 대한 부차적인 대리물로 여겨졌으며 이런 ‘음성/로고스중심주의’가 오랫동안 서구의 사유를 지배해 왔음을 비판했다. 이와 유사하게 키틀러는 의미와 무관한 데이터의 저장과 전송에 대해 논하면서 음성의 우위를 의문에 부친다. 타이프라이터에 스며든 구어적 효과는 데이터의 흐름에 용해된다. “투명한 의미의 전달체로서의 음성의 우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키틀러(1943~2011)
하지만 연구자는 매체이론가들이 다른 ‘기록체계’에 비해 타이프라이터를 덜 주목한다는 데 착안한다. 연구자에 따르면 그와 같은 분석의 공백은 타이프라이터의 혼종성이 키틀러의 논의를 매끈하게 구조화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도구와 기계의 중간물’이자 ‘기계와 인간의 연합체’에는 항상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인간을 상정한다. 하지만 키틀러는 여기서 ‘인간’, 더 자세히 말해 여성을 은연중에 지운다. 거꾸로 그는 타이프라이터로 인해 글쓰기의 여성화와 ‘해방’이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키틀러는 1800년대 기록체계에서 배제된 여성이 1900년대에 복권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여성이라는 기표는 인간이 사라지고 신체성이 삭제된 매체의 작동 안에서 지워지기 위해 불러내질” 뿐이다. 연구자는 데리다가 음성 언어의 의미화 작용에 앞서 작용하는 흔적으로서의 문자를 설명하게 위해 고안한 에크리튀르écriture(글쓰기/문자) 개념을 언급하면서, 키틀러는 기술의 선재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별 질서의 에크리튀르가 기술에 이미 들어 있음을 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키틀러에게서 매체적 선험성으로서 타이프라이터가 성별 질서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과 문자와 글쓰기 기계의 관계가 이미 성별 질서의 에크리튀르 안에 기입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글쓰기 기계가 글쓰기의 성별을 바꾸었다고 주장하기에 앞서, 그가 삭제하고 맹목으로 남겨둔 지점에서 글쓰기 기계에 부착된 성별화의 에크리튀르가 분석되어야 한다.” (52쪽)
연구자는 “여성의 자리는 타이프라이터다Women's place is at the typewriter”라는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논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1953년 노버트 위너, 존 폰 노이만, 클로드 셰넌 등 사이버네틱스 이론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 학자들이 모인 메이시 회의에서, 그 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여성으로 알려진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외에 또 한 명의 여성이 숨겨져 있었음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녀는 재닛 프리드라는 타자수다. 회의장 한 구석에서 “소리를 글자로, 기호를 책으로 만드는 과정의 물질성에 초점을 맞춘” 그녀는 “정보는 절대 탈신체화될 수 없음을, 메시지는 저절로 흐르지 않음을, 인식론은 신체를 통해 표현으로 연결될 때까지 엷디엷은 공기를 떠다니는 단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키틀러의 탈인간적 매체이론은 모든 정보가 데이터로 환원되고 전송되는 현재에 아주 적합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연구자는 성별화된 질서를 상기하지 않은 채 “탈체현이라는 거짓 문제”에 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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