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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배반해 지젝을 구원한다?

by parallax view 2016. 6. 20.

리뷰 아카이브 기고문(16.04.28)

<지젝을 배반해 지젝을 구원한다?>

 

 

지젝을 배반해 지젝을 구원한다?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영화 비평에 대한 이론적 전환을 제안하다

 

  슬라보예 지젝은 난해하기로 악명이 자자하지만, 도발적인 문제제기와 신랄한 문체 때문에 독자 대중에게 ‘철학계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알려진 철학자다. 슬로베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했던 시기에 이른바 ‘부르주아 철학’를 전공한 지젝은, 헤겔 철학과 라캉 정신분석학이라는 두 사유체계를 서로 연결해 마르크스를 새로이 읽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지젝은 급진적인 사유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균열을 내고 저 악명 높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갱신하려 한다.

 

  김서영 광운대 교양학부 교수의 「지젝의 정신분석적 영화 비평에 나타난 문제점 및 이론적 지평전환에 대한 요청」(철학연구 제136집, 2015년 11월)은 지젝의 영화분석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면서 그걸 넘어설 수 있는 방법으로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 사이의 ‘시차적 관점’을 제안한다. 연구자는 영국 셰필드대 정신과 심리치료연구센터에서 정신분석학과 영화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 브루스 핑크의 『에크리 읽기』(도서출판b, 2007),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을 번역하는 등 라캉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번역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무시무시한 실재의 심연에
빠진 지젝?

 

  지젝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할리우드의 정신분석』(한나래, 1997)이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처럼 영화를 직접적으로 다룬 책에서든 그 밖의 다른 저작에서든 항상 영화 비평을 수행해 왔다. 영화는 정신분석 작업의 임상적 측면보다 이론에 집중하는 지젝에게 있어 대중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통로다. 연구자에 따르면 지젝은 『삐딱하게 보기』(시각과언어, 1995)로 정신분석적 영화 비평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하지만 연구자는 지젝이 ‘외상적 실재’라는 개념을 제안하며 독자를 끌어들일 때, 낯설고 기괴한 것이 주는 충격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영화 비평이 곧잘 진부해진다고 평가한다. 또한 최근 지젝이 제안하는 ‘주체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기획은 초창기 지젝이 구축했던 ‘어두운 실재의 심연’이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고 덧붙인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새물결, 2013) 중 「중상에서 증환으로」라는 장에서 ‘증환’을 설명하기 위해 카프카와 에일리언을 연결한다. 이때 연구자는 지젝이 ‘증환’을 “불가능한 주이상스가 배인 외상적 사물”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 비판을 풀어 보자면 증환은 이성으로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어둡고 기괴하며 우리를 불쾌하게 하지만 “인간 내면에 있는 그 자신 이상의 것”이다. 연구자에 따르면 지젝의 ‘주체’는 그 어둠에 잠식된 채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다. 그에 반해 라캉은 증환의 사례로 제임스 조이스를 들면서 증환이 상징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주려 했다고 해석한다.

 

  이런 ‘조이스 없는 증환’은 『삐딱하게 보기』에서도 반복된다. 지젝은 ‘모성적 초자아’나 ‘항문적 아버지’처럼 프로이트가 언급하지 않은 개념을 발명하며 실재Real를 어둠, 괴물, 유령 같은 것과 동일시한다. 실재에 대한 지젝의 상像은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에서 영화 <매트릭스>에 나오는 인간 건전지로 제시되며 다시 한 번 그 기괴한 성격이 강조된다. 비록 『삐딱하게 보기』에서 잠깐 증환의 창조성을 암시하는 듯한 언급이 나오지만, 지젝은 다시금 “정신분석학의 궁극적 목적은 주체의 결핍 상태를 야기하는 것이며,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모든 고유한 세부들의 궁극적인 무효성을 강제로 경험하게 하는 세련된, 따라서 더더욱 잔인한 모욕의 방법”이라는 관점을 고수한다.

 

영화 Zizek!(2005) DVD 표지

 

  연구자는 지젝이 헤겔의 표현을 빌어 주체를 ‘세계의 밤’으로 해석하게 됨에 따라 “무시무시한 실재의 심연에 빠진 채 정신병적 공간에 갇혀 있는 듯”하다고 지적한다. 이때 지젝을 구한 이는 레닌이다. 레닌은 1차대전 이후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으면서 절망적인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역전하고자 했고, 지젝은 헤겔을 읽는 레닌을 통해 ‘실패한 레닌을 반복’하고자 한다. 이때 ‘반복’은 ‘배반을 통한 복귀’이자 ‘부정의 부정’으로서, 연구자는 “각각의 주체들은 헤겔적 운동을 도모하며 주체 내부에서 더 깊은 내면으로, 또는 더 고양된 차원으로 통합의 과정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지젝의 표현을 빌자면 “칸트의 사유의 정신에 충실하게 머물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칸트의 글자를 배반해야 한다.”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의
‘시차적 관점’은 과연 가능할까

 

  연구자가 보았을 때 『시차적 관점』은 『삐딱하게 보기』를 완성하는 철학적 짝패다. 지젝은 그 책에서 ‘죽음 충동’을 자살 같은 자기파괴적인 추동력이 아니라 삶을 향한 열망의 다른 형태라고 재해석한다.

 

  그렇다면 죽음 충동이라는 삶에 대한 갈망이 비롯되는 곳은 어디인가? 지젝은 ‘간극’에서 그 가능성을 찾는다. 간극이란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지점이자 창조가 시작되는 기원으로서 이는 신체를 비우는 행위를 지칭하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체를 비우고, 그곳에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는 행위, 바로 그것이 지젝이 『시차적 관점』에서 언급하는 바틀비적 제스처이다. (13쪽)

 

  지젝은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필경사 바틀비의 저 유명한 선언에 이어져야 할 것은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는 공들인 작업으로의 이동”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시차적 전환’은 자동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 연구자는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와 결별한 칼 구스타프 융의 분석심리학적 관점을 정신분석학과 교차해 볼 것을 제안한다.

 

  꿈의 ‘목적’을 강조한 융과 달리 프로이트는 꿈과 무의식에 어떤 목적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하지만 연구자는 융이 제안하는 ‘신화’와 ‘상징’ 개념이 “명백히 실재적 영역에 닮아 있다”고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학에는 실재를 설명할 수 없는 언어 자체가 없기 때문에 실재가 “말할 수 없는 것, 두려운 사물, 기괴한 이물”로 정의되지만, 분석심리학은 실재를 신화와 상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연구자는 분석심리학이 앞서 제임스 조이스가 증환을 통해 새로운 상징계를 창조해 내는 에너지를 보여준 것과 유사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으며, 정신분석학과 분석심리학 사이의 ‘시차적 관점’은 영화 비평의 또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연구자는 지젝이 실재를 어둠과 동일시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분석심리학이 정신분석학적 영화 비평에 생산적인 힘을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하지만 연구자는 ‘배반을 통한 복귀’ 혹은 ‘부정의 부정’을 단순히 정-반-합의 자기 회귀 운동으로만 해석하는 건 아닐까. 또한 연구자가 제안하는 식의 ‘실재에서 상징으로’의 전환은 연구자 자신도 경계하긴 하지만, 전형적인 신화 읽기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된다면 지젝을 배반함으로써 지젝을 되살리겠다는 기획은 바로 그 의도에 충실하려 했기 때문에 오히려 실패를 피할 수 없는 건 아닐까. 변증법의 가혹한 논리에 따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