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카이브 기고문(2016.04.21)
계획경제 뒤에는 수리경제학이 있었다
수리경제학파의 성장과 소련 경제학계의 변화
1980년대 말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해체 이후로 사회 체제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패배한, 억압적인데다 낙후되기까지 한 시스템으로 인식되곤 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생산과 분배 원리인 계획경제 역시 비슷한 평가를 받았다. 누구나 계획경제라고 하면 ‘정부가 통제하는 경제’, ‘정해진 할당량을 완수해야만 하는 경직된 생산 시스템’ 따위의 정의를 떠올릴 것이다. 특히 서구의 주류 경제학자들은 구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의 계획경제가 모든 정보를 당이 통제하려고 함에 따라 불가피한 실패를 맞이했다고 보았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이야말로 효율적인 생산·분배 원리임을 강조했다.
여기서 주류 경제학자들은 수학적 접근법과 통계학이 주된 연구방법론인 수리경제학을 무기로 삼아 경제 현실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함을 역설했다. 하지만 김동혁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수리경제학파의 성장과 소련 경제학계의 변화(1957-1965): 경제학 연구조직 및 매체 변화를 중심으로」(서양사론 125권 0호, 2015년)는 수리경제학이 이른바 자본주의 국가에서만 독점적으로 발전한 학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는 1950~60년대 소련의 경제학자들이 수리경제학의 효용성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학술 매체를 확보하고 관련 연구소를 설립함으로써 이론적·조직적 헤게모니를 구축했음을 드러내려 한다. 이와 같은 연구는 소련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계획경제를 운영했다는 편견을 깨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실제적인 변동을 역사적으로 탐구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소련 경제학의
수학적 혁명의 시대
연구자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 이후는 ‘소련 경제학의 수학적 혁명의 시대’다. 넴치노프, 칸토로비치, 노보쥘로프 등의 경제학자들은 신고전파 경제학의 가정을 받아들임으로써 소련의 주류 학문으로 자리 잡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정치경제학과 단절했다. 그런데 1970~80년대 서구에서 이뤄진 소련 수리경제학파 연구는 수리경제학을 구소련의 경제계획을 개선하는 제안으로 해석하며 그 이론적 의의를 다룬 데 반해, 소련 경제학자들이 수리경제학파라는 학문적 집단을 형성하고 헤게모니를 쥐는 과정에 대해서는 잘 다루지 못했다.
여기서 소련 경제학의 양적 성장은 수리경제학파가 태동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1956년 경제학자, 경제통계학자 등 경제학 관련 직업 종사자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20.6%로 급성장한 뒤 매년 5% 이상의 전년 대비 증가율을 보였다. 소련 전체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 대비 경제학 전문가의 비율 또한 꾸준히 상승했다. 이 같은 변화는 2차대전 이후 경제계획에 있어 전문가의 수요가 급증했음을 반영한다. 한편 경제계획을 설계하고 성장 시나리오를 구축할 이론은 부족하다는 지적 역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소련 경제에서 가장 첨예한 문제로 부상한 가치와 가격 문제, 자본투자 효율성 문제에서 기존의 소련 경제학은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 냉전 체제 아래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했던 시기인 만큼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과 사용에 대해 첨예한 논쟁이 예고되는 시점이었다.
이때 농업 부문의 경제통계학자로 경력을 시작해 1960년 4월 경제연구에 수학적 방식을 도입하는 문제에 대한 대규모 학술대회를 조직한 넴치노프와, 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과와 수학연구소를 중심으로 학문적 입지를 넓히던 칸토로비치, 그리고 1947~1949년 자본투자 효율성에 대한 논쟁으로 유명해졌고 1953년 레닌그라드 고리키 학술원의 경제학 및 통계학 분과장으로 임명된 노보쥘로프는 수리경제학을 소련 경제학의 주된 연구방법론으로 채택하도록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구소련 국민경제 5개년 계획 시기의 포스터
이들의 활동에서 크게 각광을 받는 부분은 1962년 소련 학술원 간부회 결의를 통해 학술원의 경제학 분과를 독립시킨 것이다. 이 결의에는 “과학적 연구기관들과 국민경제 계획의 실천에서 수학적 방식 및 현대적인 계산기의 연구와 도입 임무 수행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내용이 명시”되었다. 독립 경제학 분과에 채용된 인원들은 이후 소련 수리경제학의 발전을 지속시키는 데 기여했다.
소련 학술원 경제학 분과 독립과 함께 수리경제연구소들이 계속 설립된 것도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노보시비르스크의 과학연구도시 아카뎀고로독에 연구소가 개설되면서 젊은 수리경제학자들이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1959년 칸토로비치의 주도 아래 시베리아 지부 수학 연구소 수리경제학 분과가 개설되었고, 1961년에는 시베리아 경제·산업생산 조직 연구소의 부속 기구인 수리경제조사 연구실이 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수리경제 연구실에 전자계산소가 설치되면서 점차적으로 연구소들에 대한 지원 확대가 요구되었다. 마침내 1963년에 중앙수리경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 학술원 시베리아 지부 수리경제연구소들과 함께 소련 수리경제학 연구의 양대 축이 되기에 이른다.
경제 사이버네틱스의 도입과
수리경제학의 헤게모니 확대
한편 2차대전을 전후로 등장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도 소련 수리경제학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이버네틱스는 인공지능과 제어계측 등 다방면에 걸친 학제간 연구이자 종합 과학으로서 미국은 군사기술과의 높은 연관성 때문에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소련에서는 사이비 부르주아 과학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과 우주개발 및 무기경쟁 체제에 돌입함에 따라 수학 및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사이버네틱스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러면서 소련 경제학자들 역시 사이버네틱스를 경제학 연구에 적극적으로 결합시켜 경제계획을 보다 과학화·체계화하고자 했다. 이때 수학자와 경제학자들이 사이버네틱스 학술위원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며 여러 학술회의를 개최했고 넴치노프 역시 참여했다. 이후 전자계산소와 경제 사이버네틱스 연구소 및 학과가 개설되면서 1970년대에는 소련 전역에 경제 사이버네틱스 학과가 만들어졌다.
경제학 교육에 있어서도 수리경제학은 그 위상을 확대했다. 1955~58년 기간 동안 소련 주요 대학 경제학과에서는 정치경제학에 가장 많은 비중을 할애했고 기초 통계학과 회계학, 고등 수학에는 아주 낮은 비중을 두었다. 하지만 레닌그라드 대학 경제학부에서 수리경제학적 연구 방법에 높은 비중을 둠에 따라 나중에는 정규 학습 기간 5년 동안 경제사나 마르크스의 『자본』 관련 과목 시수는 0시간인 반면, 수리경제학 관련 교과 시수는 1,516시간에 달하게 된다.
수리경제학파의 영향력은 경제학 학술지와 저서 등 경제학 매체에도 미쳐 수리적 접근법과 관련된 논문과 해외 번역서의 출간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특히 1956년 헝가리 봉기 이후 소련 내에서 개혁에 대해 강한 반감이 있었는데도 서방의 과학과 기술 도입이 필요하다는 대전제 아래 대표적인 시장사회주의자인 오스카르 랑게의 저서가 번역·출간되며 논쟁에 불이 붙었다. 소련 수리경제학자들의 저술도 꾸준히 출간되는 시점에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이 공식적으로 비판을 전개함에 따라, 수리경제학자들 또한 반비판에 돌입했다. 논쟁의 결과, 시베리아의 수학자나 경제학자들만이 아니라 모스크바의 학자들 역시 칸토로비치 등의 수리경제학적 입장을 지지하게 되었다.
연구자는 소련 경제학계의 헤게모니 이동을 역사학적으로 서술하는 데 집중한다. 여기서 좀 더 해석을 시도하자면, 계획경제는 단순히 할당량을 당의 기준에 맞게 충족시키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지식(앎)을 통해 자원을 배치하는 통치government의 문제임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헤게모니 장악은 당대 소련에서 ‘경제’를 사고하는 방식을 드러내는 한편, 계획경제라는 구조물을 구축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러한 변화가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1945년, 즉 2차 대전 이후 소련에서 진행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이라는 전반적 조건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건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한 수리경제 연구자들의 신속한 조직적 움직임이었다. 이들은 당시 지도부부터 작업장 수준에 이르기까지 요구되고 있던 경제관리와 경제이론의 괴리문제 해결을 실용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이론적 수단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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