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카이브 기고문(2016.04.11)
알파고와 앙상블을 이루며 살아가는 방법
기술을 통한 정치적 변화를 질베르 시몽동에게서 찾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을 전후로 해서, 기계의 역량에 대한 재평가가 대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무인자동차와 같은 미래 기술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는 한편, 『인간은 필요 없다』 같은 책을 통해 ‘노동의 종말’을 상상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점차 늘고 있다.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일이 현실로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전혀 근거 없지만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기계를 둘러싼 이런 부정적 입장들은 사실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술결정론이나 테크노크라시즘(기술관료주의)에서 비롯된 진보 사관과 낙관주의의 단순한 이면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질베르 시몽동에서 기술과 정치」(김재희, 철학연구 108권, 2015년)는 우리가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적 대상인 기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계를 막연히 상찬하거나 두려워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우리가 기술과 공존할 수 있는 문화를 발명할 가능성을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의 관점에서 탐색하고자 한다.
기술철학자
질베르 시몽동의 재발견
기술이 인간을 진보로 이끌 것이라는 믿음은 산업 혁명으로 고도의 경제 발전을 이룬 19세기에 정점에 이르렀고 오늘날에도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생태 위기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것임이 알려진 지금에 와서는 기술만능주의가 한풀 꺾였다고 할 수 있지만, 다시금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술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기술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 자체가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 스마트폰과 SNS처럼 고도의 기술이 갖는 양면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정치 체제와 양립할 수 있는 기술을 탐색해야 한다는 관점 또한 제기되고 있다.
이때 저자가 주목하는 철학자는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1924~1989)이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조류 중 하나인 자율주의자 그룹이 간간이 언급했던 것 외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1년에 그의 박사학위 부논문인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가 번역되면서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시몽동은 루이 알튀세르와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이른바 ‘프랑스 철학자들’과 같은 시대를 살다 간 철학자로서 특히 질 들뢰즈는 「질베르 시몽동에 대하여」라는 소논문을 통해 시몽동의 관점을 해석하면서 자신만의 이론을 구축했다. 그리고 들뢰즈 이후 시몽동의 기술철학은 브뤼노 라투르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등 기술적 대상의 존재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시몽동의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기술적 대상들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존재론이다. 시몽동은 종래의 질료형상 도식을 비판하면서 기술적 대상을 인간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만들어 진 한낱 도구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기존의 노동 패러다임 역시 비판하는데, 기술적 활동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며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함에 따른 노동자의 소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인간과 기술적 대상 사이의 관계 변화에서 오는 심리-생리학적인 소외라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단지 “생산 수단들의 공유화는 그 자체로 소외의 축소를 가져올 수 없다”고 하면서 국유화와 같은 종래의 좌파적 프로그램만으로는 소외를 극복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질베르 시몽동(1924~1989)
개체화와
인간과 기술의 앙상블
여기서 시몽동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과 기술이 새롭게 구성하는 앙상블ensemble이다. 그가 보기에 20세기는 정보이론의 등장과 함께 기술적 개체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기술적 앙상블’의 시대가 될 것이며, 그래서 기계를 도구 수준에서 다루는 계몽주의 시대의 휴머니즘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
논문에서는 시몽동에 대한 저자의 연구를 밑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시몽동의 기술철학에 대해 간단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시몽동은 기술적 대상이 요소와 개체의 단계를 지나 앙상블의 단계를 거치며, 기술적 대상은 이런 과정을 통해 진화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요소는 기술적 대상의 핵심을 응축한 것이고, 개체는 요소로 구성된 기술적 개체 자체이며, 앙상블은 이 개체들이 모여서 만들어 진 기술적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개체는 자신이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을 창출하는 동시에 이 환경과의 관계를 통해 작동한다. 예를 들면 제어그리드(요소)는 진공관(개체)을 구성하고, 진공관(개체)은 컴퓨터(개체)를 구성하며, 이렇게 구성된 컴퓨터는 인간이 그걸 활용할 수 있는 사무실 같은 환경과 연결될 때 비로소 작동할 수 있다(개체-연합환경). 이 컴퓨터는 자동화 공장에서 활용되고(앙상블), 자동화 공장은 다시 제어그리드(요소)를 생산한다.
시몽동은 요소에서 개체-연합환경으로, 개체-연합환경에서 앙상블로, 다시 앙상블에서 요소로 이어지는 흐름을 ‘개체화’로 요약한다. 개체화는 ‘준안정적인 장의 변환적인 형상화 작용’으로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는데, 과포화 상태의 용질에 용매를 투입함에 따라 결정이 형성되는 현상이 대표적인 개체화 과정이다. 여기서 용질이 그 자체로 폐쇄적이고 자기 완결적인 상태에 있지 않고 외부의 자극(용매)에 개방된 준안정적인 상태라는 것이 중요하다. 시몽동은 물리 세계는 물론 사회 체제 역시 준안정적인 시스템이라는 관점을 고수하면서 시스템의 개방성과 불안정성에서 빚어지는 긴장을 긍정한다.
개체를 넘어선
집단적인 기술 문화의 창조
그래서 시몽동은 준안정적인 과포화 상태에서 더욱 준안정적인 시스템으로 진화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주체로 기술자(엔지니어)를 꼽는다. 기술자는 발명의 주체로서 기술적 대상을 만들고 그에 개입함으로써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기술을 통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발명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시몽동은 기술에 따른 진보를 낙관하는 기술결정론적 관점은 물론 ‘인간성’에 초점을 둔 문화적 보수주의와 모두 거리를 두면서, 기술적 진화에 따른 집단적인 문화를 생성할 기술 문화의 페다고지를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기술을 배척했던 인문학적 문화에서 벗어나 20세기에 적합한 기술적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기계의 심리학자 혹은 기계의 사회학자인 ‘기계학자’는 엔지니어-철학자로서 새로운 기술 문화를 창조하는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술 교육만으로 인간과 기계의 앙상블을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할까. 저자는 여기서 시몽동의 ‘개체초월적인 것transindividual’ 개념을 제시하면서, 개체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동시에 개체들의 발생적 근원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은 전前개체적 실재에서 집단적인 문화가 만들어 질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제 기술적 대상은 경제발전을 위한 도구나 인간의 직업을 강탈하는 괴물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이때 공감과 감동 같은 정서가 개체초월적인 것을 끌어내고 실현할 수 있는 주된 동력이 된다. 정서는 개체의 내면에 그치는 게 아니라 개체와 개체 사이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또 전파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체를 넘어선 집단적인 현상이다. 저자는 시몽동이 강조한 이런 ‘정동적 감동affectivo-émotivité’이 주체들 사이의 개체초월적인 집단적 연대를 가능하게 할 것임을 긍정한다. 시몽동의 관점은 우리가 기술적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그럼으로써 인간끼리는 또 어떤 관계를 발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주요한 힌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규범성을 넘어서 기술적 대상들 안에 ‘정치적 씨앗’으로 포함되어 있는 전前개체적인 것, 즉 새로운 가치로서의 정보, 바로 이것이 주체들 사이에 정서적 감동을 통해 전파되며 개체초월적 개체화를 가능하게 할 때 기술적 발명의 정치적 의미가 있다.” (1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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