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 르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열린책들, 2005)를 읽었다. 1963년도에 나온 이 '모던 클래식'은 냉소적 반공주의자가 쓴, 냉소적 반공주의자가 주인공인 소설이다. 007과 더불어 현대 스파이의 이미지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는 이 소설은 분명한 적대의 선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스파이를 보여준다. 지금 봐도 여전히 세련된 이 소설은 정치적 감상주의를 간결하고 냉소적인 문체로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의 미덕을 간직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공산주의(자)는 적대와 광신의 다른 이름으로 동원될 뿐이다. 르카레의 최근 소설이 갈수록 나이브해진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던 것 같다. 그건 적대의 선이 사라진 탈냉전 시대에 그의 정치적 감상주의가 처한 자연스런 귀결이 아닐까 억측을 해본다.
2. 지난 목요일에는 영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을 봤다. 영화는 역시나 별로였다. 하지만 역대 최악의 메타크리틱 점수와 로튼토마토 점수는 별개로 두고, 게임은 항상 영화를 욕망했다는 것을 이 영화 역시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째서 사용자의 능동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컴퓨터 게임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게임 안팎의 시도를 통해 영화가 되고자 욕망할까. 그건 게임이 제공하는 능동성이란 유사 능동성에 불과하며 '영화를 본다'는 저 수동적 행위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아닐까.
3. 영화는 대중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요물이자 대중의 삶을 변화시키는 마술이라는 양가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영화 보기의 '사유 없음'에 대한 비판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난 뒤의 공백을 어떻게 채우려 시도하는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중의 신경을 타격한 영화는 분명 시각적 폭력이지만, 폭력이 남긴 공백을 메우려는 과정에서 우리의 사유는 시작된다. 반면 게임은 공백을 남기지 못한다. 그건 게임이 영화보다 '열등한' 매체라서가 아니라 (게임은 기술적으로 영화보다 미술에 더 가까운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Monument Valley 같은 이른바 '인디 게임'은 게임의 조형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게임이 제공하는 유사 능동성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사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게임 속 참여를 통해 문제가 해결됨으로써 우리는 한 가지 과제를 끝냈다. 끝난 과제를 돌아 볼 필요는 없다. 물론 갈수록 게임은 자기 안으로 유저를 묶어두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럼에도 한 번 끝낸 게임은 '게임 이후의 시간'을 유저에게 제공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라는 꿈공장은 여전히 잘 돌아가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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