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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

아가씨 그리고 곡성

by parallax view 2016. 6. 8.

  월요일에는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봤고, 화요일에는 나홍진 감독의 <곡성>을 봤다.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아가씨>에서는 헐겁지만 예쁜 인형극을 보는 느낌을 받았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팀은 '박찬욱 월드'의 디테일을 여지없이 보여주지만, 나는 이 스타일로 가득한 영화에서 어떤 해방감도 느낄 수 없었다. 원작의 통속성을 좀 다르게 바꾸고 싶은 욕망은 막연한 희망을 환상적으로 그려 보이는 데 그친다. 그렇지만 적어도 낭독회 씬은 공간을 향한 집요한 탐미주의가 빛을 발할 때다. 문소리와 김민희가 번갈아가며 연기한 장면들은 어쨌거나 강렬하다. 


  <곡성>은 그 자체가 교묘하고 혼란스러우면서도 터무니없이 숭고한 궤변이다. 영화는 넓게는 인간의 고통에 대해, 좁게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동진이 요약하듯이 인간은 '카오스의 공포와 코스모스의 폭력' 사이에서 방황한다. 혹은 서동진의 표현을 빌자면 원인cause과 이유reason 사이에서 방황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불행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를 댄다. 그런 무참한 살인이 벌어진 건 버섯을 잘못 먹었기 때문이야, 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유를 가리킨다. 하지만 우리는 이유 같은 것에 납득하지 못한다. 그럴리가, 고작 버섯 좀 먹었다고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어, 이 일의 배후에는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거야, 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원인을 가리킨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인을 찾아 발버둥친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 잠시나마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제자리로 돌아온다. 언뜻 생각해 보면 이건 '부정의 부정'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변증법에 대한 것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은 걸까? 그러나 영화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더라도 결국 돌아오는 곳은 동일하다는, 순환론적이고 숙명론적인 결말을 보여준다. 제임슨은 변증법이 그 자체로 말장난, 즉 궤변처럼 보인다는 걸 지적했다. 하지만 그는 그러니까 궤변은 집어치우고 인과관계가 명확한 논리학을 지지해야 한다 같은 입장으로 선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집스럽게 궤변처럼 보이는 논리, 변증법을 옹호한다. 그렇다면 거대한 궤변 같은 영화에서 변증법을 읽어내려는 것도 해 볼 만한 시도이지 않을까? 너무 멀리 나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이 영화는 분명 어딘가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이 '무엇처럼 보이는' 것 자체가 영화의 미끼이며 함정일 것이다(오직 믿는 자만이 볼 수 있다. 이 점은 영화 안에서 여러 번 강조하며 묘사된다). 어쩌면 이 영화는 텅 비어 있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매혹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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