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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umfabrik

조금 늦은 전주영화제 관람 영화 단평

by parallax view 2017. 5. 4.

4/29(일) 

<아우스터리츠> 

W. G. 제발트의 동명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라 했다. 거치대에 놓였을 카메라는 미동 없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는 관광객을 비춘다. '다크 투어리즘'의 원조라 할 만한 이 수용소를 찾아 온 다양한 관광객을 지그시 바라보는 카메라는, 역사의 유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우슈비츠를 들고 나는 이들을 그렇게 바라만 보았다. 한 테이크가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단순한 구조다. 더위에 지쳐 느릿느릿 돌아다니는 관광객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사운드는 통제되어 있었다. 파이프를 탕탕 두들기며 떨어지는 물소리는 테러와 고통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처럼 들린다. 같은 유태인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선발되고 일이 끝나고 나면 처형당해 열세 번이나 바뀐 존더코만도, 그들 중 13기가 일으킨 1944년의 실패한 봉기 이야기가 가이드의 입을 통해 나올 때, 카메라는 관광객의 등 뒤에 선 존더코만도 동상을 넌지시 비춘다. 그 다음 장면에서는 배경의 정가운데 둔다. 이런 식의 강조는 영화의 마지막에 변주된다. 카메라는 저 악명 높은 문장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가 새겨진 대문을 지나는 인파를 세 개의 신에 담는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중 유력한 것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관광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손쉽게 비난하기보다 역사적 외상이란 그런 관광상품을 가로지르며 드러난다는 것임을, 무엇보다 그런 관광상품을 통해서 비어져 나오는 것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혁명을 하려던 삶의 절반은 무덤에 묻혀버렸다> 

2012년 캐나다 퀘벡의 대규모 대학 등록금 인상 반대 시위의 여파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른바 '단풍의 봄' 이후 각기 다른 계급과 섹슈얼리티를 가진 청년들은 그들만의 코뮌에 살면서 자기 나름의 '혁명 활동'을 한다. 그 혁명 활동이란 게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전광판의 조명을 깨부수거나 대충 만든 하얀 가루를 정부기관에 우편으로 부치거나 자본의 개돼지들이 모이는 레스토랑에 불을 지르는 것이지만. 연출은 조잡하고 자의식만 넘치는 영화였다. 신체의 전시는 너무 손쉽고, 온갖 혁명적 구호를 문자 그대로 도배하는 연출은 어떤 충격도 주지 못한 채 지리멸렬할 뿐이다. 배우들이 보여주는 혁명 코스프레(자신들의 급진성을 스스로 배신한다고 느낄 때 그들이 연출하는 자아비판이라든지, 사랑이 아니라 전쟁을 해야 한다든지, 『공산당 선언』의 프롤레타리아를 '청년'으로 바꿔 읊는다든지 등등)는 연출자들이 생각하는 혁명이란 겨우 반달리즘에 불과하며, 주관성의 지옥을 헤매고 다니는 것뿐이라는 인상을 준다. 자신들이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다고 믿는 몇 가지 장면을 역사에서 뜯어와 덕지덕지 붙이는 꼴을 보고 있자니 화가 났다. 



5/1(월) 

<네버 에버> 

돈 드릴로의 소설 The Body Artist가 원작이라 한다. 남성 영화감독이 여성 퍼포머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한다. 얼마 가지 않아 남자는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혼자 남은 여자는 남자의 말과 행동을 반복한다. 이야기는 남자의 죽음을 계기로 분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가 죽기 전에는 남자의 이야기인 것 같다가, 남자가 죽고 나자 여자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남자는 부재하는 중심이 되며, 여자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자의 환상 속에서 남자는 살아 있다. 여자가 텅 빈 욕조에 물을 담고 이미 죽었지만 그녀 앞에 나타난 남자를 씻길 때, 남자는 다음 컷에서 여자가 된다. 그 다음 컷에서는 부재한다. 이런 '부재하는 존재'에 대한 집착은 남자가 여자를 처음 만날 때 암시된다. 여자는 어두운 공연장 한가운데에서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녀는 바르게 편 오른손을 천천히 천장을 향해 뻗다 손을 오므리며 다시 팔을 내린다. 남자가 반하는 순간은 바로 그때, 여자가 흡사 빛을 그러쥔 것처럼 오므린 손을 지그시 바라볼 때다. 사랑이란 타인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것, 자기애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듯한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사랑에 대한 너무나 협소한 정의를 실연한다. 


<나의 친구 이반 라프신> 

알렉세이 게르만 전작 회고전의 작품들 중 하나다. 감독은 숙청이 공공연히 벌어지던 1930년대 소련을 자신의 회상과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적백내전 때 복무했던 이반 라프신은 경찰로 일한다. 그는 친근하고 성실하면서도 엄격하다. 라프신은 노동자의 친구이자 범죄자의 적으로, 혁명의 대의에 묵묵히 복무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범죄자를 잡기 위해 라프신이 안개 자욱한 마을을 습격하는 시퀀스다. 영화에서 범죄자는 흉악한 살인범이다. 그를 처벌하는 것은 일견 정당하다. 하지만 우리는 '인민의 적'이 된 이들에게 가해졌을 테러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라프신과 경찰들이 공동주택을 습격할 때 여자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비명소리, 그들의 높고 고통스럽고 웅얼거리는 소리는 테러를 증언하는 듯하다. 한편 영화에서는 유독 트래킹숏이 돋보인다. 카메라는 누군가를 쫓는 것이 일인 사람을 뒤쫓는다. 트래킹숏을 통해 영화는 리듬감과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밖에도 영화는 1930년대 당시의 생활상(집단주택에서 아웅다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목재 밀수꾼들, 시끌벅적한 극단, 곳곳에서 울려퍼지는 '붉은 노래들')을 검열 속에서도 드러내는 듯해 흥미로웠다. 영화는 당시에 대한 감독의 양가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듯하다. 아마도 그때 그곳이 역사학자 올랜도 파이지스가 말하는 '속삭이는 사람들'의 사회인 동시에, 지젝이 말하는 식의 '잃어버린 대의'를 고수한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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