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raumfabrik

바닷마을 다이어리

by parallax view 2015. 12. 26.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보았다. 그의 전작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그리고 어른들과의 관계 밖의 관계, 즉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자기와 관계를 맺어갈 것인가를 조명한다(아이들은 또한 그렇게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주인공 소년의 소원은 헤어진 엄마 아빠가 화해하는, 가족의 회복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세계 평화라는 공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렇게 소년은 '청년'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어른이 어떻게 아이와 관계를 맺어가면서 어른이 되어 가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두 작품 사이의 어딘가에서 엉거주춤한다. 그의 작품들이 항상 예리하거나 날카로운 것은 아닐 테지만, 확실히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비교하면 실망스러운 결과물이다. 일상 속에서 서로를 물어뜯고 할퀴는, 연대 속에 숨은 비수를 카메라가 전혀 비추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너무 쉽게 봉합되고 바닷마을의 풍경에 자리를 양보한다. 분명 잘 찍은 장면들도 있다. 예컨대 카메라는 아이들이 불꽃놀이를 할 때 하늘로 날아올라 명멸하는 불꽃을 직접 비추지 않는다. 불꽃은 아이들이 탄 배를 띄우는 바다에 반사되고, 아이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반면 어른들은 야근 중에 겨우 옥상에 올라와 멀찌감치 불꽃을 바라본다. 불꽃은 그때에야 건물 틈 사이로 솟아오르며 관객의 시선을 마주한다. 같은 불꽃이지만 서로 다른 각도에서 볼 수밖에 없음을, 두 세대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거리를 영화는 그렇게 표현한다. 


  그러나 그런 영화적 표현은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 특히 이복동생 막내를 향한 관음증적 시선에 의해 그 빛을 잃는다. 단지 작품의 한계를 원작의 중력에서 찾아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는 상징적 부모 없이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자신과 똑같은 위치에 선 아이를 데리고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영화는 아이를 들이는 유사 부모로서의 큰 언니와, 새로운 가족에 진입하는 아이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카메라는 집요하리만치 아이의 얼굴을 쫓는다. 그리고 아이가 어른들과 함께한 시간을 아름답게 비춘다. 하지만 전작들(내가 아는 전작의 범위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과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 머문다는 게 이 글의 약점이다)에서 고수해 온 거리감이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는 증발한다. 카메라는 비를 맞으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뒤를 쫓는다. 아이가 마루에 앉아 비에 젖어 들러붙는 양말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갈 때, 그 동안 아이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던 발라즈적 시선은 아이를 몰래 훔쳐보는 관음증적 시선으로 탈바꿈한다(그 다음 신에서, 카메라는 아이가 수건으로 알몸을 감추었다가 선풍기 앞에서 확 펼치며 젖은 몸을 말리는 모습을 뒤에서 비춘다. 하지만 이 장면은 뒤이은 큰 언니의 애정 섞인 잔소리에 의해 관음증적 성격을 벗어던진다. 당연히, 관음증은 이 장면이 아니라 그 전에 부각된다). 


  사실에서 허구의 재료를 구해왔을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허구에서 새로운 허구를 길어내는 것이 그리 맞지 않는 옷이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고레에다 감독이 스스로 빠져든 함정처럼 보인다. 그가 빠진 함정은 이 세계가 어떻게 되든 아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간다는 관점에서 후퇴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건 아닐까 억측을 해본다(그렇다면 돌봄이 사라져 버린, 세계의 한복판에 방치된 아이들을 다룬 <아무도 모른다>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남는다). 물론 아이들은 어른들 없이 살아남기 어렵다. 아이들은 돌봄 없이는, 무엇보다 억압 없이는 어른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돌봄과 억압의 대상인 아이는, 그 이전 영화들에서 아이들이 보여준 능동적인 측면 대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수동적인 측면만 부각된다. 영화 속 아이는 만화책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예쁘기만하다. 앞머리를 머리끈으로 묶어올린 채 축구에 열중하고 친구들과 놀며 까르르 웃는다. 그러다 이복동생이라는 위치와 더 나이 든 어른들의 시선에 결박되어 어쩔 줄 몰라 한다. 그녀의 내면은 자전거에 타 가마쿠라 벚꽃길을 달리는 모습으로, 얼굴을 물들이는 불꽃으로, 언니들과 함께한 불꽃놀이로, 높은 언덕을 씩씩하게 오르는 발걸음으로, 가마쿠라 풍광 속에 던지는, 그 동안의 외로움을 담은 외침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그런 묘사는 어딘지 불충분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소녀가 소년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털어놓는 장면이 추가된다(그 소년은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속없이 웃어대지만 누구보다 형을 좋아하는 동생으로 나온다. 여기에서도 소년은 비슷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아이의 내면이 아름다운 가마쿠라의 풍광으로 박제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 누구보다 혼란스러웠을 아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작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런 작업이 과연 있었을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다음 작품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스스로 만든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Traumfabrik'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가씨 그리고 곡성  (0) 2016.06.08
암살  (0) 2016.01.12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0) 2015.10.05
엑스칼리버  (0) 2015.10.05
군도 : 민란의 시대  (0) 2014.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