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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by parallax view 2016. 2. 1.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2004, 문학동네)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었다. 이 책은 발터 벤야민이 남긴 「파사젠베르크」 유고 혹은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개론서 같은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여기서 벅 모스는 탐정이 되어 발터 벤야민의 유고를 그의 생애와 함께 살펴본다. 그녀에게 탐정이라는 비유를 불쑥 들이대는 것은, 파사젠베르크는 존재하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의 일생일대의 기획, 말 그대로 그가 온 생애를 건 지적 도박은 결코 한데 모아지지 못했다. 「파사젠베르크」는 자본주의 세계의 잿더미를 표상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본인이 직접 문서고를 뒤져 얻어낸 오래된 신문 기사, 광고 문구, 소설에서 끄집어낸 인용문 따위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산만하다. 하지만 그런 산만함이야말로 그가 의도하는 바다. 벤야민은 '지금 시간'을 살고 있는 우리가 과거의 파편에 숨은 유토피아적 순간이자 악몽 같은 순간을 함께 바라볼 때, 꿈의 세계에 빠져 있는 우리들의 시간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벅 모스는 벤야민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을 절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친구 게르숌 숄렘이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것처럼 벤야민을 카발라 이론과 메시아주의의 사도로 규정하는 관점이 한쪽에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벤야민과 브레히트 사이의 교류라던가 벤야민이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이라는 개념을 결코 놓지 않은 점을 들어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자리매김하려는 시도가 있다(오늘날의 상황과 빗대자면, 아감벤 같은 이들이 강조하는 대로 바울-마르키온-벤야민-타우베스라는 신학자의 계열이 한쪽에 있을 것이고, 바디우와 지젝처럼 바울-사도들-자코뱅-볼셰비키라는 혁명가의 계열이 한쪽에 있을 것이다. 논외로, 짐멜-벤야민-프랑크푸르트 학파라는 미학자/사회학자의 계열과 벤야민-플루서-키틀러/매클루언이라는 식의 매체이론가의 계열이 또한 있을 것이다). 이때 벅 모스는 형이상학자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얼핏 상충하는 그림은 사실 하나임을 강조한다. 거칠게 말해서 벤야민은 형이상학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다. 더 나아가자면 벤야민은 형이상학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이고, 그 반대 역시 성립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비판은 항상 신학을 경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저 악명 높은 『자본』 1권의 서두에서 강조한 것처럼,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상품은 사실 형이상학적 궤변과 신학적 잔소리로 가득차 있다. 벤야민은 우리를 둘러싼 상품의 세계는 사실 꿈의 세계라는 걸 간파하고, 그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신학을 경유해야만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역사철학 테제)」에서, 신학을 무적의 체스 기계 안에 들어가 기계를 돌리는 난쟁이에 빗댄다. 이 체스 기계의 이름은 역사유물론이다. 여기서 벤야민은 신학이 역사유물론의 정체라던가 동력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정반대로 말한다. 역사유물론이 이 왜소하고 못생긴 신학을 자기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와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 있다고. 


  다시 벅 모스의 추리로 돌아오자면, 그녀는 벤야민의 모든 작업이 「파사젠베르크」를 구심점으로 돌아간다고 해석한다. 벤야민의 세속적인 실패가 담긴 『독일 비극의 기원(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부터, 『일방통행로』도, 「초현실주의」도,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도, 「신학적-정치적 단편」도,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도,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도,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도, 그리고, 그리고…. 이때 「파사젠베르크」가 이들의 핵심을 응축한 다이제스트라거나 여기서 언급한 글들이 「파사젠베르크」를 부분적으로 반영한다고 생각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벅 모스는 「파사젠베르크」가 1만 2000개의 철제 조각과 250만 개의 리벳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철제 몽타주, 에펠탑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벤야민은 과거의 이미지에 캡션을 넣음으로써, 즉 몽타주를 만듦으로써 대중에게 충격을 주고자 했다(오늘날에는 인터넷을 하는 대중이 몽타주를 만든다. 중생을 가엽게 여기는 티벳여우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벤야민이 추구한 변증법적 이미지다. '정지 상태의 변증법'이라는, 저 수수께끼 같은 표현은 사진과 영화를 두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영화가 세계를 부술 망치가 되리라 믿었던 씨네필의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이제 그런 시절은 한참 전에 지났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만일 것이다(한편 아도르노는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가 시대에 뒤처졌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직관적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몹시도 손사래쳤다). 


  언젠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했듯이, 자본주의가 최선의 체제이자 최악의 체제임을 동시에 사고하는 것이 바로 변증법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몽타주가 TV 예능의 지배적인 논리에 전유되는 것과 함께 혁명적 분출의 가능성 또한 간직하고 있음을 아는 것 또한 변증법이다. 그런 점에서 벤야민의 변증법적 이미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때문에 벅 모스는 책의 말미에 '남아 있는 이미지'를 삽입해 벤야민 식 몽타주를 실험한다. 그녀가 강조하는 것처럼 "지금 벤야민을 읽는 것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의 글이 위대한 작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정치적 관심이 여전히 이 시대의 정치적 관심이기 때문"이다(옮긴이가 한 번 더 인용한 이 문장이 본문에 분명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추. 조르주 페렉의 『인생사용법』을 읽고 난 뒤, 그를 두고 '마르크스 이후로 상품의 세계로 내려간 작가' 운운한 것은 역시나 호들갑이었다. 사소한 사물의 세계로 내려간 두 작가를 빼놓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와 발터 벤야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