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7, 문학동네)
아즈마 히로키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은 오타쿠를 포스트모던한 존재로서 그려 낸다. 그의 구상은 일찌감치 문화연구 분야에 잘 알려졌고, 이미 익숙해진 것이기도 하다. 때늦긴 했지만 언젠가 한 번은 직접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아즈마는 프랑스의 헤겔 연구자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펼친, 근대의 인간이 마주한 자화상으로서 '동물화'와 '스노비즘'의 이분법을 재해석한다. 코제브는 2차 대전 이후의 미국에서 만연한 소비주의를 통해 욕구의 충족이 최상의 덕이 된 인간을 자기반성이 없는 '동물'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일본인을 세계에 대한 냉소를 품으면서도 무의미한 부정을 통해 이 세계가 지탱하는 데 협력하는 속물로 보고 앞으로 세계는 이들의 '스노비즘'이 일반화될 것이라 전망한다. 아즈마는 코제브의 논의를 뒤집어, 스노비즘의 시대가 가고 자신의 욕구에 철저히 복무하는, 동물화하는 인간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는 리요타르 이후의 '포스트모던'한 세계에 관한 주장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표면과 심층의 대립 속에서 거대 서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던 근대인은 사라지고, 오로지 표면에 드러난 시뮬라크르에 안주하는 인간이 가득한 포스트모던 세계 말이다.
하지만 아즈마는 오타쿠가 단지 상품의 시뮬라크르 혹은 스펙타클에 머물면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한 낙오자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거나 비난을 가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타쿠야말로 포스트모던의 논리를 체화한 존재로서 그들의 행동방식이 일본을 넘어서 전 세계적인 현상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때 아즈마가 끌어들이는 개념은 '데이터베이스'다. 거대 서사가 붕괴된 자리에 거짓 서사를 덧붙여 그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시대에, 오타쿠들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된 설정을 가지고 놀면서 평면적인 이야기를 창출하며 논다. 이때 데이터베이스는 결코 거대 서사가 될 수 없다는 게 중요하다. 데이터베이스는 캐릭터의 설정과 '모에 요소'라 불리는 코드, 오타쿠가 공유하는 사회적 관습의 집합과 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일본과 한국에서는 '미디어믹스'로, 영미 등 해외에서는 '프랜차이즈'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영화-게임-소설-만화/코믹스 사이의 이종교배로 나타나고 있다. 아즈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데이터베이스를 소비하는 인간은 웹의 작동방식을 거의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복제 가능한 프로그램은 또한 해체와 재조합이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어디에도 본질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정된 본질 위에 여러 개의 프로그램이 병존할 수 있다. 아즈마에 따르면 오타쿠가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아즈마는 오타쿠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적 설명이자 메타-후기구조주의적 설명을 수행한다. 즉 그의 책은 여러 오타쿠계의 매체와 문법을 끌어들이지만, 내용을 덜어내고 형식에 주목한다면 문화연구 분야에서는 아주 익숙한 방식의 진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때 아즈마가 상징계와 상상계라는 라캉주의적 논의를 잠시 끌어오긴 하지만, 그리고 그가 '경제'를 아주 간접적으로나마 끌어들이긴 하지만, 아즈마는 외상으로서의 실재(the real)를 논하지 않고 또 문화의 경제적 논리(혹은 제임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를 간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과 '정보혁명'에 예민한, 이른바 선진국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문화 논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이런 맥락에서 '비물질노동'이나 '정동적 노동' 같은 개념을 통해 정보화된 세계의 계급투쟁을 시도하는 자율주의가 제법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계도 정보도 결국 물질이라는 것을, 그런 물질을 생산하는 데 끊임없이 '산 노동'이 필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아즈마는 오타쿠 문화가 전적으로 일본적인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이후 미국화와 긴밀하게 연관된 것임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아즈마의 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문화 생산의 논리'에, 그리고 매체론의 관점에 너무 깊이 천착하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여담으로, 아즈마 히로키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팝아트 작업에서 '모에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을 했다. 이는 무척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아즈마가 해석한 대로 무라카미에게는 오타쿠로서의 요소, 모에 요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타쿠계 문화를 팝아트로 재현할 수 있었고, 또 그럼으로써 반성적으로 거리두기 할 수 있었다. 오타쿠에게는 불편한 일이겠지만, 불편하지 않은 예술은 없음을 생각한다면 그런 점에서만큼은 무라카미의 작업이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참고로 아래 사진은 무라카미 다카시의 <My Lonesome Cowboy>(1998).
무라카미는 62년생으로 오타쿠라면 제1세대에 해당하며, 애니메이션이나 피규어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을 많이 발표하면서 '완전한 오타쿠가 되지 못한 오타쿠'를 자칭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DOB> 연작이나 <S·M·P·ko2> 연작에서 보이는 것처럼 오타쿠계 문화에서 독특한 발달을 이룬 캐릭터 디자인에 주목해 그 특징을 그로테스크할 정도까지 강조하고 해체하고 변형함으로써 만들어지고 있다. 필자는 그 이미지가 오타쿠적인 시뮬라크르의 이형異形을 미술작품으로 승화시킨 뛰어난 시도라고 생각하지만, 오타쿠들의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다. 그뿐 아니라 무라카미의 시도는 그의 작품에 협력하고 있는 오타쿠들로부터도 종종 비판을 받고 있다.
무라카미와 오타쿠들 사이의 이와 같은 불일치의 이유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그 하나는 위와 같은 오타쿠계 문화의 구조적인 특징에 있다. 피규어 원형사이자 편집자이며 <S·M·P·ko2> 제작의 중심인물이기도 했던 아사노 마사히코는 어느 이벤트에서 무라카미에게는 '오타쿠 유전자'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아마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라카미에게는 오타쿠계 작품을 '오타쿠적'이게 하는 여러 가지 특징을 직감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즉 모에 요소를 파악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본래 현대미술의 비평적인 세계에서는 시뮬라크르의 생산은 '새로운 전위를 구성하기 위한 무기'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그리고 필시 무라카미 또한 당초에는 오타쿠계 문화의 표층에 대해 그와 같은 '전위'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문맥에서 이해하면 <DOB>나 <S·M·P·ko2>는 확실히 오타쿠적인 디자인이 가진 가장 과격하면서도 무근거한 부분을 추출해 순수화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며 그 점에서 높이 평가될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오타쿠들에게는 무라카미의 그 실험은 모에 요소의 데이터베이스를 이해하지 못하고 디자인이라는 시뮬라크르만(즉 표층만) 추출하여 모방한 불완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시뮬라크르에 대한 이와 같은 생각의 차이가 무라카미의 시도에 대한 현대미술 측의 평가와 오타쿠 측의 평가에 커다란 차이를 낳고 있다.
무라카미의 시도가 아무리 오타쿠적인 의장을 빌려왔다고 해도 데이터베이스의 수준이 없으면 본질적으로 오타쿠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이 그의 미술가로서의 평가를 높이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오타쿠적인 디자인을 빌리는 것과 그 배후에 있는 문화적인 구조를 이해하는 것 사이의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민감해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무라카미의 시도는 오타쿠계 문화의 구조를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일면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는 점이 있으며, 그런 점에서 결코 차용에 그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한다. 디지캐럿을 비롯한 오타쿠계의 디자인은 때로 매우 과격한 지점에 도달해 있지만 작가의 의식으로는 모에 요소의 조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 과격함을 당사자가 자각하지 못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무라카미의 작품은 그와 같은 무자각을 깨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이다. (112 ~ 1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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