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2015, 문학과지성사)
한병철은 신간 『에로스의 종말』을 통해, 한병철식 '부정적인 것에 머물기'(지젝) 혹은 한병철식 '사랑 예찬'(바디우)을 시도한다. '할 수 있음'만을 강조하는 과도한 긍정성의 세계에서 끊임없는 자기 착취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는 사랑을 해야 한다. 그에 따르면 "할 수 있다"의 반대말은 "할 수 없다"가 아니다. "할 수 있을 수 없다"이다. 한병철은 그의 대표작 『피로사회』에서 바틀비의 "나는 그러지 않는 편이 낫겠어요(I would prefer not to)"가 무위의 부정적인 힘도 아니고 "정신성"에 본질적인 중단의 본능을 표현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아무런 의욕도 없는 무감각 상태의 징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피로사회』, 56쪽). 한병철식 '할 수 있을 수 없음'은 우리가 바틀비의 무감각한 상태, 긍정성에 함몰된 끝에 다 타버린 한 줌 재가 되지 않기 위해 제안된 전략이다. 사랑을 할 때만, 우리는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상태가 된다. 사랑은 내가 어떻게 해서 바뀌거나 변하거나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만약 사랑이 그런 것이라면, 즉시 포르노그래피로 전락한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감정, 그런 상태가 자신을 동일성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읽을수록 너무나 관념적인 한병철의 제안이 유혹적이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만이 혁명적일 것이라는, 혹은 사랑과 정치, 사랑과 혁명 사이에는 근친성이 있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다. 왜냐하면 사랑은 우리 삶을 뒤흔드는 외상(trauma)이고 세계의 예측 불가능한 수수께끼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병철이 바디우의 『윤리학』에서 인용한 이 문장이 책 전체의 내용을 요약해줄 것이다.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살아가는habiter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에로스의 종말』, 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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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에로스의 정치
에로스에는 "보편적인 것의 씨앗"이 담겨 있다. 아름다운 몸을 바라볼 때 나는 이미 아름다움 자체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 생성"하도록 영혼에 자극과 동력을 가한다. 에로스에서 정신적 추진력이 발원한다. 에로스에서 동력을 얻은 영혼은 보편적 가치를 지닌 아름다운 것, 아름다운 행위를 산출한다. 이것이 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학설이다. 그것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그저 감각과 쾌락에 대해 적대적이기만 한 이론은 아니다. 오늘날처럼 성애로 비속화된 사랑은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의 보편적 성격을 잃어버린다.
플라톤에 따르면 에로스는 영혼을 조종한다. 에로스는 영혼의 모든 부분, 즉 충동epithymia, 용기thymos, 이성logos을 전반적으로 지배한다. 영혼의 모든 부분은 각자 자기 나름의 쾌락 경험을 지니며, 아름다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다. 오늘날에는 무엇보다도 충동이 영혼의 쾌락 경험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따라 용기를 동력으로 하는 행동은 드물어진다.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는 이를테면 기존의 질서와 근본적으로 단절하면서 새로운 상태의 시작을 촉발하는 분노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분노는 사라지고 짜증과 불평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짜증과 불평에는 단절의 부정성이 없다. 그것은 기존의 질서를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둔다. 또한 에로스 없는 이성은 데이터를 동력으로 하는 계산으로 전락한다. 계산으로서의 이성은 사건, 예측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에로스를 결코 충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에로스는 충동뿐만 아니라 용기까지도 관장한다. 에로스의 자극에 의해 용기는 아름다운 업적을 이룰 수 있다. 아마도 에로스와 정치가 만나는 접점이 바로 용기일 것이다. 하지만 용기도, 에로스도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정치는 단순한 사무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 신자유주의는 특히 에로스를 성애와 포르노그래피로 대체함으로써 사회의 전반적인 탈정치화를 초래한다. 신자유주의의 토대는 충동이다. 각자 고립되어 있는 성과주체들로 이루어진 피로사회에서는 용기도 완전히 불구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의 행위는 불가능해진다. 집단적 주체로서의 '우리'는 성립할 수 없다.
물론 사랑의 정치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정치는 언제나 적대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정치적 행위의 어떤 차원에서는 에로스와의 폭넓은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에로스는 정치로 변형된다. 정치적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생겨나는 사랑 이야기들은 에로스와 정치 사이의 비밀스러운 연결을 드러낸다. 바디우Alain Badiou는 정치와 사랑의 직접적 결합을 부정하지만, 정치적 이념의 기치 아래 실천과 참여로 점철된 삶과 사랑 특유의 강렬함 사이에는 "신비로운 공명" 같은 것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마치 "그 소리와 힘에서는 완전히 상이한 두 악기가 위대한 음악가에 의해 하나의 곡 속에 합쳐져서 신비로운 어울림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 더 정의로운 세계에 대한 공동의 욕망에서 나오는 정치적 행위는 어떤 심층적 차원에서 에로스와 상관관계를 이룬다. 에로스는 정치적 저항의 에너지원이다.
사랑은 "둘의 무대"다. 사랑은 개별자의 시점을 벗어나게 하고, 타자의 관점에서 또는 차이의 관점에서 세계를 새롭게 생성시킨다. 이로 인해 일어나는 근원적 전복의 부정성은 경험과 만남으로서의 사랑이 지니는 특징에 속한다. "내가 사랑의 만남이 주는 영향 아래 있을 때, 만일 그것에 진정으로 충실하고자 한다면, 평소 나의 상황을 알아가는habiter 방식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 뒤집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건"은 "진리"의 계기로서, 기존 상황 속에, 살아가는 습관 속에, 새로운, 완전히 다른 존재 방식을 도입한다. 사건은 상황이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일으킨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동일자의 세계를 중단시킨다. 사건의 본질은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출발시키는 단절의 부정성에 있다. 사건적인 성격을 통해 사랑은 정치 또는 예술과 결합된다. 이들은 모두 사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초월적 충실성은 에로스의 보편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신의 부정성, 완전히 다른 것의 부정성을 성애는 알지 못한다. 성적 주체는 늘 동일하다. 그에게는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소비 가능한 성적 대상은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적 대상은 결코 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못한다. 성애는 동일자를 재생산하는 습관적인 것의 질서에 속해 있다. 그것은 한 개별자의 다른 개별자에 대한 사랑이다. 여기에서는 "둘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이질적인 것의 부정성을 찾아볼 수 없다. 포르노그래피는 이질성을 완벽하게 소거함으로써 습관화의 경향을 더욱 강화한다. 포르노그래피의 소비자에게는 성애의 상대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개별자의 무대 위에 거주한다. 포르노적 이미지에서는 어떤 타자의 저항도, 어떤 실재의 저항도 나오지 않는다. 여기에는 어떤 예의Anstand도, 어떤 거리Distanz도 없다. 포르노적이라는 것은 바로 타자와의 접촉, 타자와의 만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낯선 것의 접촉과 감정적 격동에서 지켜주는 자기성애적인 자기 접촉, 자기 애착은 포르노적이다. 포르노그래피는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강화한다. 반면 사건으로서의 사랑, "둘의 무대"로서의 사랑은 탈습관화, 탈나르시시즘화의 방향으로 작용한다. 사랑은 습관적인 것과 동일한 것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고 구멍을 뚫는다.
사랑을 새롭게 발명하는 것은 초현실주의의 핵심 관심사였다. 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사랑의 정의는 예술적, 실존적, 정치적 행동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예컨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은 에로스에서 보편적 힘을 본다. "인간과 우주에 값하는 유일한 예술, 그를 별보다 더 멀리 이끌어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은 [……] 에로티즘이다."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에로스는 언어와 현실의 시적 혁명을 위한 매체다. 에로스는 갱신의 에너지원으로 숭배되며, 정치적 행위도 그러한 에로스에서 양분을 얻어야 한다. 에로스는 그 보편적 힘으로 예술적인 것과 실존적인 것, 정치적인 것을 한데 묶는다. 에로스는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 완전히 다른 사회를 향한 혁명적 욕망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에로스는 도래할 것을 향한 충실한 마음을 지탱해준다. (82~87쪽, 강조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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