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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다뉴브

by parallax view 2015. 5. 13.

『다뉴브』(문학동네, 2015)


여러 민족정신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동쪽과 서쪽, 남쪽에는 바다가 있고 북쪽에는 전선이 있는 이 나라에서, 육지의 경계를 넘어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생경한 일이다. 그러니까 땅에 그어진 경계를 넘어 낯선 이들과 만나 다투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경험을 우리는 좀체 해보지 못한 셈이다. 해방과 전쟁, 분단을 거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세상은 명목만 반도인 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땅에 사는 우리가 정말로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민족(‘다른 민족’이자 ‘떠나온 민족’)이었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다른 인간들끼리 만나 부대끼고 피를 흘리고 살을 섞으면서 나온 게 우리다. 다만 우리가 역사를 상상하는 방식,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상하는 방식은 우리의 지리적 감수성에서 나올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걸어서 낯선 땅을 밟지 못한다는 바로 그 단순한 사실이,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옭아매고 있다.


  클라우디오 마그리스의 『다뉴브』는 우리의 협소한 지리 감각을 흐릿하게 만들고 완고한 경계심을 부식시키는 책이다. 저자 클라우디오 마그리스는 수년에 걸쳐 2,800km가 넘는 다뉴브(도나우) 강을 탐사한다. ‘검은 숲’이라는 뜻의 슈바르츠발트에서 시작해 ‘검은 바다’ 흑해로 이어지며 린츠,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같은 아름다운 도시를 줄줄이 꿴 다뉴브. 『다뉴브』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자면 ‘여행기’다. 보통 여행기라고 하면 낭만과 감상에 몸을 맡기는 바람에 오로지 관광객으로서의 자아만 팽창한 채로 펜을 놀려버리는, 그렇고 그런 잡문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는 강 이름을 그대로 제목으로 삼는 대담함과 그밖의 어떤 부제도 붙이지 않는 담백함에서 책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이 일개 여행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책의 주인공은 그가 사랑한 강의 신이므로 신의 이름으로 책을 헌정해야 마땅하다. ‘나’가 아니라 강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글은 강의 유속을 따라 나아가며 군더더기가 없다. 마그리스는 여행자이자 관찰자, 벤야민 식으로 말해 ‘산책자’다. 그는 구경꾼과 다를 바 없이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바라만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수동적인 관찰자의 정체는 능동적인 탐정이다. 탐정은 무엇을 하는가. 범인을 찾아 현장을 탐색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기록을 한다. 기록은 보고서로 정리되기 전까지 메모의 형식으로 쌓이고 또 쌓인다. 『다뉴브』가 하나의 완결된 보고서라기보다는 거대한 메모 더미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다음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 파울은 낡은 서문, 연극 포스터, 역에서의 잡담 구문, 전쟁 시가곡, 장례 문구, 형이상학적 문구, 신문 스크랩, 술집 광고문과 교구의 공고문 같은 이미지들을 길에서 모아 메모하라고 권했다. 『동방 여행 동안의 기념품・인상・생각・풍경』이라는 라마르틴의 작품 제목처럼 말이다. (22쪽)


  그러므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어느 정도 인식한 문인은, 글이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는 걸 자각한 덕분에 쓴 것들에 대해 열정을 품게 되고, 그 말들이 자신을 앞으로 끌고 나가도록 해서 장 파울 작품의 한 인물처럼 옛 서문・프로그램・광고전단・부고・공고 들을 습득하게 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이미지와 문장 들을 붙잡으면서 떠오르는 대로 글을 쓰게 된다. 수첩이 낙서로 가득 차자, 영혼은 더 평온해져 지나가는 시간에 대고 태연하게 휘파람을 분다. (121쪽)


  여행자-탐정인 마그리스는 ‘홈통 문제’로 긴 수사를 시작한다. 다뉴브 강의 수원지를 둘러싼 작은 도시 주민들 사이의 다툼을 비웃듯 강은 한 개의 작은 수도꼭지에서 시작했다는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마그리스가 그 진위여부를 탐색할 때, 책은 아주 잠깐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그중에서도 이야기와 진실이 분간되지 않는, 이야기가 바로 세계 자체라는 것을 강조했던 『바우돌리노』 같은 소설과 닮았다. 탐정은 결국 수도꼭지를 찾지 못했다. 그가 본 것은 물이 넘쳐흐르는 작은 홈통이며, 홈통에서 다른 홈통을 거쳐 다뉴브 강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확인할 뿐이다. 하지만 홈통 문제는 더 큰 세계로 나아갈 구실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사실관계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다뉴브 강이 품은 ‘이야기’를 여행 중이라는 한계를 안고서 최대한 세심하게 살피는 것이 마그리스가 맡은 임무인 듯하다. 그래서 『다뉴브』는 통일성보다 다양성을, 총체성보다 개별성을, 단단함보다 느슨함을 사랑한다. 각 장은 강의 흐름을 따라가듯 때로는 인물을, 때로는 도시를, 때로는 누군가의 기억을 종이 위로 흘려보낸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사람들, 장 파울과 그릴파르처, 카프카와 하이데거, 루카치와 카네티 같은 이들이 다뉴브 강을 낀 도시들에 머물고 스치며 에피소드를 쌓아나간다. 마그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침착하게 역사의 더께를 털어내 이야기를 발굴한다. 예컨대 괴테가 자신이 사랑한 여자의 시 몇 편을 훔쳐 시집에 실었던 이야기 같은 것 말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모방뿐만이 아니라 열정적인 대화 속에 뒤섞인 두 목소리의 화합이다. 마치 두 육체가 사랑을 나누듯, 혹은 서로 다른 감정과 가치가 한 삶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듯하다. 분명 남자가 위법행위를 하긴 했다. 남자 쪽에서 여자의 작품을 무단 도용한 아주 전형적인 경우다. 남자의 이름으로 나온 작품은 이번 괴테의 작품처럼 종종 여성의 작품을 수용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뭔가 다르다. 마리안네는 『서동시집』에서 세계적인 걸작시라 할 시 몇 편을 썼지만 그 이후에는 단 한 편도 시를 쓰지 못했다. 동풍과 서풍에 부치는 그녀의 시, 존재의 숨결 그 자체가 되는 사랑의 노래를 읽을 때면, 마리안네가 그 이후 단 한 편도 시를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불가능해 보인다. 초등학교 1학년 여학생이 죽어가는 장미에 대한 작은 우화를 썼던 것처럼, 마리안네의 서정시들 역시 시의 초개인적인 특성을 증명해준다. 즉 여러 요소가 신비하게 결합되고 연결되어 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말이다. 마치 수증기가 우연한—혹은 어쨌든 예측하기 어려운—어떤 요소들의 결합으로 액체로 응결되고, 비를 만들고, 우산 판매를 늘리며, 타고 갈 택시가 부족하게 되는 현상을 만들어내듯 말이다. (180쪽)


  이렇게 이야기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마그리스라는 여행자-탐정은 유물을 탐사하는 고고학자이자 옛 이야기를 모으는 민속학자, 현지의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생활방식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인류학자가 된다. 강을 따라 동유럽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그에게도 낯선 사회주의 세계로 들어갈수록 마그리스는 더욱더 한 명의 민속학자이자 인류학자가 되어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다뉴브는 ‘여러 민족정신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곳’(390쪽)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뉴브 강이 가로지르며 하나로 꿰어낸 중부유럽은 오늘날의 ‘하나의 유럽’ 유럽연합을 선취한 것일까? 마그리스 역시 장정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갓 솟아난 다뉴브 강의 이 젊고 가는 물줄기를 보면서 나는 자문했다. 강을 따라 삼각주까지 가다보면 여러 다양한 사람과 민족 속에서 피비린내나는 전장을 보게 될까, 아니면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 속에서 이 모두에도 불구하고 하나된 인류의 합창을 듣게 될까. 과거-현재-미래의 전쟁터들이 줄지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면 ‘다뉴브 연방’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44쪽)


  다뉴브 연방은 마그리스의 표현을 빌자면, ‘전체주의 독일의 중부유럽’(36쪽)이기보다 “탄력적인 신중한 정책과 조심스러운 무관심의 태도”(329쪽)가 필요한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제국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합스부르크왕가의 통치술은 분열을 막거나 모순을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모순을 덮고 늘 잠시 평형을 이루도록 만들어서 본질적으로 모순 그 상태로 남아 있게 했으며, 그 모순들이 서로 대립하도록 했다.” (329쪽) 말하자면 합스부르크가의 제국은 소멸할 때까지 스스로 ‘임시방편’이 되는 쪽을 택했다. ‘다뉴브 연방’이라는 꿈도 임시방편일 것이다. 적어도 오늘날의 유럽연합은 다뉴브 연방이 아니다. 유럽연합이 이질적이고 산만하며 모순이 팽팽히 긴장하는 동유럽이 아니라, 서유럽을 중심으로 삼는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그리스는 이를 직감한 것일까. 다뉴브 강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강이 바다로 흘러가는 길목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다뉴브 강은 어디서 끝날까? 이 끊임없는 흐름에 끝은 없다. 단지 현재로 무한히 존재하는 동사만이 있을 뿐이다. 강의 지류들은 제각기 흘러가고, 거만한 하나의 통일체에서 자유로이 흩어져나온다. 조금 빠르고 조금 느릴 뿐 각기 원하는 때에 죽는다. 마치 사망선고가 내려져 심장, 손톱 혹은 머리카락이 상호연대의 끈을 놓듯이 말이다. 철학자는 이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에서, 다뉴브 강이 어딘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 어려울 것이다. 정확히 가리키려다 보면 어정쩡하게 주변을 빙 둘러 주변 전체를 가리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변이 다 다뉴브 강이고, 다뉴브 강 끝은 4300평방미터의 삼각주 어디든지 다 될 수 있기 때문이다. (532쪽)


  다뉴브라는 거대한 꿈에는 끝이 없다. 다뉴브 연방이라는 꿈도 임시방편인 채로 머문다. 하나로 묶이되 뭉쳐지지는 않는 저 끈질긴 길항을 다뉴브는 사랑한다. 누구도 진지하게 통일을 믿지 않는 것 같지만 통일을 국가의 지상과제로 다루는 나라에 사는 우리에게 다뉴브적인 감수성은 낯선 것이다. 『다뉴브』를 읽으면서 중부유럽과 동유럽에 대한 동경보다 더욱더 자라나는 것이, 낯선 세계를 직시할 때의 불편함마저 끌어안는 감수성이길 바란다.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관광 상품이 되어 매끄럽게 단장한 동유럽은 편리한 한편으로 참혹하다. 나는 『다뉴브』를 통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땅과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여행할 때보다 더욱 정확하게 느낄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 감각이 우리의 세계를 ‘여러 민족정신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도록’ 이끌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