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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by parallax view 2015. 3. 15.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 냉전시대 경제학 교류의 숨겨진 역사』(글항아리, 2015)


  조하나 보크만의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경제이론으로 알려진, 오늘날 주류경제학을 구성하고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을 신자유주의와 분리하는 도발적인 시도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자원의 생산과 배분에 관한 학문이며, 자원의 효율적 배분에 있어 경쟁적 시장과 중앙계획은 사실상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 있으므로 신고전파 경제학은 항상 이미 '사회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녀는 현실 사회주의 경제모델을 스탈린주의-국가사회주의에서만 찾는 관점을 협소하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권위주의 또한 국가사회주의적 모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동유럽의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 두 모델에 반대했으며, 보다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시장사회주의'를 구축하려는 시도가 존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종의 '경계 없는 은하계'로서 다양한 이론과 담론이 경합하고 접합하는 간극적 지대 내지 중간 지대 또한 냉전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여기서 억압적인 현실 사회주의를 넘어설 대안을 모색했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는 1989년 현실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 이후 신자유주의가 지구화된 현재에도, 신자유주의 안에는 여전히 '사회주의적인' 성격이 존재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편다. 저자의 주장을 따르자면 문제는 이런 간극적 지대를 멋대로 전유한 우파 경제학자와 신흥 엘리트에게 있다. 그러니 이들에게 빼앗긴 권력을 어떻게 회수하고 보다 민주적이며 참여적인 경제체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일 것이다. 


  역자 홍기빈이 지적했듯이 이런 관점은 '위계에 의한 권력 체제'가 쉽게 공고화되는 현실에 취약하다. 말하자면 보다 민주적인 변화에 대한 갈망은 엘리트 간의 동맹과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으로 인해 쉽사리 꺾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홍기빈의 관점에서 더 나갈 필요가 있다. 보크만과 홍기빈 모두 마르크스주의 내지 '정치경제학 비판'은 노동가치론이라는 낡은 접근의 반복이므로 사회주의를 지탱하기에는 역량 미달이며, 그와 같은 이론적 공백을 채워줄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이때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프로이트의 제자들이 정신분석을 순전히 성에 관한 경험적 추문으로 격하하고 리비도를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형이상학적 영역이나 실존적 영역의 힘 또는 정신성으로 일반화하는 정식을 향해 나가려는 것을 감지했을 때마다―예를 들어 잘 알려졌다시피 아들러, 융, 랑크의 경우가 그러했는데―프로이트는 자신이 원래 구성했던 대상에 대해 날카롭고 거의 본능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초점과 경계를 고수하며 이론적으로 물러났다. 이것은 사실 우리가 프로이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존경스러우며 영웅적인 계기들인데, 이는 또한 그가 자신의 발견과 관점에 대해 가장 고집스럽게 믿음을 고수했던 계기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성이 프로이트주의의 중심이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순 없지만, 성이라는 사실로부터 후퇴하는 것은 일종의 수정주의를 열어 젖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 자신이 언제나 재빠르고 기민하게 비판하고 비난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 『레닌 재장전』, 115쪽)


  프로이트에게 '성'이 그런 것이라면, 마르크스에게는 '경제'가 그렇다. 또한 '경제'를 더 직접적으로 '노동'으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노동 없이 경제를 이해할 수 없으며, 개인의 효용(보크만이 호의를 갖는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경제제도의 진화(홍기빈 등이 지지하는 제도주의 경제학)로 경제를 설명하는 것은 경제의 중핵인 노동을 회피해, 이론적, 실천적인 답보상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또한 보크만의 주장은 한때 대선 이슈로 부상했으나 이제는 죽은 개 취급을 당하는 '경제민주화'의 주변을 맴돌 뿐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럼에도 보크만의 연구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단일한 중앙집권적 국가사회주의가 아닌, 당과 시장, 협동조합과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 등이 접합하면서 형성되는 이질적이고 복잡한 '국가장치'임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 경제학자들에게 신고전파 경제학이 공통의 언어로서 사용되었다는 것, 오늘날 주류경제학의 수학화 내지 계량화가 냉전 체제의 억압적인 분위기(구소련의 스탈린주의, 미국의 매카시즘) 속에서 정치적인 혐의를 회피하고자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경도된 결과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보크만과는 다른 장소에서 진행된 연구로는 헬렌 야페의 『체 게바라, 혁명의 경제학』(실천문학사)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쿠바 혁명정부의 경제정책을 놓고 소련식이냐 쿠바식이냐는 이분법을 넘어, 보크만 식으로 보자면 소련식과 쿠바식 모두 신고전파 경제학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체 게바라가 동료 게릴라들과 『자본』 강독을 하면서도 미국 독점기업의 회계방식을 도입해 쿠바식 경제체제를 만들고자 한 것도,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자본』을  사회주의 건설로 직접 연결하지 못하는 난감함을 반영하는지도 모른다.


  요는, 마르크스주의가 사회주의 정치와 사회주의적 합법성의 새로운 원칙들로써 확충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커다란 실수라고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종류의 정치적 층위를 갖지 않았던 점이야말로 언제나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의 힘이자 독창성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이와는 완전히 다른 사유 체계였으며 전적으로 이론과 실천이 통합된 형태였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권력이라는 수사학은 언제나 수정주의의 근본적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 『레닌 재장전』, 1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