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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

by parallax view 2014. 12. 22.

『책에 따라 살기 - 유리 로트만과 러시아 문화』(문학과지성사, 2014)


  로트만 연구자 김수환의 『책에 따라 살기』는 아무도 그렇게 살려 하지 않는, 혹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태도를 다룬다. 책을, 문학을 일종의 문화적 코드이자 삶의 모델로 삼고 이를 실천하려는 태도 말이다. 김수환은 책에 수록된 첫번째 논문 「책에 따라 살기: 러시아적 문화 유형의 매혹과 위험」에서 러시아 기호학자 유리 로트만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그는 특히 18세기 이래의 러시아에서 사실상 "독자들에게 책을 읽을 것이 아니라 책에 따라 살 것이 요구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당대 러시아 사람들에게 푸쉬킨이란, 톨스토이란, 도스토옙스키란 단지 저자일 뿐만 아니라 삶의 모델과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이론가이자 기획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상생활의 시학'을 이끌어내는 시인이었다.


  자신을 연극 무대 위에 올라간 배우로 상상하고 자신의 삶을 일종의 '플롯'으로 재구성하는 이런 기호적 실천은, 표트르 대제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 이후로 러시아에 급격하게 도래한 근대적 전환과 관련된다. 그리고 책에 따른 삶의 혁명성은 데카브리스트의 12월 혁명에서 극적으로 구현되며 이런 양상은 러시아 혁명의 '전통'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로트만의 독특한 점은 바로 이런 급격한 단절을 러시아 문화의 기저에 흐르는 일반적 형식으로 해석한 데 있다. 말하자면 러시아에서 문화의 단절과 재창조는 18세기에 발명된 개념이 아니라 종말론적이고 중세적인 2원적 모델, 일종의 마니교적 모델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김수환은 낭만주의-리얼리즘-상징주의라는 문학 장르의 3항에서 리얼리즘이 수행한 역할에 주목한다. 말하자면 체르니솁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와 같은 실증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은 낭만주의의 나이브함을 배격한 것일 뿐만 아니라 러시아 낭만주의에 내포된 '책에 따른 삶'을 더욱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지금 여기'에서 책을, 사상을, 이념을 곧바로 구현하고자 하는, 그리고 책에 따른 삶을 살 독자를 즉시 도출하고자 하는 제스쳐가 된다(내겐 저 악명높은 "노동자가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는 레닌의 내전기 발언이 떠오른다). 


  이때 새로운 인간과 세계를 즉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실천과, 스탈린주의의 억압적인 지배가 '새로운 인간'이라는 슬로건 아래 결합한다. 아래는 인용문이다.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사이'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라는 앞선 물음을 연상시키는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답변에 따르자면, 하나의 정치체계이자 특정한 (지배의) '스타일'이었던 스탈린주의는 아방가르드의 '예술' 프로젝트를 현실 구축을 위한 '정치' 프로젝트로 직접적으로 '현실화'해낸 경우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스탈린주의를 모더니즘의 적대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논리적인 계승자("정치예술가")로 재해석할 수 있다. 이런 견해의 대표 격으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유토피아적 기획(창작적 충동)과 새로운 사회적 존재를 창조하고자 했던 스탈린 정권의 정치 스타일(억압적 충동) 간의 내밀한 상호관련성(계승 관계)을 밝혀내고자 하는 보리스 그로이스B. E. Groys의 작업이 있다. (46쪽)


  하지만 이 논문이 나온지 9년이 되는 지금 시점에서, 김수환은 '러시아 2원적 모델의 매혹과 위험' 중에서 위험을 부각하기보다 다시금 그 매혹을 살펴봐야 한다며 자신의 입장을 재고한다. 그것은 천국과 지옥이라는 2원적 모델이 아니라 천국-연옥-지옥이라는 3원적 모델을 통해 일종의 매개항, 계약과 협상이 가능한 영역을 확보해 갈등을 해소하려는 로트만 식 해법이 오히려 교착상태에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 따라 살기』는 다양한 자리에서 저자가 발표한 논문과 발표문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때문에 내용이 완전히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그렇지만 이들을 꿰는 고리는 역시 '로트만'이다). 김수환의 『사유하는 구조』를 읽기 전에 한 번쯤 거쳐갈 만한 관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