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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문화의 해석

by parallax view 2013. 5. 31.

『문화의 해석』(클리퍼드 기어츠, 문옥표 옮김, 까치, 1998) 


제1장 중층 기술 : 해석적 문화이론을 향하여 



 수잔 랑어는 그녀의 저서인 「철학의 새로운 경향(Philosophy in a New Key)」에서 어떤 개념들은 아주 엄청난 힘으로 우리의 지식세계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곤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한 개념들은 초기에는 그 새로운 개념이 등장함으로써 모든 근본적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어버릴 듯이, 그때까지 불분명했던 모든 문제점들이 백일하에 밝혀질 듯이 생각되곤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하나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면 누구나가 마치 어떤 새로운 실증과학을 위한 "열려라 참깨!" 식의 비방이나 되는 듯이 그 개념들을 중심으로 하여 보다 포괄적인 분석체계를 형성해보고자 열심히 노력하곤 하는데, 하나의 위대한 생각이 등장할 경우에 그것이 최소한 얼마 동안은 당시까지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각이나 개념들을 압도할 만큼 갑자기 유행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즉 모든 예민하고 활동적인 두뇌들이 갑자기 모두 함께 그 개념을 탐구하기 시작하며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관련성 속에서, 그것도 각자가 서로 다른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실험할 뿐 아니라, 그러한 작업의 과정에서 그 개념이 지녔던 본래의 의미를 가능한 한 모든 방면으로 확대시키고 일반화시키거나 또는 그것으로부터 다른 개념들을 유도하거나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새로운 생각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난 후에는, 즉 그것이 일단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이론적 개념들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고 난 이후에는 실제로 그 개념을 사용하는 데에 보다 균형을 찾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것이 지녔던 초기의 지나친 인기는 끝나게 된다. 여전히 그것을 우주를 이해하는 열쇠로 보는 열성파들이 몇몇 존속하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유가들은 그 개념이 실제로 창출한 문제점들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들은 그 개념을 적용 또는 확대 적용할 수 있는 부분에 그것의 적용을 시도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분에까지 그것을 확대하는 것은 삼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초기에는 하나의 획기적 개념이었던 것이 보다 지속적이고 영구적인 우리의 지적(知的) 장비의 한 부분을 형성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그 개념이 초기에 지녔던 전능함은, 즉 아무 데나 다 적용될 수 있는 듯이 보였던 무한정한 가능성은 사라지게 된다. 그 다음에는 물론 그것이 제2차 열역학의 법칙이든, 적자생존의 법칙이든, 또는 무의식 동기의 개념이든, 생산양식의 조직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것이 어떤 종류의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결코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점차 그 개념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되며 그러한 과정에서 초기의 혼란으로부터 점차 벗어나게 된다. 


 모든 중요한 과학적 개념들이 모두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되어가는지의 여부는 물론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의 개념에만은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류학이라는 학문은 바로 이 문화 개념을 중심으로 생겼으며, 나아가 그 개념의 영역을 더욱더 제한하고, 특정화하고, 초점을 밝히고, 수용하는 것이 인류학의 관심사였다. 다음에 게재될 논문들이 각기 다른 각도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문화의 개념을 이처럼 축소 조정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개념을 손상시키기보다는 그 중요성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논문들은 모두 때로는 명시적으로, 더 많은 경우에는 그들이 발전시킨 특정의 분석을 통하여 보다 축소되고 보다 전문화되어, 에드워드 타일러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그 유명한 "복합적 총체"로서의 문화 개념을 대체할 만큼 이론적으로 보다 설득력 있는 문화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 타일러의 문화 개념은 그 독창성은 부정될 수 없겠으나, 실제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에는 밝혀주는 것보다 혼란을 가져오는 면이 더 많은 단계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타일러류의 문화이론화가 어떠한 개념적 혼란에 빠질 수 있는가는 지금까지도 훌륭한 인류학 개론서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 클라이드 클룩혼의 「인간을 비추는 거울(Mirror for Man)」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이 저서에서 클룩혼은 약 27쪽 정도를 할애하여 문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1) 한 민족의 총체적 생활양식, 2) 개인이 그의 집단으로부터 물려받는 사회적 유산, 3) 생각하고, 느끼고, 믿는 방식, 4) 행위로부터의 추상물, 5) 한 민족집단이 실제로 행동하는 방식에 대한 인류학자의 이론, 6) 모든 학습된 것의 저장소, 7) 재발하는 문제들에 대한 일련의 표준화된 대응 방향, 8) 학습된 행위, 9) 행위에 대한 규범적 규제를 위한 기제, 10) 외부 환경 및 타인에 대한 일련의 적응 기술, 11) 역사의 응결체 그리고 여기에 절망적으로 한 가지를 더 덧붙인다면 그것은 아마도 하나의 지도(map)로서, 모체로서, 그릇으로서 문화를 정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이론적 산만성에 비추어 본다면, 반드시 표준화된 문화 개념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최소한의 일관성을 보여주며 논의할 만한 범주가 정해져 있는 문화 개념이라도 제시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절충주의가 자기패배적인 것은 그것이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한 가지뿐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을 필요로 한다. 


 나 자신이 다음의 논문들을 통해서 그 유용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문화 개념은 본질적으로 기호론적인 것이다. 인간을 자신이 뿜어낸 의미의 그물 가운데 고정되어 있는 거미와 같은 존재로 파악했던 막스 베버를 따라서 나는 문화를 그 그물로 보고자 하며, 따라서 문화의 분석은 법칙을 추구하는 실험적 과학이 되어서는 안 되며 의미를 추구하는 해석적 과학이 되어야 함을 주장하고자 한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불가해한 듯이 보이는 사회적 현상들을 밝히는 해석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처럼 한 구절로 나타낸 나의 학설은 그 자체가 좀더 설명을 필요로 한다. (pp.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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