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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Think

반딧불의 잔존

by parallax view 2013. 5. 10.

『반딧불의 잔존』(조르주 디디-위베르만, 김홍기 옮김, 길, 2012) 


 왜냐하면 파솔리니가 반딧불의 소멸이라는 이런 겸허한 비유에 부여하고자 하는 극단적이고 과장적인 의미 이상으로, 그 비유는 훨씬 더 상당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의 고유한 "희망의 원리"를 다시금 사유해야 하고, 그 사유는 '예전'이 '지금'을 만나서 우리의 '장래' 자체를 위한 어떤 형식이 마련되는 하나의 미광, 하나의 섬광, 하나의 별자리를 형성하는 방식을 거쳐 진행되어야 한다. 비록 지면에 바짝 붙어 지나가고, 비록 아주 약한 빛을 발산하고, 비록 느리게 이동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반딧불들이 그런 별자리를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반딧불이라는 작디작은 사례와 관련해서 이런 사실을 긍정하는 것은 곧 우리의 상상하는 방식 속에 근본적으로 우리의 정치하는 방식을 위한 조건이 놓여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다. 상상력은 정치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정치는 이런저런 순간에 상상력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런 사실을 한나 아렌트는 칸트 철학에서 길어낸 매우 일반적인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자크 랑시에르가 장기간 수행한 정치에 대한 성찰이 어떤 결정적인 전개의 순간에 이미지, 상상력, "감성계의 분배"에 대한 물음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놀랄 일이 아니다. (pp.59-60, 강조는 본문) 


 그런데 이미지지평이 아니다. 이미지는 가까이 있는 여러 미광들(lucciole)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지평은 멀리 있는 강한 빛(luce)을 우리에게 약속한다. 역사에 대한 사유, 정치적인 입장, 메시아적 전통 사이의 근본적인―또한 극도로 문제적인―관계를 고려한다면, 이런 구별은 잔존에 의뢰하는 사상가와 전통으로 회귀하는 사상가를 구별하기 위해 매우 유용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한편에는 프란츠 로젠츠바이크와 벤야민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카를 슈미트와 에른스트 윙거가 있다. 스테판 모제스가 최근의 한 논문에서 훌륭하게 보여준 것처럼, 로젠츠바이크의 메시아주의에 뒤이은 벤야민의 메시아주의는 장래의 빈틈 있는 이미지에 관한 것이지, 구원이나 종말의 시간의 거대한 지평에 관한 것이 아니다. 벤야민적인 메시아주의의 그 유명한 "좁은 문"은 오로지 잠깐만 열릴 뿐이다. 벤야민은 "1초"라고 말한다. 그 시간은 대략 어둠이 다시 권세를 누리기 전에 한 마리 반딧불이가 자신의 동족을 비추기 위해―부르기 위해―필요한 시간이다.

 이미지는 산발적이고, 취약하고,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소멸하고, 재출현하고, 재소멸한다. 그러므로 메시아적인 틈새를 이미지로서 사유하는 것(이미지는 곧이어 소멸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 앞에서는 환상이 오랫동안 깃들일 수 없을 것이다)과 지평으로서 사유하는 것(지평은 일방적인 믿음에 호소하고, 그 믿음은 영속적인 피안에 대한 사유에 따라 인도되고 지지되지만, 지평은 언제나 자신의 미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미지는 거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잔여 또는 균열이다. 그것은 시간의 어떤 우발성이고, 그것이 시간을 일시적으로 볼 수 있거나 읽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반면 지평은 우리에게 전체를 약속하지만, 그 전체는 언제나 지평의 거대한 소실하는 '선' 뒤에 감춰져 있다.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지평, 예컨대 칸트의 규제적 이념 또는 메시아적 도래 등의 모든 지평에 대해서, 적어도 그것들을 해석하는 관습적인 방식과 관련하여 내가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들이 지평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지평은, 그것의 그리스어 명칭이 지칭하듯, 무한한 진보를 정의하는 개방이며, 동시에 기다림을 정의하는 그 개방의 한계이다." (pp.83-85, 강조는 본문) 


 심지어 가장 어두운 말들도 절대적으로 소멸된 말이 아니라 지옥의 밑바닥에서 기록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존하는 말이 되었다. 바르샤바 게토의 일기들과 폭동 일지들 역시 '반딧불-말'이고, 아우슈비츠의 잿더미에 감춰져 있던 특수부대 (Sonderkommando) 구성원들의 육필원고들 역시 '반딧불-말'이다. 그 말들의 '미광'은,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넘어서서 이야기하고 증언하고자 하는 이야기꾼의 주권적인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의 어쩔 도리 없는 어둠과 1944년 여름의 눈부신 태양 사이를 오가는 이런 특수부대의 저항자들은, 사유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현실 때문에 상상력이 가로막힌 것처럼 보이던 때조차도 이미지들의 출현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은밀한 이미지들이고, 오랫동안 감춰진 이미지들이고, 오랫동안 쓸모없던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벤야민이 모든 이야기, 모든 경험의 증언을 궁극적으로 재가하는 권위로서 인정했던 죽어가는 자의 권위에 힘입어, 우리에게까지 익명으로 전달된 이미지들이다. (pp.127-128, 강조는 본문) 


 사유·기호·이미지는 '경험의 파괴'―또는 파괴 자체―에 저항한다. 이런 저항의 역설적인 방책을 누구보다도 잘 표현한 사람은 아마도 한나 아렌트일 것이다. 역설적인 방책이란 왕국의 검열과 영광의 눈부신 빛(왕국이 모든 사물을 어둠에 빠뜨릴 때, 영광이 우리를 더욱 눈멀게 하려는 일념으로 빛을 사용할 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출현하게 만드는 자유를 말한다. 아렌트는 레싱에게 보내는 찬사 「어두운 시대에 놓인 인간성에 대하여」에서 일종의 어두운 시대에 직면한 사람의 상황을 다루었다. 이런 시대는 "공적 영역이 빛을 발할 능력을 상실한" 시대이며, 더 이상 우리가 이성의 차원에서 '명석하다'고, 감정의 차원에서 '명랑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어떤 이들이 선택할 행동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의 "세계 밖으로" 후퇴하면서도 "여전히 세계에 유용할" 수 있을 만한 것, 요컨대 미광을 추구한다. 그들은 레싱이 그랬던 것처럼 후퇴하지만 고립되지는 않는다. 레싱은 고독 속에서도 "근본적으로 비판적이었으며, 공적인 생활과 관련해서는 완전히 혁명적"이었다. "레싱은 사유 속으로 후퇴하지만 그의 자아로 고립되지 않는다. 만일 레싱에게 행동과 사유의 비밀스러운 연관성이 존재한다면…, 그 연관성은 행동과 사유가 모두 운동의 형태로 일어난다는 사실에 있었고, 그러므로 행동과 사유를 모두 정초하는 자유가 운동의 자유라는 사실에 있었다." 따라서 후퇴에 내재한 고통은 운동에 내재한 기쁨이 된다. 이러한 욕망, 이러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위하기는 타인에게 전달되는 와중에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벤야민과 직결되는 맥락에서 아렌트는 "어떤 행동의 의미는 오직 행위하기 자체가 … 서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을 때에만 드러난다"고 말한다. (pp.147-148, 강조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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