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알랭 바디우, 현성환 옮김, 새물결, 2008)
바디우의 『사도 바울』을 읽으면서 『레닌 재장전』에 수록된 장 자크-르세르클의 「정확함의 사도 레닌, 혹은 재활용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가 거듭 떠올랐다. 레닌의 정확함(정당함)을 뒷받침하는 세 가지 덕목으로 제시된 엄격함, 확고함, 세심함은, 바디우를 따른다면 이미 바울에게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나는 마지막 미덕인 세심함을 "섬세함"으로 바꿔부르고 싶다).
그러나 이 책은 사도 바울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도의 전형인 바울에게서 레닌을 발견하고(혹은 라캉을 발견하고), 바울의 정치적 실천에서 레닌의 정치적 실천을 도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나에게 바울은 사건의 사상가=시인인 동시에 투사의 모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한결같은 특징들을 실천하고 진술하는 사람이다." p.13). 즉 원서의 부제가 말해주듯이 "보편주의의 토대"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주체(사도)는 로마 제국의 지배적 보편성(덧붙여 그리스 철학의 완결성)과 유대인 공동체의 특수성 모두와 거리를 둔 채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언한다. 예수라는 사건은 곧 "은총"이다. 기독교적 주체인 그/녀는 일자 안에서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그/녀는 모든 차이를 가로지르는 보편성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된다. 오늘날 화폐의 보편적 추상성과 다문화주의의 특수성 사이에 길을 잃고 상대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세계에서 바디우가 사도 바울에 주목하는 이유다.
바울이 언급한 이래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되어 닳고 닳아버린 믿음, 소망(희망), 사랑(자애)이라는 슬로건은 확신, 확고함, "사랑(말 건넴)"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차이를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무심하게 가로지르는 보편성 없이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세계란 존재할 수 없다. 바디우가 찾아내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형식, 즉 선언(확신)과 인내(확고함)와 보편적인 말 건넴(사랑)을 통해 이 멸망해 가는 세계를 돌파하는 주체의 형식이라고 할 것이다. 바디우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은밀하게 참조했을 책에는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조효원 옮김, 그린비, 2012)도 들어갈 것이다. 한편 지젝이 날카롭게 간파했듯이 바디우의 정치학에서 빠진 것이 바로 "경제"라는 점에서 『사도 바울』 또한 "정치결정론"에 들어설 위험이 있음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이제 다시, 바울의 서신들을 읽자. 레닌의 정치적 개입을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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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이 두 가지 조건(그런데 아주 다행히도 『구약성서』에도 그러한 명령이 들어 있다)을 충족시켜준다. 이 유일한 명령은 어떤 금지도 내포하지 않은 순수한 긍정이다. 그리고 믿음을 요구한다. 부활 이전에 죽음에 맡겨진 주체는 자기를 사랑할 어떤 이해 가능한 이유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타자Autre에 대한 헌신을 통해 자기를 잊어버리는 헌신적인 사랑의 이론을 말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다. 타자의 초월성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주체가 사라질 것을 요구하는 이러한 거짓 사랑은 나르키소스적인 주장일 뿐이다. 이것은 네번째 담론, 즉 내밀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이라는 담론에 속한다. 바울은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주체가 본인과 갖게 되는 이러한 사랑의 관계는 오직 그러한 진리를 선언하는 주체를 정립시키는 살아 있는 진리에 대한 사랑일 뿐이다. 이처럼 사랑은 사건과 믿음을 통한 주체화의 권위 아래 있다. 왜냐하면 오직 사건만이 주체를 사랑할 수 없는 죽은 자아가 아닌 다른 것이 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법은 주체화(확신)에 의해 가능해지는 방식으로 타자autre들과 모두를 향한 자기-사랑의 힘을 전개하는 데 있다. 사랑이란 정확히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화의 보편적 힘을 사건적 충실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리고 충실성이 진리의 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바울의 사유 속에서 사랑이란 바로 자기-사랑을 보편적으로 말 건네는 힘에 따라 그리스도라는 사건에 충실한 것을 말한다. 사랑은 사유를 힘으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라 사랑만이 구원의 능력force을 갖는 이유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다음과 같다.
정리 6. 어떤 진리에 힘을 주고 그에 대한 주체적 충실성을 결정하는 것은 사건에 의해 정립된 자신과의 관계가 모두에게 말 건네는 것이지 그러한 관계 자체가 아니다.
이것을 투사의 정리定理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진리도 홀로이거나 특수하지 않다. (이상 pp.172-173, 강조는 본문)
바울의 직관에 따르면 모든 주체는 주체화와 꿋꿋함의 접합이다. 그것은 또한 즉각적인 구원은 없으며 은총 자체는 가능성에 대한 지시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는 돌발 속에서뿐만 아니라 노력 속에서 주어져야 한다. '사랑'은 그러한 노력의 이름이다. 바울에게 진리는 오로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갈라디아서」, 5장 6절) 것이다.
스스로를 세계 속에 실존케 하는 진리의 힘은 이 진리의 보편성과 동일하고, 이 보편성의 주체적 형태는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이름 아래 그러한 보편성이 그리스 사람이든 유대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모든 다른 이들에게 끊임없이 말 건네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이 귀결된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무언가를 할 수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3장 8절).
정리 7. 진리의 주체적 과정은 그러한 진리에 대한 사랑과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전투적 실재는 그와 같은 진리를 구성하는 모두에 대한 말 건넴이다. 보편주의의 물질성은 모든 진리의 전투적 차원이다. (이상 pp.176-177, 고린도후서 인용의 그리스어 병용표기는 생략)
바울은 자기의 사유를 개념적 일반성들이 아니라 개별적 사건에 할당하므로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반론을 걷어내야 할 것이다. 그처럼 개별적인 사건이 우화의 질서에 속한다는 것은 바울이 예술가나 학자 또는 국가의 혁명가가 되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철학적 주체성―그것은 개념적 정초 또는 자기정립에 자기를 종속시키거나 또는 실재적 진리 공정의 조건 아래 자기를 위치시킨다―에 대한 모든 접근을 막는다. 바울에게 진리라는 사건은 철학적 진리를 논박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 그러한 사건의 허구적 차원은 그것이 실재적 진리라는 주장을 논박한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바울은 보편성의 반철학적 이론가다라고. 반철학자들에 의해 환기된 사건(또는 순수한 행위)이 허구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스칼에게서도 마찬가지이며(바울과 동일하다), 니체(니체의 '위대한 정치'는 세상을 두 동강 내지 못했다. 두 동강 난 것은 니체였다)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pp.209-210, 강조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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