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사사키 아타루, 송태욱 옮김, 자음과모음, 2012)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읽고 별 할 말 없다면서 페이스북에 본문을 길게 인용하다 휴대전화 키패드로 쓰는 게 짜증나 아예 인상적인 문단 몇 개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적다 보니 저자가 거듭 강조했던 일을 나 또한 반복함을 떠올렸다. 저자에 따르면 읽는다는 것은 늘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는 읽고 나면 미쳐버리므로 읽은 내용을 망각하거나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광기와 자기방어 모두를 물리치는 한편, 결코 읽기를 멈춰서는 안 된다. 읽는다는 것은 늘 다시 읽는 것이고 고쳐 읽는 것이며 쓰고 다시 쓰는 것이다. 문학의 범위는 아주 넓고 우리의 혁명은 바로 읽고 쓰는 데 달렸다. 오직 읽고 쓰는 것만이 혁명적이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혁명가는 마르틴 루터와 무함마드, 니체와 사뮈엘 베케트, 버지니아 울프와 <로마법 대전>을 읽고 다시 쓴 중세 해석자들이다…. 종말에 애써 초연하려는 저자의 자세가 너무 거만해보여 불편하기도 하지만,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읽고 쓰기를 멈추지 않으려는 그 태도만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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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도 전혀 모르겠다, 머리에 들어오지가 않는다, 지루해서 왠지 싫은 기분이 든다고 하는 것, 다들 뭔가 자신의 능력이 뒤떨어져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화를 내거나 책을 내팽개치거나 하는 것입니다. "번역이 나빠" 라고 한다거나 "좀 더 쉽게 쓰란 말이야" 라며 다른 사람 탓을 하거나 "좀 더 공부해야겠는걸", "좀 더 쉬운 책은 없을까" 라든가, 초급이 있어야 중급이 있고 중급이 있어야 상급이 있다는 듯한 지知의 서열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런 일종의 열등감이나 분노를 이용하여 엉터리 같은 입문서나 비즈니스 책이나 팔아치우며 독자를 착취하는 패거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착취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이건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이렇습니다. 당신의 꿈을 그대로 보면 저는 미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문득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리운 고향의 풍경이나 할머니 꿈을 꾸었다고 합시다. 멀리 저편에 흐릿하게 흔들리는 추억과도 같은 그 꿈을. 그러나 제가 그것을 그대로 직접 또렷이 보았다면. 또는 제 꿈을 당신이 보았다면. (pp.39-40)
반복합니다.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고독한 싸움'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p.81)
됐나요?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 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p.105)
대천사가 전한 신의 계시, 전 이슬람 세계를 정초하는 최초의 계시는 이렇습니다. 원문은 운을 살리고 있습니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p.128)
그렇다면 거기에서 포교는 잘되었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혹한 박해를 받았고, 암살당할 뻔하기도 합니다. 『코란』 안에서 그가 맹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왜일까요? 이제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딸들을 죽인 자들이여, 자신의 딸들을 생매장한 자들이여, 최후의 심판의 날이 왔을 때 그녀들이 어떤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는지, 너희들은 해명할 수 있겠느냐. (pp.131-132)
그리고 무함마드는 천사를 매개로 해서만 신의 말을 듣습니다. 왜냐하면 무함마드 자신은 직접 신을 보지 않았고 신의 음성을 듣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이른바 신비주의'와는 다릅니다. 그렇습니다. 천사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어머니, 두 어머니인 것을 가로막는, '읽을 수 없는' 것의 거리 자체이고, 이 무한의 거리가 해소되는 '읽을 수 있는' 것의 아주 작은 기회입니다. 해후의 기회고 조우의 기회며, 그리고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는 오만함을 용서하지 않는 무한의 소격疏隔입니다. (p.134)
혁명의 담당자는 법학자로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철저하게 읽습니다. 읽고, 다시 읽고, 고쳐 쓰고, 씁니다. 하지만 그 전에 어학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식자율이 매우 낮은 세계였습니다. 사전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공부해야 합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법문입니다. 앞으로 적용될 법입니다. 한 자 한 구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상하게 오역하면 사람이 죽습니다. 르장드르는 "이것은 문법학자의 혁명이다"라고 말합니다. 철저하게 문법적으로 정확하게 합니다. 절대 오역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미쳐버릴 것만 같은 일이라는 걸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쇄술 같은 것도 없으니까 사본寫本을 만듭니다. 손으로 베껴씁니다. 거기서 또 틀렸다가는 큰 소동이 벌어지니까 이보다 더 철저한 '독서'가 있을 수 있을까요?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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