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인가, 아닌가. 차라리 언어는 곧 사고라고 해야 할 게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언어를 벼리기엔 너무 많은 정보와 사건이 발생하고 소멸해, 이들을 하나하나 붙잡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이 뒷북이고, 그런 점에서 모든 글쓰기는 뒷북일 것이다.
2. 두리반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입장에서, 두리반이 도시 재개발 문제에 대한 아무런 해답도 제공하지 못했다는 지적은 거슬리지만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권리금을 매개로 한 입주와 지구 단위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두리반이라는 사례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두리반 투쟁이 다른 재개발 지역에 줄 수 있는 메시지는 '잉여들'과 함께 싸우라는 것 뿐인가? 만약 그 외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면, 두리반 투쟁에 함께 한 사람들은 두리반을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
3. 여기서 정당화를 '위선'이나 '합리화'로 재단하지는 말아야 한다. 지난 연대 청소 노동자 파업과 지금 연대 사회과학대 이전을 둘러싼 학내 투쟁에서 유독 눈에 띄는 구호는 '정당한 투쟁'이었다. 왜 항상 투쟁은 정당화되어야 하는가? 어떤 주장이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이해당사자는 물론, 이해관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선험적인 정당성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선험적인 정당성을 주장하더라도(ex: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투쟁') 대부분 헌법이나 인권 같은 상위 개념을 끌어오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두리반 투쟁이 정당하다면 그 정당성의 토대와 한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두리반을 매개로 한 도시 재개발 반대 블록을 형성할 수 있다.
4. 비록 피상적인 관찰이지만, 두리반 투쟁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 정당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두리반은 특수하고 국지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특수하고 국지적인 현상이 도시 재개발 사업이라는 사건을 어떻게 상징할 수 있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그 설명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5. 그러나 나는 그런 물음을 던지는 방식과 태도에 거듭 문제제기를 해야겠다. 같은 말이라도 위선적으로 하느냐, 위악적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차원이 아니다. 지금 '싸가지'가 있고 없고를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다. 두리반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비판이 과연 얼마만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가를 따지겠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런 이성과 합리를 담론의 목적으로 잡는 태도의 당파성을 묻겠다는 것이다.
6. 자신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포지션에 놓았을 때, 그리고 최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을 추구할 때, 그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지배적인 언어를 표상한다. 이성과 합리로 감성과 정념을 다스린다는 이분법은, 이성적인 엘리트가 비이성적인 대중을 다스린다는 은유를 포함한다(남성이 여성을, 백인이 흑인과 황인을,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무엇보다 도시 재개발 사업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이란 종종 법률의 합리성과 인간 행위의 이기심이라는 긴장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걸 떠올려야 한다. 모든 것을 이성과 법대로 설명하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질문이 아무리 예리하고 적확하더라도, 그 질문이 도출할 결론은 지극히 체제편향적일 수밖에 없다. 말하는 방식이 내용을 결정짓는 것이다.
7. 그런 점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답변(혹은 대책)을 요구하는 태도가 무엇보다 문제다. 이것은 타자는 어리석고 자신은 현명하다는 지적 오만일 뿐 아니라("나를 설득해 봐"라는 식의), 도시 재개발 사업을 둘러싼 다양한 갈등을 개인의 이기심 문제로 환원시켜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도시 재개발 문제는 무엇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도시의 외곽으로 계속 물러날 수밖에 없는 빈민의 문제이다. 여기서 어느 정도까지를 빈민으로 볼 수 있느냐,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유례없지 않느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또, 권리금 뿐만 아니라 부동산을 매개로 자산소득 상승을 기대하던 계급, 계층이 강남 땅부자만은 아니라는 인식도 빼놓을 수 없다. '모두'가 땅놀음에 혼을 팔지 않았냐는 얘기다.
8. 하지만 모든 것을 개개인의 탐욕으로 돌리거나, '모두'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확대하는 것은 논점을 흐리는 일이다. 사건의 디테일을 보자는 얘기를 지배적인 언어에 담을 때, 도시 재개발 사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오히려 막아버리고 만다. 여기서 나는 이른바 진보 운동의 맹점을 짚는 방법론으로 지배적인 언어를 끌어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생각한다. 왜 그는 자신의 계급적, 계층적 입장에서 보지 않고, '이성'과 '객관'의 눈으로 '조망'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도덕'과 '윤리' 위에 서는 것만큼이나 기만적이지 않은가? 입장을 바꿔 보는 것과 '모든 것'을 보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태도가 아닌가?
9. 다시 한 번, 두리반 투쟁에 얽힌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 기쁨과 슬픔을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감상적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감성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배제해버리는 담론에서 빠져나와 현장의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 도시 안에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도시'에 대한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웹문서나 공문서 밖의 세계를 호흡할 필요 말이다.
10. 그럴 때에야 두리반과 홍대 앞 상가의 지구 단위 개발 문제, 그리고 더 나아가 서울의 도시 재개발 정책과 이로 인해 '빼앗긴 자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바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말이다. 그래야 안종녀, 유채림 부부를 이 시대의 필레몬과 바우키스로 보는 데서 나아가 도시 재개발 반대 블록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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