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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an Vital

초록사회당과 적녹블록

by parallax view 2011. 6. 7.
"다시 녹색사회당으로 가자"

"사회민주당으로 당명 바꾸자"

진보신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꾸어야 한다는 글을 올린 게 작년 이맘 때쯤이다. 당 내외의 역학관계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다시피한 상태였기에, 그 글은 내 어둠을 밝힐 횃불은 커녕 촛불조차 되지 못했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문제의식은 같다.

중요한 것은 "새롭다"는 말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한국 사회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에 내가 사회민주주의와 사민당, 보편적 복지 국가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1970년대 이전의 유럽으로 돌아가자는 데 불과한, 다분히 '보수적'이고 더러는 '반동적'인 의견이었다. 이른바 '복지파'나 '통합파'의 입장에서 해석될 여지도 다분했다. 무엇보다 복지국가전략은 노동-자본 간의 '사회적 합의'가 가능했던 조건 위에 서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볼 때, 또 유럽이 언제나 '제3세계'의 노동력과 자연을 흡입함으로써 풍요를 누려왔다는 걸 떠올려 볼 때, 지금은 너무나 자명한 전제로 공유되고 있는 복지국가론이 그렇게 간단히 헤게모니를 쥐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김현우, 장석준 등의 분석이 의미 있을 게다. 그들은 (노동) 계급의 구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기존 복지국가 담론만으로는 빈곤과 생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의 '진보양당' 통합에 휘둘리지 말고 통합진보정당을 더욱 발전시키든, 혹은 통합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새로운 정당을 창조하든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녹색사회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의식에 적극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과연 좌파는 혹은 사회주의자는 적녹블록을 만들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정치적 선언은 '지금 있는 현실'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현실'을 만들어내려는 행위다. 하지만 (역사적) 블록은 여전히 블랙박스에 남겨둔 채, 녹색사회당의 창당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이브하지 않은가? 김현우는 진보신당의 강령과 정치적 실천을 예로 들며, 진보신당은 오래 전부터 녹색사회당의 전신이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혹은 前 전진 그룹?)가 양당 통합을 주어진 조건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한계(약점이나 단점의 의미가 아니다)를 안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적녹블록을 생태운동이나 여성운동에서 찾는다 하더라도, "녹색이 곧 적색이다"는 구호만으로는 동맹을 구축할 수 없다. '초록사회당'은 시민단체 간의 연결을 넘어서는 조직들을 구축할 수 있을까? 조직을 구축하더라도 적녹의 가치와 지역 주민의 이해관계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사회주의자들은 여전히 생태주의와 여성주의 등을 '부문 운동'으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정규직, 청년/노인, 여성, 성소수자라는 다양한 계급, 젠더 정체성이 '노동자'라는 이름 위에 포개져 있는 현실에서, 대공장 노조를 견제, 견인하는 노동 조직을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까?
 
여러 의문들이 고개를 드는 것은 그만큼 초록사회당―'녹색사회당'보다는 과거 '초록당'을 연상시키는 '초록사회당'이 더 낫지 않은가?―이라는 이름이 갖는 매력과 시대적 의미 때문일 게다. 진보양당 통합이 논란에 휩싸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만큼 소모적이다. 깃발은 간데 없고 동지만 넘쳐나는 때, 나는 초록사회당이라는 깃발이 그나마 진보정당이 한국 사회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제시해 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