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상 오세훈의 불신임 투표나 다를 바 없었던 무상급식 투표를 재정 건전성 같은 '합리성'의 문제로 보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것은 나쁜 투표 같은 '도덕성'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나쁜 투표 하지 맙시다"에 대한 우파의 대답은 간단하다. "좋은 투표가 있으면 좋은 폭력도 있게?" 논리적이기까지 한 이 조롱은 한국의 좌파 혹은 '진보개혁세력'이 관성적으로 보여주는 도덕주의를 정확하게 반증한다('나쁜 투표'의 의미를 농업과 연관시킨 우석훈의 글은 참고할만 하다. "무상급식 논쟁, 또 다른 축은 '농업'이다"). 나쁜 투표가 "애들 밥그릇 빼앗는 건 나쁜 짓이다"는 직관에서 나온 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2. 무상급식 투표와 관련된 기사들이 하나같이 공유하는 전제는 그 이슈의 정치적 파급력이다. 오세훈에게 있어, 그리고 그의 대항마를 자처하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에게 있어 이 이슈는 철저히 (좁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오세훈이 33.3%라는 벽을 넘느냐 넘지 못하느냐에 오세훈 개인의 정치적 영향력에 현 정권의 향방까지 점쳤던 기사들은 무상급식이 투표 결과 어떻게 진행될 것이냐에 하등 관계없다는 걸 보여줬다. 실제로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25.7%의 투표율을 기록하며 개표조차 되지 못했고, 무상급식은 서울시교육청 원안으로 추진될 예정이다(물론 여전히 법적 공방이 남아 있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정치가 사회(적인 것)를 산출할 가능성에 대한 '국민적' 믿음이 정치 그 자체에 대한 환멸에도 불구하고 여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매개는 역시 '국가'이다. 무상급식 논쟁이 국민적 이슈로 올라간 원인을 오세훈 개인의 정치적 야망에 한해 분석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여전히 '국민'은 국가가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고 요구하고, 이에 대한 합의가 현재의 무상급식 논쟁에서 반복된 것일 뿐이다. 한나라당과 우파가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선동으로 무상복지 논쟁을 조기 점화하려고 하지만, 정작 복지 포퓰리즘에 기댔던 정부가 박정희/전두환 정부였다는 것을, 지금의 한국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독재자들이 만들어놓은 국민적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야겠다.
또 한 가지는 정치사회―정치꾼들의 투견장으로 상상되곤 하는―에서 진보적 이슈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쪽은 의회가 아니라 행정, 그 중에서도 교육 행정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진보 교육감들'은 무상급식과 학생인권조례 등의 정책을 제시하고 이슈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만큼 다음 교육감 선거는 더욱 치열할 것인데, 당연히 우파는 강남 3구를 등에 업을 것이다.
3. 이런 양상들은 진보적인 정책이 국가기구를 경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여전히 좌파의 목표는 국가를 접수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혁명적 국가기구'―그런 게 존재할 수 있다면―의 창설만이 유일한 선택지일까? 우리가 끝내 대면하는 것은 여느 '공동체들'(아나코-생디칼리스트적인 협동조합이나 공장평의회 등)이 아니라 국가라는 추상적이면서 물질적인 실재라는 게 씁쓸하다(물론 부분적으로 무상급식과 지역농업은 서로 포개져 있다는 걸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4. 한편 이번 투표는 계급투표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추정을 더욱 강하게 하는 것 같다. 일종의 쐐기로서 1997년을 상정할 수 있다면, IMF 구제금융선언 이후는 강남 3구/부동산 부호라는 지역/계층이 꾸준히 반동성을 드러낸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구의 투표율이 기록적으로 낮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우파 지지층의 결속력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하지만 계급투표가 어디까지나 반동주의자reactionaries에 의해 표면화된다는 것에서, 보수세력과 개혁세력 공히 '국민'의 이름을 내걸고 있다는 것에서, 계급투표는 대항계급의 형성과는 거리가 멀다. 계급투표는 계급 형성의 결과일 뿐이다. 계급투표는 그런 점에서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 주권을 보유한 '시민'도, 변혁을 담지하는 '계급'도, 행정적 관리대상인 '주민'도 모두 국가의 담지자인 '국민'을 경유해야만 한다는 역설 속에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둘러싼 역학관계 뒤에 여전히 '국가'라는 거대한 이름이 도사리고 있음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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