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지하철역을 오가는 중 TV 모니터에서 광고 하나를 보았다. “독서기록 해야지. 봉사활동 해야지. 특별활동 챙겨야지. 어머니회 가야지. 급식당번 해야지. 참관수업 몇 시더라. 초등 엄마들은 모두 수퍼우먼.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 제일 중요한 아이 학교 공부. 제발 좀 도와줘요.” 이 광고의 결론은 학습지가 엄마들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초등학생 엄마들은 수퍼우먼이 된 것일까. 아니, 꼭 수퍼우먼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 엄마들은 수퍼우먼이 되려고 할 것이다. 왜냐고? 그게 아이를 위한 것일 테니까.
장면 둘. 영화 <블랙 스완>에서, 엄마는 니나를 사랑스런 소녀로 키워왔다. 발레리나였던 그녀는 자신의 딸이 일류 발레리나가 되길 바랐다. 반면 딸을 자유분방한―아마도 엄마의 입장에서는 난잡하기 짝이 없었을―세계와 분리하고자 하는 이중성도 보인다. 때문에 테크니션 니나가 숙련도 이상의 연기를 해내는 한 명의 발레리나로 성장하는 데 엄마가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성장도 성공도 ‘내 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엄마의 강박은 니나의 욕망과 충돌하고 만다. 아마도 엄마는 항변했을 것이다. “모든 게 다 너를 위해서야!” 적어도 그건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 테니까.
‘매니저 맘’이니 ‘헬리콥터 맘’이니 하는 말이 익숙한 요즘이다. 아이들의 모든 것―입시에서부터 일상생활까지―이 엄마의 관리 하에 있는 시대다. 교육이 여전히 신분 상승의 수단으로 인식되는 한국에서, 갈수록 과열되는 입시 경쟁은 더 많은 정보와 자본을 가진 쪽에 유리하게끔 진행되고 있다. 사교육을 비롯해 엄마가 ‘개입’할 여지가 늘어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빠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고, 엄마는 집 안에서 아이들을 돌본다는 전형적인 구도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 것만 같다.
경제(經濟)로 번역되는 외래어 이코노미economy의 어원은 그리스어 오이코노미oeconomi다. 오이코노미는 ‘가정관리’ 쯤으로 번역된다. 가정관리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는 가정에 대한 모든 것을 의미했다. 밥을 짓는 것에서부터 노예를 부리고 아이를 기르며 살림을 꾸리는 것 등등이 바로 오이코노미였다. 당시 오이코노미의 주인은 곧 그 집안의 남성, 즉 가부장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주인은 이른바 ‘안사람’, 즉 어머니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근대 사회의 어머니에게는 오이코노미의 실행자로서 역할도 포함되었다.
그 점에서는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것은 언제나 안사람의 몫이었다. 조선 시대를 지나 근대화된 오늘날에도 그 역할에는 큰 변함이 없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엄마의 역할은 현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후기 근대post-modern에 들어와서 좀 더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앞서 말했듯이 엄마(들)는 아이들의 삶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럼에 따라 ‘오이코노미’의 세계 역시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왜 엄마들의 ‘오이코노미’는 확장된 것일까? 그 이유에는 IMF 구제금융을 겪으면서 계급 격차가 심화되고 그에 따라 신분상승의 기회가 좁혀짐에 따른 위기감이 작용한 듯하다. 비록 ‘엄마들’이라고 뭉뚱그려지지만, 이 엄마들의 계급적․지역적 기반이 중산층․서울(수도권)이라는 점을 떠올려보자면, 이 현상은 보다 구조적인 것이라고 봐야 할 듯하다.
그 위기감이 아이들에게 비춰질 때, 지금의 ‘엄친딸’, ‘엄친아’가 나온다. 사람들이 김연아의 화려한 스핀에 환호를 지를 때, 그 이면에는 김연아를 세계 최고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키워낸 엄마에 대한 감탄 역시 숨어 있다. 김연아 뿐만 아니라, 하버드나 스탠퍼드에 입학해 우수한 학생으로 인정받는 아이들의 책에는 언제나 ‘엄마’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많은 엄마들이 이 ‘대단한 엄마’들을 보며 부러워하고, 자신의 아이도 김연아와 하버드생이 될 수 있도록 관리에 더욱 만전을 기한다. 가정이 오이코노미를 넘어 하나의 매니지먼트 기업이 되어가는 것만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마들이 더욱 더 열심히 아이들을 돌봐주고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해야 한다. 이렇게 또 다시, 새로운 ‘주식회사 수퍼우먼 엄마’가 설립된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엄마들이 수퍼우먼일 수 있을까? 투입 대비 산출로 보았을 때, 지금의 아이들에게 매길 수 있는 상품으로서의 등급은 그다지 높지 않다. 해외 유학을 다녀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영어 학원 강사이고, 취업의 문은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이 기업화된 한국에서, 기업화된 가정이 재생산할 수 있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생애 재생산이 필수적이다. 많은 '어른들'이 개탄하는, ‘제 생각도 개김성도 없는 요즘 아이들’은 어쩌면 영화 속 니나 같은지도 모른다. ‘주식회사 수퍼우먼 엄마’는 ‘니나들’의 반항으로 무너질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피를 가득 흘리며 “난 완벽했어”라고 중얼거리는 니나의 모습에서, 엄마의 욕망을 자신에게 고스란히 투사한 요즘 아이들의 모습밖엔 보지 못했다. ‘주식회사 수퍼우먼 엄마’가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예감만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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